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이란 무엇인가
역경(易經)의 「易」이란 글자는 도마뱀을 옆에서 본 상형문자(象形文字)로서 상부(上部)의 「日역자는 머리 부분이고, 하부(下部)의 「勿」은 발과 꼬리를 나타내고 있다. 어떤 종류의 도마뱀은 12시충(時蟲)이라고도 하는데, 몸의 빛깔이 하루에도 12번씩이나 변한다는 데서 「易」이라는 글자가 「변화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서죽(筮竹)을 셈하여 그 수(數)의 변화에 의해 점(占)을 치는 데서 점서서(占筮書)에 역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오랜 기록에 의하면 주(周)나라 때는 연산역(連山易), 귀장역(歸藏易), 주역(周易)이라는 세 종류의 점서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주역 하나뿐이다.
주역은 처음에 운세를 판단하는 말(筮辭)을 모은 것 뿐 이었으나 후세에 와서 서사(筮辭)에 대한 주석(注釋)이나 주역 전체를 통일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이론이 전개되어 차츰 철학서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되였다. 이러한 주석이나 역이론을 편찬한 것을 십익(十翼)이라 하며, 후세에 주역은 이 십익을 포함한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십익에 의해서 통일적인 의미를 갖게 된 주역은 점의 원전(原典)으로서뿐만 아니라 철학윤리를 해설하는 경전(經興)으로서의 가치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현대의 주역을 원형(原型)의 주역과 구별하기 위하여 역경(易經)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역경은 단순히 점치는 책으로서, 또한 점의 원전으로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가만히 앉아서도 점괘만 풀면 용하게 들어맞는다는 식의 신비적인 느낌과 인상을 주고 있는 것도 부인 할 수 없다.
따라서 이성적(理性的)인 판단이라 합리주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터무니없는 미신(迷信)이거나 혹은 신비적인 호기심의 대상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후세의 유학자(儒學者)들이 역경을 신성시한데다가 역점가(易占家)들이 그 점괘를 신비화한 데서 만들어진 통속관념으로 역경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어쨌든 점에는 다소간 신비성이 내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역점도 발생 당시에는 신(神)의 뜻을 듣기 위한 원시적인 주문(呪文), 주술(呪術)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역경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그 신비성은 점차로 배제되고 인간 자신에 의한 문제추구라는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고전으로서의 역경의 생명은 신비적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술을 인간화시켜서 실행한 점에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중요시되었던 사색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다.
신비적인 점의 원전이라는 선입관념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역경을 대하면 독자는 의외로 신선한 「인간 능력에 대한 신뢰」를 찿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역경의 점은 귀신의 조화가 아니다. 게다가 역경에 나타난 길흉은 변할 수 없는 숙명으로서 주어전 것도 아니며, 마땅히 순종하고 따라야만 할 법칙을 나타내 줌으로써 운명개척의 노력을 촉진시켜 주는 것이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곧 역경의 도(道)이다.
역경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이지만 철학, 윤리의 책으로서 우리가 읽는다 해도, 읽는 사람이 능등적인 사색을 가질 때 비로소 역경의 참뜻을 알 수가 있다. 대개 책이라는 것은 그 독자와의 합작에 의해 비로소 현실화되는 것인데, 특히 역경은 독자의 적극 참여를 필연적인 요소로 삼고 있다. 즉, 역경의 말은 극히 간결하고 단편적(斷片的)이어서 한번 봐서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한히 넓혀가는 작업은 독자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역경은 신성한 경전도 아니고 신비를 말해 주는 기서(奇書)도 아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역경의 말은 하나의 암시이다. 사람은 그 「암시」에서 자유로운 연상(連想)을 일으켜 자기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란 비로소 역경을 현대에 되살릴 수 있는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