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 무 丙 癸
辰
辰月은 木旺節로 木生火하는 시기이다.
木이 旺하면 火나라에 가지 못하고 木나라에 머무는 것이다.
木나라가 중고등 학생이라면 火나라는 대학생이다,
木나라가 인정에 얽매인다면 火나라는 쿨하게 놀자는 말이다,
木나라가 시작과 도전적이라면 火나라는 무한 경쟁에 돌입하는 것이다.
우리는 木이 火를 生한다고 한다. 유식한 분들은 이를 木生火라고 한다.
生이라는 것은 몸에 배인 습관과 같이 일상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행위와 같다.
보통 목이 화를 생하는 것은 목의 성장성이 화의 확산성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금목은 수평적으로 번지기도 하고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려는 성질이다.
수화는 수직적으로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확산되고 퍼지는 성질이다.
목의 솟구치는 기운이 화의 확산지기를 흔히들 개화라 하여 꽃을 피운다 한다.
이를 삼라만상에 대입하면 나무가 자라고 지엽이 무성하여 꽃을 피우는 것이다.
목이 화를 생하는 것은 성장하는 것이다.
목이 형상을 가지려면 금극목으로 하여 쓰임이 있는 형체를 이루는 것이다.
형체를 이룬 木이 火를 생한 다는 것은 눈에 뛰고자 하는 것이다.
火는 보는 것이고 보여주는 것이다. 木이 火를 생하는 것이 결국 형체를 보는 것이다.
火가 보이는 것이지만 수극화되지 않으면 광선이나 광채에 같아 찰라에 불과하다.
번쩍 섬광이 스쳤습니다. 보셨습니까? 못보셨습니까? 나는 보았고 너는 보지 못했습니다.
수극화 되어야 잠시나마 무지개가 산과 산을 이어 눈에 보이는 이치와 같다.
이렇듯 오행은 상대적으로 목생화를 보려면 수극화와 금극목을 살펴야 한다.
상생이라는 것은 팔다리가 몸에 붙어 움직이는 관절과 같은 것이다.
뼈와 뼈사이를 잇는 관절처럼 부드럽게 움직여주는 손가락이 상생을 하는 것이다.
이를 확대하면 글을 쓰는 저와 글을 읽는 분과 상극되어 있는중에 상생이 되는 것이다.
상극에서 상생이 연결되어 정신이 교감되기도 하고 상생이 상극이 개입되어 서운하기도 하다.
진월은 목에서 화로 변화되는 시절이다. 木生火는 10년이 걸릴수도 30년이 걸릴수도 있다.
목왕해지면 목나라에 머물러 화나라를 보는 것이다.
화왕해지면 화나라에 머물러 목나라를 보는 것이다.
生은 연속성이고, 과정이고, 연결선상과 같고, 어느 곳에서 어느 곳으로 가는 지향점도 있다.
목이 화를 생하는 목생화도 있고, 화가 목을 키우는 화생목도 있다.
甲은 丙을 相生하는 것이고 乙은 丙이 성장시키는 것이다.
甲은 丁을 生하는 것이고 乙은 丁을 눈치를 보며 어찌하나 보는 것이다.
하물며 生化라는 것은 변화되어 있는 결과 중심으로 간것이다.
辰月은 목에서 화로 변화되는 접목시기로 목이 화를 生하는 조건이 따르게 된다.
만약 목이 화로 생화한다는 것은 이는 마치 만년과장이 부장으로 승진하는 것과 같고,
고등학생이 대학교를 진학하는 것과 같고, 소녀가 첫 월경이 시작되는 시기와도 같다.
만년 재수생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과 같고,
만년 고시생이 몇년을 미역국을 드시다가 비로소 합격하는 것이 生化하는 것이다.
이를 초학은 김밥에 옆구리 터지는 용신 찾기에 십수년을 헤메는 것을 당연시 한다.
아니다 하면 십수년의 집착과 공이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아파서 포기를 못한다.
이것이다 하면 그져 자신이 알고 경험한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고 의심하는 것으로
자기를 지키고 상대를 폄하 하려는 상극을 대입하는 것이 알량한 자존심인줄도 모른다.
10년의 세월을 헤메었는데 까짓것 20년의 세월인듯 못헤멜 것이 없다.
고작 20년세월 명리를 하고 30년인듯 못헤멜까 싶다.
진실은 군데 군데 요소 요소에 있는데 이를 어찌 단번에 말할 수 있겠는가 싶다.
애독자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좀더 쉽게 써달라 건의를 하신다.
지나온 세월이 너무도 익숙하여 당연시되고 넘어간 말들을 다시금 되새겨 달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5년세월 10년세월 공부하시는 님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다.
쉽게 가르치지 못하고 매일 어려운 말만 하고 이리 저리 말을 뒤꼬아 易이라 혼돈만 준다.
가르키는 입장이 있고 배우는 입장이 있다.
생이라는 것을 알고 극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공부하시는 님들이 늘 고맙고 송구스럽기만 하다.
존경하는 샘은 생을 원하신다. 극에 이르니 생이 그리운 것이다.
극하고 사는 이들은 생이 그리운지 기웃거리며 콩알을 세고 노는 꼴이 우스운가 보다.
정작 중요한 것을 배우고 가져가는 이들은 무료인 것이다.
자기는 준비되어 가져간 것이니 당연한 자기 합리화를 양심이라 한다.
정작 하찮은 것을 배우고 가져가는 이들은 유료인 것이다.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모른다 배움을 청하였으니 진솔한 분들이다.
어쩌겠는가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룰인 것을 미안하고 송구하니 몸소 실천하는 수밖에...
가르키는 입장에서 솔선수범한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지 배우는 사람은 아는 듯이 말한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니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세상이다.
이것이 生化이니 알면 세상의 잣대로는 미친 것인데 비유하여 설명하면 이를 지혜라 한다.
지혜는 지식을 만들고 지식은 지혜를 만들어 가는 것인데...
지식은 옳은 것이고 지혜는 잔꾀에 불과한 술사라 하는 것이 세상의 잣대이다.
결국 자신의 잣대로 자신이 정한 울타리에서 빼쪽 문틈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아는 듯이 이해하는 듯이 말하는 것이 상극에서 상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
공기중에 산소가 있다고 하니 있는 것이고, 너무도 당연하여 인지하지 못한다.
이런 것이 상생이고 상극이니 지식으로는 알아도 어찌 지혜로 알수 있을까 싶다.
글을 쓰는데도 상생하는 글이 있고 상극하는 글이 있다.
말을 하는데도 상생하는 말이 있고 상극하는 말이 있다.
행동 하는데도 상생하는 행동이 있고 상극하는 행동이 있다.
상생하면 서로가 함께 공감하는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
상극하면 서로가 견제하며 자기 방어하기에 급급하니 성장이 안되는 것이다.
모두가 상생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꼭 실천하고 싶다.
잠못 이루는 밤에 한잔 술을 하더니 넋두리를 한다는 것이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
진월에 수생목은 목생화로 가는데는 걸림돌이고 발목이 잡히는 것이다.
수생목은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작업과 같은 것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기초적인 행위로 당연시 익숙시켜야하는 준비태세와 같은 것이다.
글을 보는 것은 수생목이라면 목생화는 글을 활용하는 것이다.
하물며 화가 목을 성장시키는 것은 시대에 요구에 맞게 글을 편집하는 것과 같다.
수생목은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지식을 갖추고 걸음마를 하여 익숙시키라는 말이다.
그래서 목생화까지 하면 맘껏 활용해 보라는 의미다.
수생목은 생명의 탄생과 같고 세대교체와 같은 것이다.
이또한 목에 머문 것인지 수에 머문 것인지를 자각하지 않으면 수생목은 모르는 것이다.
음양은 철저히 질서가 있고 무질서 속에도 질서가 정연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학인을 자처하면서 스스로 지성인을 자처하면서도 상생을 모르고 상극을 모르고 산다.
나는 상생을 모르니 상극인들 알겠으며 어찌 생화를 말하려 함인지 스스로 부끄럼이 많다.
자녀를 키운 부모의 마음이 있다.
자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어찌 상생을 말할 것인가?
자녀에게 훈육하는 부모가 상극하면서 상생을 요구하면 자식이 과연 상생을 하겠는가?
부모의 입장이 있고 자녀의 입장이 있는 것이다.
상생은 함께 호흡하고 숨쉬는 것이고 상극은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것이다.
오행을 자각하지 못하며 10간을 읽는 것이 많이도 유식하게 보이나 보다.
계수와 을목이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단순히 수생목이라 한다.
을목과 병화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단순히 목생화라 한다.
병화와 계수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단순히 수극화라 한다.
을목과 기토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단순히 목극토라 한다.
기토가 계수를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단순히 토극수라 한다.
병화와 기토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단순히 화생토라 한다.
10간을 교과서에서 10번을 보고 20번을 보아 안다 여기는데 통하지는 못했다.
通이라는 것은 겉을 보는 것이 아니라 心을 보는 것이다.
體를 보는 것이 아니라 用을 보는 것이다.
用에서 다시 體를 보는 것이고 다시 體에서 用을 보는 것이 음양이다.
용체 용체 음양 음양을 열번을 쪼개보지 않고 어찌 用神을 안다 할 수 있을까.
10간은 오행으로 하여 다시 음양으로 질서는 잡는데는 음양을 적어도 10번은 쪼개야
질서가 잡히고 논리가 바로서는 작업인 것이다.
이를 쉽게 말하면 진실인것 같고, 진실을 말하면 거짓인것도 같은 것이 세상인 것이다.
진실과 거짓도 역사가 규정하고 만들어 가는 것인데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이다 말하는가.
명리를 하고자 하는데 세상은 멍리를 원한다.
멍리는 재물이고 명리는 미안하고 송구스러울 뿐이다.
진월에 병화는 지향점이고 목표인 것이다.
진월에 병화가 없다면 지향점과 목표점이 없는 것과 같다.
진월에 계수는 마디를 만들어 나이테를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현실에서는 고등학생이 대학생으로 진학하기 위한 준비와 과정을 말한다.
이런 계수가 병화가 수극화 한다는 것은 속된 말로 먹물이 되라는 말이다.
거지 김춘삼이라는 드라마에서 이슈가 된 배운놈과 배우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교양이 필요하고, 지식이 필요하고, 문화가 필요하고,
역사가 필요하고, 근본이 중요하고, 이것이 계수가 병화에게 주는 메세지이다.
이도 진월에 병화와 계수가 계수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병화라는 입장에서는 철없이 행동하는 사춘기 소년소녀와 같은 것인데
자꾸 성가시게 계수가 극하니 먹물되어 행동적인 양상을 생각적인 양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메세지를 주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병화는 쿨하게 열심히 놀고 열심히 즐기고 열심이 본능에 충실하여 해피하기만 한데,
계수가 그러지 말라하니 성질나고 조바심나고 안절부절 못하게 하니 징그럽게 지식을 쌓는 것이다.
아들에게 공부하는 것이 좋으니 노는 것이 좋으니 하면 당연히 노는 것이 좋단다.
딸에게 공부하는 것이 좋으니 노는 것이 좋으니 하면 공부하는 것이 좋단다.
이또한 팔자에 그려져 있는 것인데 애써 부모는 일반적 사회적인 논리로 수극화를 한다.
잘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는 부처님이 알고 예수님이 안다 여기는 것은 종교인이다.
하나 하나 쉽게 쉽게 곱씹고 곱씹어 아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여서 자신도 모르게 아는
것이 생하는 것이니 음양과 오행과 10간을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았으면 한다.
출처 : 진월 목생화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