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후는 개인의 운명에 작용하는 범위는 실로 크다.
月支를 사계절로 하는 것은 오행적인 관점인데
月支에 조후가 되면 직업적으로 적극성을 띠게 된다.
이런 조후를 간과하면 사람의 마음 씀씀이를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사람의 근본적인 잠재 심리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반 분은 육신으로도 심리적인 특성 분석이 가능하다 여기시는 모양이다.
비견, 겁재, 식신, 상관, 정재, 편재, 정관 등의 육신은 일간중심으로
10간 12지지를 육친에 대입한 것인데 이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다.
육신은 이미 내가 보는 입장이 있고 상대가 보는 입장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부모를 대할 때의 입장과 자식을 대할 때의 입장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리고 친구를 대할 때의 심리가 있고 친구의 입장에서 보는 입장이 있다.
또한 육신은 일간 중심에서 보는 관점과 官중심에서 보는 관점으로 이분화된다.
상대적이고도 상대적인 육신관계로 심리분석을 한다는 것이 이미 주관적일 수 있다.
육친과 육신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고 고민되지 않아 보다.
육친이나 육신을 십신이라고도 하고 십성이라고도 하는데 엄밀히는 신살의 부류이다.
공공연하게 학인들 간에 통하는 언어가 되어 대중화 되었다 하나 출발은 그러하다.
육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 있고, 격국과 용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 있고,
오행으로 보아야 할 것이 있고, 음양이나 조후로 보아야 할 경우가 있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어느 곳에 무엇을 적용하여 볼 것인지는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일단 알아야 분별력을 가질 수 있고 나름대로의 지혜로 경험을 쌓고 축척해 갈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받아 들이고 수용할 것인가 이다.
표현하는 사람은 하나고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모두가 축술미 삼형으로 큰일이 난다 하는데 이것을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쟁이다.
똑 같은 말을 듣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주옥같고 어떤 사람에게는 잡답처럼 들리기도 한다.
정인은 정의되고 약속되어진 안전한 지식만 수용하려니 조심스럽기만 하다.
문자나 문맥에 틀린 부분이나 흠만 발견하는 시야를 가지고 있으니 학문의 파수꾼과 같다.
편인은 자신과 코드가 맞는 것만 삘을 받아 수용하려는 분이니 이 또한 조심스럽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자기 식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활용하는 것이 다소 위험하기도 하다.
무인성은 여과없이 받아 들여 이해하지 못하고도 당연히 아는 것 처럼 하니 조심스럽다.
스스로 정한 기준이 없어 받아 들이는 이해력은 좋으나 기준점이 모호하여 식을 만들기 어렵다.
유인성은 자기 기준에 대입하려는 잣대를 가지고 있으니 이해의 폭에 스스로 한계성을 정하여 둔다.
인성 혼잡하면 같은 말을 번복하게 하고 결국 자기가 듣고자 하는 것을 들어야 속이 후련하신가 보다.
하여간 이러한 육신이 심리처럼 보여질 수는 있으나 상대적인 입장에서의 관계설정일 뿐이다.
원래는 조후에 대해서 몇자 써보려 했는데 아차 싶은 마음에 옆으로 우회하여 글을 돌려썻다.
개똥철학이 말을 하면 주어담지 않듯이 쓴글도 구차하게 고치거나 바꾸지는 말자이다.
소설이 지난 해월은 燥에서 寒으로 가고 있고 오늘이 바야흐로 기사일이다.
오늘은 "때"에 대해 막연한 분들이 때를 알고자 하고,
상대적인 체면에 열심히 살다 잠시 멈추어 다시 뛰고자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어디에 있고 너는 어디에 있는지 막연하기도 하다.
꿈속에서 본것도 같고 옛날에 겪고 있는 일을 다시 번복이나 하는 것 처럼 산다.
초감각적인 무언가가 마치 인지시켜 주려는 것만 같은 그 무엇인가가 나를 멈추게 한다.
귀신은 씨나랏을 까먹기를 좋아하고 사람은 지식과 지혜로서 살기를 좋아하나 보다.
육신은 육신일 뿐이고 조후는 조후일 뿐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 처럼 하는 나는 무인성일 수도 있고,
아는 것을 모르는 것 처럼 하는 능청과 쇼맵쉽은 유인성이라 하나 보다.
출처 : 조후에 대하여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