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간의 생왕묘절(生旺墓絶)을 논함
구서(舊書)에서는 ‘십간(十干)은 각각의 지지(地支)를 좇아서 장생(長生), 목욕(沐浴), 관대(冠帶), 임관(臨官), 제왕(帝旺), 쇠(衰), 병(病), 사(死), 묘(墓), 절(絶), 태(胎), 양(養)으로 나아가는데, 십이위(十二位)에 양생음사(陽生陰死)하고 음사양생(陰死陽生)하는 차이가 있다’라고 한다.
대저 오양(五陽)은 생방(生方)에서 자라고, 본방(本方)에서 왕성하며, 설방(洩方)에서 쇠하고, 극방(剋方)에서 다하니 이치에 있어서 순리에 맞으나,
만약 오음(五陰)이면 설방(洩方)에서 생(生)하고 생방(生方)에서 사(死)한다고 하여 이치가 통하지 않으니 잘못된 학설이다.
자오지지(子午之地)에는 金을 생하거나 木을 생하는 이치가 끝내는 없고, 인해지지(寅亥之地)에는 火를 멸하거나 水를 멸하는 이치가 끝내는 없다.
갖가지의 구서(舊書)는 명격(命格)에 있어서,
丁火가 酉를 만나면 재(財)로 논하고, 乙木이 午를 만나거나, 己土가 酉를 만나거나, 辛金이 子를 만나거나, 癸水가 卯를 만나면 식신(食神)으로 논하되, 모두 생(生)으로 논하지 않았다.
乙木이 亥를 만나거나, 丁火가 寅을 만나거나, 癸水가 申을 만나면 정인(正印)으로 논하고, 己土가 寅중의 丙火를 만나거나, 辛金이 巳중의 戊土를 만나면 또한 정인(正印)으로 논하되, 모두 사(死)로 논하지 않았다.
그 묘(墓)를 논한다면,
木은 반드시 未가 묘(墓)이고 火는 반드시 戌이 묘(墓)이며 金은 반드시 丑이 묘(墓)이고 水土는 반드시 辰이 묘(墓)이며,
戌이 乙木의 묘(墓)이고 丑이 丁火와 己土의 묘(墓)이며 辰이 辛金의 묘(墓)이고 未가 癸水의 묘(墓)라는 것은 아직까지 없으니, 음양(陰陽)은 동생동사(同生同死)한다는 것이 옳다.
광록(廣錄)에서 말한 것을 고찰하여보면,
‘甲乙이라는 하나의 木은 음양(陰陽)으로 나뉘는데, 사목(死木)과 활목(活木)이라는 두 가지로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하나의 木이고 동생동사(同生同死)하니 고로 고인(古人)에게는 단지 사장생(四長生)만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이 학설은 가히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 중의 이름이나 의의(意義)에 있어서도 또한 통하지 않은 점이 많다.
가령 장생(長生)이후에 이어진 목욕(沐浴)을 ‘패지(敗地)’라고 말하는데,
‘영아(嬰兒)가 처음 태어나면 목욕하는데 기(氣)가 약하여 감당할 수 없으니 패지(敗地)이다’라고 하나, 목욕은 작은 일이니 생왕(生旺)에 나열하기에는 부족하고, 또한 목욕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무너지는 경우는 세상에 없다.
가령 음욕지살(淫慾之殺)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찌 나체로 목욕하는 것은 모두 음란함을 드러낸 것인가?
하물며 생(生)에서 왕(旺)으로 나아가는 것은 한결같이 발영(發榮)하고 자라나는 것이다. 바야흐로 생하였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패지(敗地)인가? 이미 패지(敗地)이면 어찌하여 다시 왕(旺)할 수 있는가?
관대(冠帶)는 비록 성인이 된다는 의미라고 할지라도 또한 법도에 맞지 않고, 임관(臨官)에서의 관(官)과 제왕(帝旺)에서의 제(帝)는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마땅히 그 이름을 바로잡아서 ‘생(生), 장(長), 성(成), 성(盛), 왕(旺), 쇠(衰), 병(病), 사(死), 묘(墓), 절(絶), 태(胎), 양(養)’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순리에 맞다.
土의 생(生)왕(旺)묘(墓)는 寅을 좇아 일어난 경우가 있고, 申을 좇아 일어난 경우가 있다.
土의 위치는 중앙인데 팔방(八方)에 이어지고 사계(四季)에서 왕하니, 원래 사행(四行)과 예(例)가 같을 필요는 없다.
반드시 부득이하다면 寅을 좇는 것이 이치에 가까운데,
申酉는 모두 내가 생하는 것으로 이미 나를 설기(洩氣)하니 생(生)장(長)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亥子는 모두 내가 극하는 것으로 또한 나의 힘이 소비되니 성(盛)왕(旺)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만약 ‘水와 土는 일가지기(一家之氣)이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극하는 것은 오히려 일가(一家)인데, 나를 생하는 火와 내가 생하는 金은 어찌하여 일가(一家)가 아닌가?
만약 寅을 좇아 일어난다면, 어머니가 태어나면 함께 태어나고 어머니가 죽으면 함께 죽으니 그 이치가 조금 낫다.
그러나 생(生)하는 寅에서 왕(旺)인 午까지는 가히 어머니를 좇을 수 있으나, 未와 戌과 丑은 모두 본기(本氣)이니 쇠(衰)묘(墓)양(養)으로 나누기 어렵다.
土를 논하는 법은 다만 ‘巳午가 생(生)이고, 寅卯가 극(剋)이며, 申酉가 설(洩)이고, 亥子가 재(財)이며, 사계(四季)가 왕(旺)이다’라고 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인데,
무슨 필요가 있어서 십이위(十二位)에 얽매일 것인가?
혹자(或者)는 ‘임관(臨官)은 즉 녹(祿)이고 제왕(帝旺)은 즉 인(刃)인데, 녹인(祿刃)을 양순음역(陽順陰逆)*으로 취하니 생사(生死)도 또한 응당 양순음역(陽順陰逆)으로 취하여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크게 그렇지 않다.
*양순음역(陽順陰逆): 양(陽)은 순행(順行)하고 음(陰)은 역행(逆行)함.
쇠(衰)병(病)관(官)왕(旺)이라는 것은 십간(十干)이 십이지(十二支)를 지나감에 있어서 성쇠(盛衰)의 순서인데,
실시(失時)하고 퇴기(退氣)한 것이 쇠(衰)와 병(病)이고, 당시(當時)하고 득기(得氣)한 것이 관(官)과 왕(旺)이다.
녹인(祿刃)이라는 것은 십간(十干)이 십이지(十二支)를 만나면서의 취용지법(取用之法)인데,
다른 종류는 생극(生剋)이 있으니 재관(財官)이라고 취하였으나, 같은 종류는 생극(生剋)이 없으니 녹인(祿刃)이라고 취한 것이다.
분명하게 서로 의의가 다른데, 어찌 핑계를 받아들일 것인가?
천리(千里)가 살펴보건대,
진소암(陳素庵)선생은 녹인(祿刃)을 논하면서 ‘乙丁己辛癸의 양인(陽刃)은 응당 寅申巳亥에 있다’라고 힘을 다하여 말하였는데,
그 유일한 이유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단지 녹전일위(祿前一位)가 양인(陽刃)이라고만 알고, 양(陽)은 앞이 전(前)이고 음(陰)은 뒤가 전(前)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확실히 진지(眞知)하고 명철한 견해인데, 전인(前人)들이 발견하지 못한 바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고찰하여 보면,
양(陽)은 앞이 전(前)이고 음(陰)은 뒤가 전(前)이라는 것은 즉 양(陽)은 순행(順行)하고 음(陰)은 역행(逆行)한다는 뜻이다.
음양(陰陽)의 순역(順逆)이 이미 나뉘었으면 생사(生死)도 또한 자연히 각각 다른데,
이 편(篇)에서는 다시 ‘간지(干支)의 음양(陰陽)은 동생동사(同生同死)한다’라고 말하였으니 서로 모순되는 것 같다.
녹(祿)인(祿刃)과 임관(臨官)제왕(帝旺)이라고 말하는 것은 확연히 의의가 서로 다르니 역시 사리(事理)에 맞은 이론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간지(干支)의 음양생사지설(陰陽生死之說)은 산음(山陰) 심효첨(沈孝瞻)선생이 논한 바가 가장 정밀하고 마땅하니, 특별히 아래에 기록하여 참고를 돕는다.
『천간(天干)은 동적(動的)이니 쉬지 않고 움직이고, 지지(地支)는 정적(靜的)이니 일정함이 있는데, 각각의 천간이 십이지월(十二支月)을 유행(流行)하면서 생왕묘절(生旺墓絶)의 관계가 맺어진다.
양(陽)은 모이는 것을 주관하는데 나아가는 것이 진(進)이니 고로 순행(順行)하고, 음(陰)은 흩어지는 것을 주관하는데 물러나는 것이 진(進)이니 고로 역행(逆行)한다.
장생(長生)목욕(沐浴)등은 이에 양(陽)은 순행(順行)하고 음(陰)은 역행(逆行)한다는 차이가 있다.
사시(四時)의 운행(運行)에 있어서 공을 이룬 것은 물러가고 작용을 기다리는 것은 나아가니, 고로 각각의 천간이 십이지월(十二支月)을 유행하면서 생왕묘절(生旺墓絶)에 또한 일정함이 있다.
양(陽)이 생(生)하는 곳은 즉 음(陰)이 사(死)하는 곳인데, 피차간에 호환(互換)하는 것이 자연의 운행이다.
즉 甲乙로 논하면,
甲은 木의 양(陽)인데, 하늘의 생기(生氣)가 만목(萬木)에 유행(流行)하는 것이니 고로 亥에서 생(生)하고 午에서 사(死)한다.
乙은 木의 음(陰)인데, 木의 지지엽엽(枝枝葉葉)이 하늘의 생기(生氣)를 받아들인 것이니 고로 午에서 생(生)하고 亥에서 사(死)한다.
木이 亥月을 맞이하면 지엽(枝葉)이 벗겨져서 떨어지나, 안의 생기(生氣)가 이미 풍족하게 수장(收藏)되었으니 다음해의 봄에 발설(發洩)하는 기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亥에서 생한다.
木이 午月을 맞이하면 지엽(枝葉)이 번성하는 계절인데, 甲木이 어찌하여 사(死)하는가?
부지(不知)로되, 밖으로는 비록 번성한다고 할지라도 안으로는 생기(生氣)가 이미 다 발설(發洩)되었으니 이에 午에서 죽는다.
乙木은 이와 반대이다.
午月에 지엽(枝葉)이 번성하는 것이 즉 생(生)이고, 亥月에 지엽(枝葉)이 벗겨져서 떨어지는 것이 즉 사(死)인데, 질(質)로 논하는 것은 원래 기(氣)와 다르기 때문이다.
甲乙로 예를 삼았는데, 나머지는 가히 알 수 있다.
지지에는 십이월(十二月)이 있으니, 고로 매간(每干)은 장생(長生)에서 태양(胎養)까지 또한 십이위(十二位)로 나뉜다.
기(氣)가 왕성함을 거쳐 쇠약해지고 쇠약함을 거쳐 다시 왕성해지는 것은 절기(節氣)를 따라 세분하면 열 두개가 되는데, 장생(長生)목욕(沐浴)등의 명칭은 임시로 빌린 형용사이다.
장생(長生)이라는 것은 마치 사람이 처음 태어나는 것과 같고,
목욕(沐浴)이라는 것은 마치 사람이 태어난 이후에 목욕하여 때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데, 가령 나무의 핵(核)이 이미 싹이 되었으면 전의 푸른 껍질이 씻겨져 제거되는 것과 같다.
관대(冠帶)라는 것은 형기(形氣)가 점차 자라는 것인데, 마치 사람의 나이가 더해져 관대(冠帶)하는 것과 같고,
임관(臨官)이라는 것은 자라나 건장한 것인데, 마치 사람이 가히 출사(出仕)하는 것과 같으며,
제왕(帝旺)이라는 것은 장성(壯盛)이 극에 다다른 것인데, 마치 사람이 제왕(帝王)을 보좌하여 크게 일을 하는 것과 같고,
쇠(衰)라는 것은 왕성함이 극에 이른 후에 쇠퇴하는 것인데, 물질이 처음으로 변한 것이다.
병(病)이라는 것은 쇠(衰)가 심해진 것이고,
사(死)라는 것은 기(氣)가 다하여 남김이 없는 것이며,
묘(墓)라는 것은 조화(造化)의 수장(收藏)인데, 사람이 땅에 묻히는 것과 같고,
절(絶)이라는 것은 전(前)의 기(氣)가 끊어진 이후에 기(氣)가 장차 이어지는 것이며,
태(胎)라는 것은 후(後)의 기(氣)가 이어지면서 응결(凝結)하여 태(胎)를 이루는 것이고,
양(養)이라는 것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로부터 다시 장생(長生)하여 순환이 끝이 없다.
사람의 일주는 태어나면서 녹왕(祿旺)을 만날 필요는 없다.
설령 월령이 휴수(休囚)하다고 할지라도 년일시(年日時)중에 장생(長生)이나 녹왕(祿旺)을 만났으면 곧 약(弱)하지 않고,
가령 고장(庫藏)을 만났다고 할지라도 또한 뿌리가 있는 것이다.
속설(俗說)에서 ‘고장(庫藏)에 임하였으면 반드시 충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속서(俗書)의 잘못이다.
다만 양(陽)이 장생(長生)을 얻었으면 유력(有力)하나, 음(陰)이 장생(長生)을 얻었으면 매우 유력(有力)한 것은 아닌데 그러나 또한 약하지는 않다.
만약 고장(庫藏)을 만났으면 양(陽)은 유근(有根)이나 음(陰)은 무용(無用)인데, 양(陽)은 크고 음(陰)은 작으니 양(陽)은 음(陰)을 겸할 수 있으나 음(陰)은 양(陽)을 겸할 수 없는 것이 자연(自然)의 이치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