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그 이름도 혁혁한 청산리 싸움의 주역의 한 분인 이범석[李範奭, 1900.10.20~1972.5.11] 장군의 명조이다
戊 戊 戊 庚
午 午 子 子
銜字(함자)物象(물상)은 柳絲靜而風不息(유사정이풍불식) 이라 = 버들가지는 가늘어선 고요한 듯 하여도 바람이 늘상 불어선 흔들어 재킨다는 그런 의미로서 평생을 그렇게 풍운을 타는 풍운아라는 것이리라 가는 버들 가지와 바람과 그 꾀꼬리와 이렇게 배합이 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 버들과 바람을 배합으로 놓았다할 것이다 後園(후원)楊柳(양유)가 無風, 動(무풍동)은 그 黃鳥(황조) 鸚鵑(앵견)이 飛去後(비거후)라고 그렇게 바람처럼 가지를 흔드는 것은 黃鳥(황조) 鸚鵑(앵견)이라고 할수 있는바 여기서 그 바람은 꾀꼬리 로 비유되는 말일 것인데 새가 바람 속에 들어가선 버러지를 잡아 먹는 象(상)이 곧 봉황 鳳字(봉자) 鳳(봉)이라 所以(소이) 그렇게 이분은 그 시대의 鳳(봉)이라 할 것이다
漢字(한자)物象(물상)은 綠水因風雛面(록수인풍추면)이요 靑山爲雪白頭(청산위설백두)로 諸般股肱(제반고굉)盡是天(진시천) 일진데 就世誰强求(취세수강구)이냐 = 이렇게 말을하고 있다 록수는 바람으로 인하여선 그 수면이 푸르고 푸른 산은 눈으로 인하여선 머리가 희어진다 모든 원리가 다 하늘의타고 난 운명이요 흐름일진데 뭣 하러 세상에 나아가선 강제로 취득하려하느냐 소이 모든 것은 원인이 생겨선 발단 되는 것인데 억지로 한다하여선 될 것이냐 그 시세 흐름에 그냥 맡겨두는 것이 어떠하다 더냐 하는 식의 懷誘(회유)하는 말 같기도 함에 이분의 그 강직한 성품을 알만하다 할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암흑의 무더운 여름이 길어선 장마비가 넘쳐선 골짜기를 메운다하여선 어찌 바지를 걷는 행동을 하지 않을 소냐 이다 다
소이 나는 이러한 도탄의 세상에 민중이 신음하는 것을 그냥 좌시 할수만은 없다는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선 팔 거둬 붙치고 독립 항쟁에 나섰다는 것이리라
詩(시)에 말하기를 아직 무더운 여름이라 그 박 잎이 쓰거늘 그 물에 잘 뜰수 있는 박이 아직 덜 여물었거늘 [물에 뜰수 있는 박이 다 여물으면 아무리 물이 깊더라도 그 표주박을 타고건너 간다는 것이리라 그러니깐 아직 편안하게 물을 건너갈 般若(반야)船(선) 배가 준비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 임] 물이 얕았을 적에야 만이 그 바지 걷는 것을 그 물이 알아 줘선 옷을 적시지 않을 내기이지만 그 지금 상황이 그 물이 깊은 여름 장마 시절인데 옷을 좀 걷는다고 해선 그 바지 가랭을 그 물이 적시지 않을 소냐이다
그만큼 그 無道[무도]한 흐름이 장마물 처럼 넘쳐날 적에는 그 같이 同化(동화)되는 것이 좋지 혼자만 독판 잘난 체 그 바지 가랭이 걷는다고 해선 그 장마물이 그 바지 가랭이를 적시지 않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니 괜이 부질없는 일을 왜 하느냐 하는 조소 반 비아냥 거리는 말을 衆人(중인)들은 하게 된다는 것이리라 소이 잘 알아 주지도 않는 길을 뭐하러 세상에 억지로 펼려 드느냐 이런 내용인데 그렇다고 聖賢(성현)이 그 세상이 악의 구렁텅이 속에서 헉덕이는 것을 그냥 방관 좌시할 수가 있겠느냐 이다 다
내 그 설사 옷을 걷은 것 그 알아주는 자 없어 그 바지를 적시더라도 나는 그 汚濁(오탁)한 세상의 呻吟(신음)함을 잊지 못해 하리라 하 여선 그 바지를 걷으련다 하는 그런 의미의 말에서 오는 윗 구절을 따온 것이다
世人(세인)이 설사 다 매국너 되고 그 앞잡이 된다 할 지라도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선 독립항쟁을 계속 밀어 붙 칠 것이다 이런 의미인 것이다 올곧은 일을 하다간 설사 그 일을 성사 시키지 못하고 소멸된다 하여도 靑史(청사)에 기리 기리 그 기억해 줄 것이라는 것이리라 이런 가르침을 그 譬喩(비유)辭(사)로 지금 말하고 있는데,
그 함자 '李(이)範(범)奭(석)'이라 하는 의미가 그렇게 강직하고 올 곧은 일을 행하여 나가게끔 작용을 한다는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이리라
大定(대정)易象(역상)은 地山謙卦(지산겸괘) 四爻(사효) 여기서는 將帥(장수)라는 의미이다 所以(소이) 二人者(이인자)
* 그 남이 볼 적에 主爻(주효)가 豫卦(예괘) 四爻(사효)가 될 터 五爻(오효)恒不死(항불사)하는 병든 임금님을 모시고 계시는 그 아래 강한 힘을 가진 보필 자 所以(소이) 말하자면 당시 우리나라 형세가 그 병든 임금님과 같지만 돌아가시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인데 그런 형세를 돕고 보필하는 강한 臣下(신하) 역할 하는 그런 位相(위상)이 卦主(괘주)라는 것으로서 독립항쟁을 하시는 모든 전체 분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 모두들 그 地位(지위)를 향하여선 의심 내지 않고선 모여 들 것이라는 그런 아주 모든 머릿결을 휘감아 꼽을수 있는 비녀 채와 같은 그런 역할을 하는 位相(위상)이라는 것이리라
그런 배경이나 밀어주는 힘을 받아선 움직이는 장수가 바로 이분 역할인 것이다
그 당시 세상에서 그런 것 豫卦(예괘) 四爻(사효)것을 要求(요구)하는 것인데 이분은 그 豫(예) 三爻(삼효)가 된다는 것으로서 그 받쳐주는 역할 홀겨 보고 째려보는 豫備(예비) 作用(작용)을 하는 그런 위상이라는 것이리라 그 저돌적으로 나아가는 코불소 같은 역량을 지닌 그런 位相(위상)이라는 것이리라 그 젊은 청춘 血氣(혈기)方强(방강)한 그런 覇氣(패기)를 갖은 것을 말하고 그 將帥(장수)를 받쳐주는 속 상 이라는 것이다 그 豫卦(예괘) 四爻(사효)는 = 김좌진 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謙卦(겸괘) 四爻(사효) 손을 내어 저을 정도로 辭讓(사양) 더는 받아 들릴 수 없을 정도로 겸손한 모습을 그리는 지라 내가 감히 감당하지도 못하겠으니 더는 이상 그 풍선에 바람을 넣듯이 팽창 시켜 주지 말아라 하는 그런 位相(위상)으로서 여럿의 강한 젊은 기운의 불어 넣어주는 협조를 받아서는 그 강한 심볼을 드러 내어선 그 推戴(추대)되어선 그 陰陽(음양)의 진한 맛을 보는 그런 位相(위상)이 된다는 것이리라 所以(소이) 將帥(장수)라는 것이다
남자의 鍊匠(연장)이 그 평상시에는 그 늙은 할아범 살피듬 이지만 그 陰門(음문)이 현란하게 유혹 할 적에는 그렇게 속 안쪽의 三爻(삼효) 靑春(청춘) 壯丁(장정) 强盛(강성)한 血流(혈류)들의 힘을 받아선 뻘떡 일어나선 자기 역할 한다는 것으로서 世上(세상)이 도탄에 빠진 것을 所以(소이) 왜넘 壓制(압제)를 그 陰門(음문)이 陽氣(양기)가 일어나라고 誘惑(유혹) 眩惑(현혹)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리라 그렇게 해선 거기 대상으로 맞춰보려고 크게 떨쳐 일어난다는 그런 의미이다
小過(소과)로 변하면 坎象(감상)이 늘어난 상황인지라 이래도 저래도 役割(역할)분담이 遁甲(둔갑)질 되는 모습인지라 四爻(사효)나 三爻(삼효)의 그 작용이 그렇게 때로는 힘을 밀어주는 젊은 血流(혈류)가 되고 그 진한 陰陽(음양)의 맛을 보는 그런 겉 살피듬 역할도 한다할 것이다
本命(본명)物象(물상)은 浮生若夢不用妄貪(부생약몽불용망탐) 封是長樂能忍自安(봉시장락능인자안) 이라 하니 부평초 같은 인생 꿈결 같이 지나가니 망녕되게 탐욕을 부리지 않아선 바른 원리를 북돋아선 도도한 樂(락)을 장구하게 하니 어렵더라도 잘 참아 견이어선 스스로 편안함을 享有(향유)함이로다하고 있음에 어려운 일을 잘 참고 견디어선 끝내는 安裕(안유)함으로 되어진다는 그런 내용이리라
庚字(경자) 金(김)佐(좌)鎭(진) 將軍(장군)을 필두로 그 隸下(예하) 소속된 將帥(장수)라는 것이다
戊 戊 戊 庚
午 午 子 子
庚字(경자) 大將(대장)이 휘하 將卒(장졸)을 거느린 모습이다
그 휘하 장수 한분 으로 참여 했다는 의미이다 庚字(경자) 대장은 금좌진[김좌진,金佐鎭] 장군을 말한다 , 金氣(금기) 銳氣(예기)는 날카롭다는 뜻이니 刀劍(도검) 武(무)를 상징한다
戊子(무자)는 어머니[母(모)]란 의미이다 戊午(무오)는 成(성)字(자)란 의미이다
武班(무반)의 어머니로 성공하였다는 뜻이다 , 아버지는 그렇다면, 김좌진이란 의미이다
여기서도 金斗漢(김두한)의 이야기 출생까지 말하여 주고 있다
김두한이는 김좌진[庚字(경자)]장군의 아들[子(자)]로서 그 어머니를 여러분 둔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두한이 사주를 참고적으로 가져오면
己 辛 戊 戊
丑 丑 午 午
이다
그러니깐 김두한 아버지 휘하장수도 김두한이의 어머니 격수가 된다는 것이리라 김좌진 장군의 아들 適合(적합)이라고 그 丑(축)丑(축)을 깔고 있고 이범석 장군의 兩(양) 戊午(무오)대가 여기 년월대로 되어진 모습이다
소이 김좌진 장군은 아직 좀 무딘 金(금)이고 그 김두한이 한테 와서 그 제련된 金氣(금기)라고 辛金(신금)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이범석 [李範奭, 1900.10.20~1972.5.11]
요약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정치가.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9)
주요저서 《우등불》
1900년 10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중국으로 망명, 1919년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中國陸軍講武學校) 기병과(騎兵科)를 졸업하고 둥베이[東北:만주]로 진출하였다. 1920년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22년 소련합동민족군 연해주지구 지휘관으로 소련 혁명전(革命戰)에 참가하였고, 1933년 중국 뤄양[洛陽]군관학교 한인장교대장,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관, 1940년 중국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지냈다. 1941년 한국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고, 1945년 광복군 중장으로 8월 귀국하였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창설하였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국방장관을 겸임하였다.
1950년 주중(駐中)대사, 1952년 자유당 부(副)당수 및 내무장관 등을 지냈으며, 그 해 8월과 1956년 2차례 부통령(副統領)에 입후보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1960년 충청남도에서 자유연맹(自由聯盟) 소속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저서로 회고록 《우등불》이 있다. 196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김좌진 [金佐鎭, 1889.11.14~1929.12.25]
요약
한국의 독립운동가.
본관 안동(安東)
호 백야(白冶)
별칭 자 명여(明汝)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충남 홍성(洪城)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 김좌진장군생가지 /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충남기념물 제76호.
본문
본관 안동(安東). 자 명여(明汝). 호 백야(白冶). 충남 홍성(洪城) 출생. 형규(衡奎)의 2남이다. 부유한 명문대가 출신으로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광무 9)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융희 1)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고,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金一星)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독립 투사 이범석 장군 명조 - cafe.daum.net/dur6f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