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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7.15. 여걸 추근 처형

Mr.대산 | 2017-10-10 16: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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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15일 여걸 추근 처형
 



어느 나라 어느 역사에든 ‘여자의 몸으로 남자도 못한 일을 해낸’ 영웅들이 존재한다. 잔다르크가 그렇고 ‘유관순 누나’도 그러하며 중국 한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를 물리친 베트남의 쯩 자매도 유명하다. 1907년 7월 15일 새벽, 아직은 망하지 않았던 청나라의 한 도시 소흥에서는 여걸이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은 한 여자가 처형당했다. 그 이름은 추근이라고 한...다.

그녀는 태어난 곳은 중국 남쪽의 하문이었고, 그녀가 자란 곳은 서양인들이 활개를 치는 곳이었는데, 그녀는 서양인들이 부리는 횡포를 눈으로 보았고 심지어 그곳 관리였던 할아버지가 모욕을 당하는 것도 지켜보면서 컸다. 추근은 재능이 많았다. 교양이 높은 어머니는 그녀에게 글과 시를 가르쳤고 추근은 열한살 때 벌써 시를 짓고 두보 시선을 끼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고 연약한 문학소녀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무술과 말타기에도 발군의 실력을 드러낸 별종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느 집안의 딸들처럼 나이 스물 하나에 추근은 시집을 가지만 부호의 아들이었던 남편은 아내의 그릇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간장 종지였다. 세월이 흘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슬하에 두지만 둘의 금슬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잘난 마누라 둔 못난 남편만큼 까탈스러운 생명체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 역사에 봐도 허난설헌은 그 재능 때문에 되레 팔자가 사납지 않았던가. 이 가족의 명운은 베이징으로 이사를 가면서 깨진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로부터 여성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듣게 된 추근은 한 남편의 아내와 아이들의 어머니로서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여성으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과감하게 선택한다.

“지금까지의 나는 말과 소와 다를 바가 없었어요. 이제 새삶을 살아야겠어요. 우선 공부를 해야겠어요.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어요.”

어머니가 전족을 하려고 헝겊으로 발을 싸매면 밤마다 그를 풀어헤치던 추근의 고집은 여지없이 발휘됐다. 남편은 말려도 보고 아이들을 핑계로 설득도 해 봤고 일체의 경제적 지원은 없다고 엄포도 놨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자기 패물을 팔아 여비를 마련한 추근이 일본으로 훌쩍 떠난 것이다. 이때 추근은 쿠울리, 즉 남자 노동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선실에 끼어 일본으로 떠났고 그때 칼을 품고 자신을 지켰다고 한다.

해와 달이 빛이 없으니 천지가 어두운데
캄캄한 여성 세계 누가 구하리
바다 건너 일본에 유학하려 장식품 팔고
골육과 헤어져 옥문관을 나섰다네.
전족을 없애 천년의 해독을 씻고
힘모아 백만 여성을 일깨우고자 하니
예쁜 손수건 하나 반은 핏물 반은 눈물이라네.
공부는 물론 혁명의 꿈을 키우며 사격과 폭탄 제조까지 배우던 그녀는 당시 중국 여성을 옥죄던 대표적인 풍습 중의 하나인 전족 폐지를 외치는 단체를 조직한다. 그것이 ‘천족회(天足會)’다. 천족이란 아예 전족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녀평등과 봉건 유습 타파, 여성의 교육 등을 소리 높여 외쳤다. 이즈음 청나라 출신의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반정부 기운이 강했고 이에 신경을 곤두세운 청나라 정부의 압력으로 일본이 유학생들의 행동 반경을 좁히려들자 유학생 사회는 반으로 나뉘었다. 부당한 조처를 거부하고 당장 귀국하자는 쪽과 일단 공부는 마치자는 쪽. 추근은 귀국파였는데 잔류를 주장하던 유학생 소도남에게 이런 욕설을 퍼붓는다. “이 죽일 놈!”

“남자로서 광복을 (청나라의 멸망) 위해 죽은 사람은 있으나 그런 여성이 없는 것은 여성계의 수치”라고 주장했던 그녀는 귀국 후 철저한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손문이 조직한 광복회의 절강 지부에서 일했고, 서석린 등과 함께 안휘, 절강성에서의 혁명군의 봉기를 조직하려 한다. 하지만 봉기 계획이 누설되면서 서석린은 안휘성의 순무, 즉 성의 최고 관리를 암살하지만 체포, 처형된다. 한 성의 최고위 관리가 혁명가들의 손에 죽자 관헌들은 눈에 불을 켜고 동조자를 찾았고, 이때 한 관리가 그녀를 고발한다. 그 관리의 이름은 바로 소도남. 일본에서 추근에게 장히 욕을 얻어먹었던 그 유학생이었다.

그녀는 1907년 7월 15일 가을비 가을 바람 애간장을 태우는구나 (秋風秋雨愁熬人)이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참수된다. 그녀는 죽기 전 옷을 벗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그 부탁은 수용되었다고 한다. 구습을 타파하고 봉건 정부를 타도하고자 했던 여걸 추근은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은 그녀의 딸을 통해 입증된다. 중화민국 정부 설립 후 혁명열사에 대한 보상금이 지급되는데 추근의 딸은 그 보상금을 기반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항공술을 익혀 ‘동방의 여기장’ 중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산하의 썸데이서울 - nasanha.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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