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하루가 꿈결 같습니다. 어제는 무슨 일로 하루를 보내고 원진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글을 표현했는지 모든 것이 기억이 나지 않으니 까마득한 과거일 뿐이고 옛날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단세포 동물로 현실과 내일을 보고사니 늘 새롭기만 합니다.
임신날의 생각과 계유날의 생각이 다름이고, 현 신유시에 생각이 다르고 차후 임술시에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런 변덕스러운 인간사의 마음은 가름되는 것이 아니라 동요되는 것이라 늘 하나의 기는 멈추고 움직이며 늙어가고 성장하기도 합니다.
원진살이 한낱 감정이 이성을 덥어 이성적인 판단으로 행하지 못하고 감정적인 판단으로 행하는데서 불편한 심기를 들어내는 히스테리 증상 정도로 표현되어지고 있으나 이도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이 괴롭고 불편하니 시대는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표현되기를 단순히 이성과 감정의 문제로만 대립시키고 있으나 이러한 것이 중도를 지켜갈때 건강하고 태평하나 상대적으로 성장과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한쪽으로 치우칠때 인간사는 성장하려는 의지가 나오고 변화를 모색할 것입니다.
원진살이 종종 종교인, 연구인, 예술가 등의 사주에서 보여지는 것을 보면 이러한 집요함과 편집증, 판타지와 같은 환상이 없으면 새로운 것을 갈구하거나 찾지 않을 것이고, 시대는 자꾸 새로운 것을 요구하기도 기대하기도 상상도 수요와 공급의 원칙입니다.
도덕과 윤리 종교에서는 대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딴짓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담니다로 해피엔딩을 그리길 기대합니다. 인간사의 욕망은 그렇게 단조롭지가 않아 한 여자는 남편을 두고 이웃집 남자가 로멘스를 즐기며 양심에 가책과 갈등도 합니다.
예술과 드라마는 온통 천지 불륜이 아니면 재미가 없다고 하는 세상에 과연 나 자신은 그러한 것을 다만 드라마로만 보며 난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고 얼만큼 당당할 것이며 불교에서는 잘못된 생각조차 사고조차 죄라 하는데 그것을 본 것도 죄인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은 사람의 의식을 늘 혼돈하고 유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때가 되면 호환마마처럼 찾아 오는 양심과 비양심의 문제에서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에 치우쳐질때 외도이고 딴짓이지 이를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대개 하지는 않습니다.
원진살이라는 것이 뭐 대단한 것처럼 이렇듯 표현은 하나 일상 생활에서 찾아 이성적으로 보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한심하고 감정적으로 보면 그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의 공감대를 가지는 정도의 문제에 불과한 소소한 오해와 갈등입니다.
이도 한 예를 들어 어떤 부부가 있습니다. 남편은 다정다감하고 자상하여 평소 아내에게 친절하게 잘합니다. 어느날 이웃집 부부와 갈비집에 갔습니다. 남편은 아내보다는 이웃집 아내에게 고기를 구워주며 자상함과 다정함을 보이고 미소를 짓습니다.
집에 돌아 왔습니다. 아내는 대뜸 당신 이웃집 여자에게 관심있지, 아주 나는 생무시하고 이웃집 아내만 고기를 구워주고 노래방가서 나 노래 할때는 템버린 안치고 이웃집 아내 노래할 때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나서 입이 찌개져서 템버린 치고 정말 웃겨!
남편은 평소 다정다감하여 상대를 불편하지 않게 하고 분위기를 맞추거라 자신은 갈비도 덜 먹고 고기를 굽고 노래방에서 함께한 것입니다. 어색하거나 불편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매너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내 아내를 위하는 방식이라는 생각한 모양입니다.
물론 이러한 역활이 남편과 아내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소설에서 아내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자신은 정당했고 상대는 과하다는 생각에서 갈등은 시작되고 부부의 골짜기는 이런 하찮은 것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산을 만듭니다.
그냥 허허~! 웃고 지나가면 그만인데, 그져 상대의 말을 인정하면 그만인데, 평소 늘 무시하는 눈빛이었다는 둥, 말투가 부드럽지 못하고 쌈닭 같다는 둥, 어떻게든 약점과 트짐을 잡아 상대를 잘못을 인정시키려는 것이 마치 이기는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너를 보고 있고, 너는 늘 감정적으로 사람을 기분 드럽게 하는 싸가지 없는 쉐끼라고 하면 속이 후련하시기라도 하나봅니다. 대화하는 방법을 학습하지 못해선지 대개 당신 성질에 맞이 않는다 입을 닫고 포기해버립니다.
남편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는 벽창호라고 단정 합니다. 아내하고는 소통이 안되니 거시기만 가끔하다 그도 치사해서 어짜저짜 해결하고 산다고 합니다. 꽁하고 의심하고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판정하고는 소통이 되지 않는다 하는 것이 원진살입니다.
물론 예를 아주 우습고 하찮게 들었지만 원진살은 큰 문제를 두고는 절대 문제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합심해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단합력을 보이고, 아주 하찮은 것에서 불만을 하고 갈등을 하고 실망을 하며, 미워하며 증오하니 원진살입니다.
알고보면 너무도 어처구니 없고 모르면 예리한 바늘과 같아 마음에 헛점을 파고 들어 비수를 꼿기도 합니다. 이런 자초지종을 정확히 설명하고 전달해서 납득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진살의 해결점인데 정작 바늘구멍을 찾고 보면 민망하기만 합니다.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포괄적인 개념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부분적인 개념에서 마치 전체도 뻔할 것이라 단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여 납득시킬 수 없다면 원진살의 글자를 본것이지 자초지종을 보지는 못했으니 원진살은 모르는 것입니다.
여튼 하여튼, 사월이라는 사술원진은 표면적으로 들어나고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도 신약자라면 이정도는 알아주고 대접해줘야 하는 것 아냐 라고 할 것이고, 혹여나 외면하거나 소외하고 있다고 여기는 데서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다 와 닿지가 않는 것은 늘 자신은 많은 부분 양보하고 있고 털어도 먼지하나 나지 않을 만큼 마음과 정성을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하는데서 일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짐이고 부담이고 신경쓰이는 존재감인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아뭇 소리도 하지 않았고 혹여 신경쓰일까 내 할 일만 열심히 하며 무지하게 조심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상대에게는 얼마나 가시방석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인지를 안다면 그러하지 못했을 것인데 여튼 포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문관살도 그렇고 육해살도 그렇고 더구나 원진살은 사람의 나약한 마음을 파고드는 귀신과 같아 위에 표현하기를 바늘구멍만한 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가는 바이러스와 같고, 도끼나 해머로 치면 아프지 않은데 바늘로 찌르니 거참 드럽게 아프기만 합니다.
그래서 원진살을 귀신이 들린 병이라도고 하니 도사귀신이 들어서 너희가 어찌 내 마음을 알리오, 하찮은 것들이 감히 나를 판단하려 하지 마라, 내가 너를 보고 구분할 수는 있어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한다니 이것이 그만의 리그에서는 옳은 의지입니다.
원진도 음양이라 양중에 양인 사화는 가우다시 폼을 잡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술토는 상대적으로 음토라 음이 양화인 사화를 현혹하는 것이지 사화인 양이 음을 현혹하는 것이 아니라 그져 멈추어 관심을 표명해야 하는 것으로 눈길과 관심을 원합니다.
나는 틀림없이 잘한 것만 있지 못할 수는 없는 것이고, 절제와 자제하는 속에서 너들 하는 것들은 내가 다 알아야 하고 내 손바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니 혹여 모르는 일이 진행되거나 낮선 느낌이 들면 기분이 더럽습니다. 이것은 무시한 것입니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깔끔하기가 털어서 먼지하나 나오는 것도 찝찝하니 말쑥하고 결벽증다운 히스테리와 같습니다. 마음도 이와 같이 선비처럼 맑고 깨끗해서 찝찝함이 없이 깨끗한 난초같고 대쪽같아야 한다는 기대치에서 이지러짐과 같습니다.
에구, 원진살도 결국 음양오행에서 충중봉합하는데 평범한 단어로 상생상극하는데서오는 비틀림이고 더하여 한난조습이 치우쳐 지며 일어나는 심상의 나약한 마음을 흔들어 놓는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이를 옛날 말로는 귀신들린 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병인 원진살의 해결점은 쉽지 않으나 귀는 있으나 들리지가 않고 눈은 있으나 보이지가 않으니 사람의 감각은 꼭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들을 줄 아는 마음수양의 과정이 필요한가 봅니다.
절에 가면 스님은 내려 놓으라 합니다. ㅎㅎ 무엇을 알아야지 내려놓거나 말거나 하지, 내려 놓을 것이 무엇이고, 올려 놓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그져 내려 놓으라는 것은 결국 답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가면 사랑을 가르칩니다. ㅎㅎ 사랑할 구석이 있어야 사랑하지 하여간 개뿔도 모르고 하는 말은 도대체 귀가 있고 눈이 있는대로 와 닿지가 않는가 봅니다. 주여를 찾아야 할지 할렐루야를 찾아야 할지, 여튼 나무아미타불이고 관세음 보살입니다.
귀신의 농간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정신줄을 놓은 것인데 정말 귀신이 있다고 여기는 분도 계시고, 그런 것이 어디있냐고 하는 분도 계시고, 세상은 재미있는 세상이고 아름다운 밤만이 깊어 갑니다. 올해 임진년은 원진살을 많이 앓을 것 같습니다.
원진살을 당신은 이겨낼 수 있겠는지요? ㅎㅎ 헛웃음이 절로 납니다. 나는 이런것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웃음이 납니다. 일상 생활에서 단 한번도 감정에 기복이 없다면 제가 믿을 수 있으나 화내거나 미워하거나 성질내는 것이 원진살입니다.
한 없이 미안하고, 한 없이 감사한 마음에 몸둘 바를 모르겠고, 어찌하면 미안하지 않을까 어찌하면 감사한 마음에 분골쇄신 해서라도 보답해야 할지를 떠올리는 분이라면 차가운 바람이 코를 베어가는 듯하는 것이 감사하면 주머니에서 손도 빼셔야지요?
우리 모두는 원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임진년 원진살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 있다면 마음의 의지를 믿는 것입니다. 상대의 천심과 본심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한낱 잠시 잠깐의 언행에 불쾌감이 드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의심하셔야 합니다.
상대는 삼라만상의 자연과 같아 존중되어져야 합니다. 자신은 끝없이 의심해서 자질 개발해야할 재개발지와 같으니 다듬어져야 합니다. 이미 상대 옆에 존재하는 내가 무엇이 옳고 맞다는 것인지는 상대의 판정이지 자신의 판정은 자가당착에 불과합니다.
하여간 원진살 화이팅이고, 원진살로 팔자를 고칠 수도 있고 원진살로 신세도 거시기할 수도 있으니 이러한 선택도 읽는 분의 몫이나 진실로 상황이 원진살이 납득이 가지 않거나 이해가 가지 않아 요구가 있으면 다시금 비유하여 설명하여 올리겠습니다.
출처 : 원진살에 대하여2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