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시인, 전 대학 교수
출생 1943년 12월 25일 (만67세) | 양띠, 염소자리
양 력: 1943년 5월 11일 10:00
음/평: 1943년 4월 8일 10:00 여자
시 일 월 년
己 己 丁 癸
巳 巳 巳 未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戊 대운: 순행
寅 丑 子 亥 戌 酉 申 未 午
88 78 68 58 48 38 28 18 8.12
대운 시작: 8세 12월 13일
현재 나이: 69 세
현재 대운: 甲
35살 때 교수이던 남편 뇌졸중으로 반신불수, 55세까지 남편 병수발 남편사망, 혼자 가정 부양, 이 기간 중 시어머니도 척추손상으로 9년 병수발, 91년 시모 사망, 40세 석사취득 대학강사 시작, 60세 유방암
신달자, 개인사 털어놓은 산문집 발간 2008.04.04
"고통의 삶이 문학 살찌우길… 그래서 견뎠다"
"1977년 5월11일 12시30분. 그가 쓰러졌다. 점심으로 국수를 먹던 중이었다. 내 생일날 그가 쓰러졌다. (중략) 으윽… 뭐 그런 소리였는지 무슨 소리가 분명 들렸는데 그는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찰나를 받아 안았다. 나는 그 순간 운명을 안아 버린 것이다."(19~20쪽)
신달자(65) 시인이 신산했던 30년 결혼 생활의 사연을 고스란히 담은 산문집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민음사 발행)를 펴냈다. 신씨가 그간 발표한 시나 산문에서 그의 가정사에 심상찮은 곡절이 있음을 감지했던 독자일지라도, 그가 애제자 '희수'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써내려간 이 직정(直情)한 이야기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신씨가 어떤 글에서 "세상에 더는 없는 불행한 연애"-시집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 >(2001)의 수록시 '고백'에서 '불행'의 연유를 눈치챌 수 있다-라고 불렀던 것을 거쳐 맞은 대학교수 남편은 결혼 9년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23일의 혼수상태를 거쳐 깨어났지만 반신불수가 됐다.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자기에게 거는 자존심 때문"(63쪽)에 시인은 헌신적 간호를 통해 남편을 복직시켰지만 이후 24년간 이어진 병수발은 "차라리 미쳐 버리고 싶었"(77쪽)던 시련의 나날이었다. 뇌손상으로 성격이 변해가는 남편, 주변의 동정과 조롱이 섞인 시선, 부잣집 딸로 자란 시인을 보따리장수로 내몬 기울어진 살림….
비극은 겹쳤다. 여든한 살이던 시어머니가 척추 뼈가 부서지는 낙상을 당한 것. 시인이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해 마흔에 석사 학위를 따고 막 대학강사 자리를 얻은 때였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대들었다. 나를 놀리시는 겁니까. 당신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짐 진 자는 나에게 오라,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185쪽) 시모는 꼬박 9년을 자리보전하다가 91년 세상을 떴다.
2000년 남편마저 떠나보낸 시인을 병마가 급습했다. 2005년 유방암 선고를 받은 날의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전한다. "병원은 2층이었는데 나는 그 한 층의 계단을 내려오는 데 20분쯤 걸렸다. 두 다리가 떨려서 도저히 내려올 수가 없어."(247쪽)
3일 오전 인터뷰를 약속한 서울 강남구 한 커피숍에 신씨는 조금 늦게 나왔다. 전날밤 막내딸(33)과 출간 자축 겸 와인을 마시며 나눈 남편에 대한 추억담이 그만 새벽3시까지 길어졌다고. 그는 이번 책 원고가 남편 타계 이듬해인 2001년에 이미 써둔 것이라 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줄기였던 남편과의 세월을 잊어버릴까 싶어 황급히 기록해뒀다.
출판사의 출판 제안을 받고 수락할 때까지 정말이지 수백 번은 결정을 번복했다." 유명 작가에 대한 엿보기 심리가 그토록 부담스러웠음에도 고통의 기록을 세상에 내놓기로 한 이유를 신씨는 "나처럼 환자 가족을 둔 보호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싶었다"고 말했다.
시인은 불행한 시절을 견뎌낸 힘으로 종교와 문학을 들었다. 책에서 밝혔듯 그는 부군의 투병 6개월째 되던 날 영세를 받았다. 시인은 "피폐한 삶을 차마 사람들 앞에 보일 수가 없었다"며 "새벽 한두 시에 성당 성모님 앞을 찾아가 많이도 울고 투정했다"고 회고했다. 그 투정 중엔 "저 이렇게 살면 시는 잘 쓰게 해줄 겁니까"란 것도 있었다.
"지금 겪고 있는 삶의 고통들이 언젠가 내 문학을 살찌우는 영양제 노릇을 할 것이란 꿈이 나를 견디게 했다"는 시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만남-헤어짐, 생성-소멸 등 실존적 문제를 천착해온 그의 시적 주제와 그것을 담아낸 격정적 시어의 원천을, 독자는 이번 산문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 죽거든 결혼하지 마"(237쪽)라는 유언을 남기고 시인의 남편은 부인과 세 딸, 손자들이 임종하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시인은 남편이 참 복되게 떠났다고, 자신도 지나고 보니 고통스러웠던 일보단 잘 견뎌낸 일만 남더라고 했다. 이를 '가족의 힘'이라 했다.
"아이들만 데리고, 혹은 아이들마저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고통스럽더라도 가족과 함께 하는 것만큼 더 좋은 건 없다는 걸 알겠더라고."
신달자
1943. 12. 25 경남 거창~. 시인.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택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1997년부터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했다. 1964년 〈여상〉을 통해 시 〈환상의 밤〉으로 여류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뒤,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발〉, 〈처음 목소리〉가 추천되면서 재등단했다.
신달자의 시는 평이한 어법으로 일상사의 이야기를 하거나 대상을 관찰하고 있지만, 결코 평이한 시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삶의 본질에 대한 순간적 깨달음을 시인 특유의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작품으로 시집 〈봉헌문자〉·〈겨울축제〉·〈아가〉·〈황홀한 슬픔의 나라〉·〈백치슬픔〉·〈아버지의 빛〉·〈열애〉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백치애인〉·〈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와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이 있다.
1989년 대한민국문학상, 2001년 시와 시학상, 2004년 한국시인협회상, 2007년 현대불교문학상, 2008년 영랑시문학상, 2009년 공초문학상을 수상했다.
시련에 굴하지 않은 신달자
케이블 경제 전문 채널 비즈니스앤은 2011년 4월 6일 밤 10시 50분 토크쇼 프로그램 '역전의 명수'에 신달자 시인을 초대한다. 이 프로그램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명사들의 이야기를 담아왔다. 방송인 송지헌이 진행을 맡고 있다.
대학 졸업 때까지 풍족하게 살아왔던 신달자 시인은 15세 연상의 남편과 결혼한 뒤 큰 생활의 변화를 겪게 된다. 대학교수였던 남편은 결혼 9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신씨는 팔순의 시어머니를 보살피고 어린 세 딸을 키우며 남편 병간호까지 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버텨내면서 나이 마흔에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수가 된 뒤에는 수필집 '백치애인',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의 베스트셀러를 잇따라 펴내면서 경제적 여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째 되던 해 이번에는 자신이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세 딸에게 유서를 남기고 수술대에 올랐지만 병을 완치하고 다시 건강하게 살고 있다. 제작진은 "갖가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신달자 시인은 언제나 씩씩하게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줬다"고 했다. 이 프로그램은 비즈니스앤과 교통방송 tbs TV가 공동제작했으며 tbs TV를 통해서는 7일 오전 11시 방송된다.
[세상읽기] 딸 이야기 2012.03.21
아기 하나가 태어났다. 여자 아기였다. 산파가 울기 시작했다. 아기 엄마는 아기가 죽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딸도 많으면 재산이지… 하는 산파 소리를 듣고 막 탯줄을 자르고 누인 아기를 발로 냅다 찼다. 산파가 겨우 아기를 달랬다. 성난 엄마는 미역국을 먹지 않았다. 둘 다 죽자는 것이었다. 어른들이 사지를 묶고 입을 벌려 겨우 물이 넘어가게 해서 아기도 엄마도 겨우 죽음을 면했다.
1943년 일이었다. 이 아기야말로 아들이어야 한다고 아기 엄마는 신전에 돈도 바쳤다. 그만큼 기대도 했던 터였다. 15세에 장손집 며느리로 시집와 시할머니한테서 아들 셋만 낳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는 일곱째 딸이었다. 아기 엄마와 아빠는 위로 두 딸이 죽었으므로 이 아기도 죽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바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 아기는 사월 초파일 부처님 생신 때 태어났고 태어난 시도 사시여서 부처님과 같은 생시를 가지고 있었다.
양력으로는 5월 11일이었다. 아기 엄마와 아빠는 이 아기 출생신고를 12월까지 미루었지만 죽을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12월이 되자 읍사무소에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출생신고를 권고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런 일이 허다했다는 이야기다.
아기 아빠는 하는 수 없이 출생신고를 하러 갔다. 그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뭐냐고 묻는 직원에게 아기 아빠가 말했다.
"성은 신(愼)씨고 끝자는 자(子)이니 가운데 자만 지으면 되겠구먼…. 출생신고가 늦어 미안하니 모든 것을 잘하게 통달할 달(達)로 해 주시오."
그때만 해도 딸 이름 끝 자는 다 자(子)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기는 아무 죄도 없이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살아 있어도 없는 존재로 7개월을 보냈고 겨우 이름을 얻었다. `신달자`였다. 출생신고를 한 날이 12월 25일이었다. 호적에는 12월 25일로 되어 있다. 두 성인 생일을 가졌다. 운명이었다.
그 이후에는 아기 엄마는 딸을 하나 더 낳아 여섯 딸을 키웠고 한이 많았다. 아기 엄마는 아들을 많이 낳은 동서가 인생에 성공했다고 믿었다. 그렇게 겨우 이름을 얻고 존재가치를 얻은 그 아기는 잘 자라 결혼해서 딸 셋을 낳았다. 아기 엄마는 그 딸은 불행하다고 단정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딸을 낳았을 때 엄마는 슬프게 울었다. 나도 울었다. 1975년 내가 셋째딸을 낳았을 때도 나는 시어머니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었다. 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축하가 아니라 위로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앞으로 200년은 아들 선호 사상이 판을 칠 것이라고 나는 단정했다.
나는 딸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서야 한다고, 그렇게 설 수 있기를 마음으로 벼렸다. 얼마나 세상의 변화가 빠른지 딸 가진 사람이 비행기를 탄다는 말이 나온 것도 오래되었다. 아들 셋은 `목매달`이라는 말도 나는 아주 고소하기 짝이 없다. 우리 시어머니가 이런 세상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셋째딸을 낳고 기가 죽은 그날부터 40년도 안 돼 딸 위세가 달라졌다.
교육이 달라졌고 여성이 가진 본성의 위력이 유감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오히려 자칫 모계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게 아내에게 의탁하는 남자도 많아졌다. 아침밥을 스스로 해 먹거나 굶는 남자도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여자 세상이란 말도 충격이 아니다.
아들뿐인 내 딸은 여친 핸드백을 들어 주는 남자들을 보면 얼굴을 찡그린다. 남자에게 핸드백을 내어 민다고 남성 위주가 밀려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여자 세상이 아니라, 남자 세상이 아니라 모두의 세상을 가꾸어 가는 세상이라고 하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고 현실에 따라 서로 나누는 삶의 질이 같고 서로 존중하는 사회가 되는 그런 세상.
[신달자 시인]
출처 : 사주명리 - cafe.daum.net/sajusaj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