사주가이드#1

필리핀 정치가 리살 사주

Mr.대산 | 2017-10-03 11:45:38

조회수 : 1,267

리살 [José Rizal (y Alonso)]필리핀 정치가·의사
 
 
 
양력: 1861년 6월 19일
음력: 1861년 5월 12일
 
구분
 
 
 
당령
 
12운성
 
驛馬
桃花
將星
12신살
74
64
54
44
34
24
14
4
運路
 
 
 
1896년 경인대운 36세 병신년 12월 30일 총살당함.
기토당령, 진사공망
 
정식 이름은 José Protasio Rizal Mercado y Alonso Realonda.
1861. 6. 19 필리핀 칼람바~ 1896. 12. 30 마닐라.
 
필리핀의 민족주의 운동을 고취시킨 애국자·의사·저술가.
 
아버지는 중국계 필리핀인으로 부유한 지주이며 사탕수수 재배 농장주였고 어머니 테오도라 알론소는 당시 필리핀에서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리살은 마닐라에 있는 아테네오 데 마닐라와 산토토마스대학교에서 배웠으며 스페인의 마드리드대학에서 의학과 교양학을 공부했다. 뛰어난 학생이었던 그는 곧 스페인에 유학온 필리핀 학생 단체의 지도자가 되었고 조국에 대한 스페인 식민통치의 개혁에 힘썼으나 필리핀 독립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개혁에 있어 최대의 적은 당시 심각한 혁명을 겪고 있던 스페인이 아니라 정치·경제면에서 필리핀을 마비상태에 빠뜨린 프란체스코·아우구스티누스·도미니쿠스 수도회 탁발수사들이라고 보았다.
 
파리와 하이델베르크에서 의학 공부를 계속했고, 1886년 타갈로그어로 〈나에게 손대지 말라 Noli me tangere〉이라는 첫번째 소설을 발표했으며, 여기에서 가톨릭 탁발수사들의 사회지배가 낳은 죄악상을 격렬하게 파헤쳤다. 이어 〈체제전복 El filibusterismo〉(1891)을 발표하면서 필리핀 개혁운동의 주요대변자로서 명성을 다졌으며 안토니오 모르가의 〈필리핀의 역사 Sucesos de las Islas Filipinas〉의 주석판(1890, 재판 1958)을 내어 필리핀 원주민은 스페인이 필리핀에 오기 전부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바르셀로나에서 간행되는 신문인 〈라 솔리다리다드 La Solidaridad〉에 수많은 글을 발표했다(→ 색인 : 선전운동). 발표한 글에서 나타나듯이 리살의 정치강령은 필리핀을 스페인의 한 주(州)로 통합하고 스페인 국회에 대표자를 파견할 것, 스페인 탁발수사를 필리핀 탁발수사로 교체할 것, 집회·결사의 자유와 필리핀인과 스페인인의 법적인 평등을 보장할 것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부모와 친구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1892년 귀국하여 마닐라에서 비폭력 개혁단체인 '필리핀 동맹'(Liga Filipina)을 결성했으며 이 때문에 민다나오 북서부의 다피탄으로 추방되었다. 여기서 4년 동안의 유배기간중 과학을 연구했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1896년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카티푸난이 폭동을 일으켰다. 리살은 그 단체와 무관했고 폭동에 참가하지도 않았으나 체포되었다. 스페인 군당국은 그를 재판에 회부, 유죄판결을 내려 마닐라에서 공개적으로 총살하였다. 그의 희생으로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말고는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형되기 전날, 산티아고 요새에 갇혀 있을 때 리살이 지은 〈마지막 이별 Útimo adiós〉은 19세기 스페인 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출처 : 사주명리 - cafe.daum.net/sajusa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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