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 丙 壬 壬
午 寅 寅 戌
* 春夏秋冬의 春節
춘하추동을 기준하여 춘절은 木旺之節이다. 계절을 기준하여 춘절은 습을 만들어 내는 시기다. 동절의 한냉시절을 거쳐온 춘절은 한기를 습기로 전환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절은 습한 기운을 난한 기운으로 뿜어내는 것이 마치 지하에서 지상으로 뻗어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춘절이 습하다는 것은 날씨가 습하다는 것이 아니다. 동절기를 거친 춘절의 습은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마치 초목을 찾아 떠도는 양떼와 같고 유목민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하든 초목을 찾아 굶주린 배를 채우려는 것과 같이 몸부림치고 꿈뜰거리는 것이다.
춘절이 습하여 하절기의 난으로 간다는 것은 풍향을 알고 떠도는 유목민과 같아 이동하는 것이다. 찬바람은 따뜻한 곳으로 불게 되어 있으니 바람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는 것은 본능과 같은 것이다. 찬바람이 거칠다 하여 등지고 가면 죽을 것이고 맞서고 가면 산다는 것을 동물은 안다.
오행도 아닌 춘하추동을 표현하며 인간을 비유한다는 것이 혼돈을 줄까 염려스럽지만 나약한 분은 찬바람이 매서워 등을 지고 보온하려 했으니 얼마가지 않아 굶어죽는 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고, 강인한 분은 칼바람과 맞서 걷기가 순간은 고단하겠으나 결국 푸른 초목을 만날 것을 안다.
오행은 본능이고 춘하추동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감각이고 오감이고 체감이고 느낌과 같은 것이다. 순간에 불편함을 인내하지 않고 어찌 초목을 만날 수 있겠으며 순간에 달콤함이 점점 수렁으로 빠져 척박하고 황량한 사막을 맞이할 것인지를 모르고 사는 것이 현대인의 이성이다.
춘절은 어찌되었든 하절로 가는 것이라지만 동절의 한기가 물러가지 않으면 북풍한설을 맞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북풍한설이 거치지 않았는데 어찌 온난하고 따뜻한 하절을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가고 싶어 가지는 것이라면 밀어드리고 싶은데 세상의 이치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춘절이라는 것은 한풍과 온풍을 맞으며 어떻하든 한풍을 몰아내고 온풍을 맞이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한풍이 매서움에 맞아 칼바람도 불사하겠다는 추풍을 맞아 들이는 것을 교과서에서는 춘불용금이라는 멋있는 단어를 쓰고 있다. 저런 고급단어는 교양이 있는 분들이나 쓰는 것이다.
춘절에 한풍이 차디찬데 추풍까지 더해지니 눈보라치고 칼바람도 불사하며 견디어 내면 참~ 실한 놈으로 크는 놈이고 강인하게 성장하는 인물이 되는 것인데 칼바람을 무섭다 피한다고 하면 그 인물이 과연 시대에 공을 세울 수 있는 강인한 인물이 될런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이시대에 사는 인물들이다. 근래에만 해도 6.25를 거친 분들이 우리네의 부모님이고 조부님이 되는 세상에서 최근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성장한 세대들이 과연 납득하고 체감할 수 있는 말인지 이론으로 안다고 체득되어진 계절의 의미를 알기는 쉽지 않다.
북풍한설이 가지지 않은 춘절에 빨래를 들고 계곡에서 빨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모진 추풍이 뼈속까지 시리고 애이게 하는지를 아는것 처럼 하는 것은 곤란하다. 보고 아는 것은 말하지만 체득하고 아는 것은 기꾸녕이 막혀 손짓발짓만 겨우 할 수 있어 손사레치는 것이다.
이런 춘절이 추절의 칼바람과 뼈속까지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어 이겨내고 살아남은 분들이 우리네 부모님이고 조부님인 것이다. 그러니 이를 자손들이 인고의 세월을 거친 장한 분이라 하는 것이다. 춘절의 습을 추절인 조한 기운이 습을 조절하여 마르게 하는 기운이라 하는 것은 오산이다.
추절에 습이 과조한 추절의 북풍한설 칼바람으로 쫓겨나고 거렁뱅이가 되어 길가에서 객사하고 동사한 사람도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부지기 수가 되고 역사의 그늘속에서 뭍어진 영혼들도 있다. 이들은 견디지 못했으니 교과서에서는 고급단어인 춘불용금이라는 단어를 쓰나 보다.
춘절은 습하다. 하절은 난하다. 동절은 한하다. 추절은 조하다. 한난조습을 날씨로 표현하니 用은 보지 않고 體만 보니 이것이 기후인것도 같고 날씨인것도 같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날씨로 표현한 원죄는 글을 쓰는 나이니 이해를 돕지 못하면서 유언비어를 날조했으니 죄를 지은 것이다.
體用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는 듯이 한난조습으로 소설을 쓴것이다. 이 뒤로 하는 말은 더욱 황당무계한 거짓말이니 그만읽고 넘어가시기를 간청한다. 이해도 못시켜 드리면서 거짓을 유포하면 그것은 큰 죄이고 모르고도 짓는 죄가 더 나쁜 것이고 알면서 짓는 죄는 면죄부가 되는 것이다.
춘절에 한기를 몰아내고 습을 발생시켜야 하는데 북풍한설이 제거가 되지 않으니 인간사는 토를 개입시켜 꾀를 쓰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부터는 춘하추동이 아닌 오행적인 관점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고 모르면 그냥 동네 점쟁이가 미친소리 하는 것으로 인식하셨으면 한다.
토가 과연 북풍한설을 어떤 식으로 몰아내는지 보았는지 아는지는 귀신도 모른다고 하니 나도 모르는 것이다. 토가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토는 한난조습중 어디에 해당되는 것인가?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하는 것이니 화생토 토생금으로 중간에 낀겨 넣은 것은 누가 만들었는가?
할머니가 시킨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시킨것도 아닌데 누가 화생토하고 토생금한다는 말을 했는지 알수는 없을 것이다. 교과서에 써있으니 그렇다는 말을 하는 분은 앞서 주의사항의 글을 읽지 않았으니 다시한번 말하지만 읽지 않는 것이 이 세상속에서 잘 사는 방법이다.
여튼 하여튼 북풍한설을 이겨내고자 토를 쓴다는 것은 마치 양이 떼를 짓고 무리를 짓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마치 개미가 길이 나진 길을 걷는 것처럼 일자로 줄을 지어 걷는 것과 같고, 깊은 산속에 동물이 지나는 길목에는 반듯이 길이나고 능선이 생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표현이 구차한 것은 배우지 못해서 그러니 이해하고 마치라는 비유를 쓰는 것은 오행의 체용이 그러하니 양해를 구한다... 밥 잘먹고 살자. 이것도 춘절에 동절이 개입되어 토를 쓰는 용법이라면...
오전에 글을 쓰다 개미마냥 나란히 밥집으로 길이 있기래 따라갔더니 태만하고 게으러지기 시작한다.
토는 한도 아니고 습도 아니고 조도 아니고 난도 아니다. 토의 작용은 다만 한난조습이라는 설정에서 활용되는 用이지 體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用이라 말한다면 用도 아니고 그렇다고 체작용도 아니다. 이를 變體變用하게 하는 주체라고 한다면 곤란하고 목화금수가 스스로 때가 되어 변화된 것을 토가 규정하고 정의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춘절에 토는 활동영역을 조절하는 것이다. 춘절에 토는 디딤돌과 같이 용수철 작용과 같이 튀어 오르게도 하고 한정적인 공간도 설정하고 정착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토왕하다는 개념이고 반대로 토약하면 이사람 말도 맞는 것 같고 저사람 말도 맞는 것 같아 세파에서 우왕좌왕하고 살며 나름대로의 시비에 경륜을 쌓으면 되는 것이다.
때를 알려주는 것인지, 때가 된것을 규명하는 것이지, 모두가 그러하니 나도 그러한 것인지, 토는 인간사 편의에 의해 만들어 놓은 가설인 것이다. 이도 중요하니 어찌 소홀할 수 있겠냐만은 산다는 것이 나름대의 명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니 이도 틀리지는 않는 삶의 일부이다.
또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일부인 것이다. 이를 마치 만물의 영장이 어쩌고 저쩌고 한다는 것이 구차하기 이를데 없는 아집이고 욕망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춘절에 북풍한파가 몰아쳐 온풍으로 가기에는 머나멀기만 한데 토가 개입한다는 것은 살아가는 하나의 수단일 뿐인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또한 삶도 죽음도 결국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추하추동은 자연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감정과 느낌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주는 것이다.
출처 : 春夏秋冬의 春節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