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성으로 살아가기.
무인성이라는 것은 사주에서 인성이 없다는 것이다.
無인성을 이해하려면 有인성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인성이라는 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자아라는 의식의 나이다.
껍데기가 일간이라면 껍데기 속에 베일속에 가려진 것이 인성이다.
인성은 자아의식에 대한 철학과 같아 자신과 대화를 하고 살아간다.
스스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하고 의식을 가지고 있고 자신만의 이성적인 사고력을 가진다.
인성의 역활이 관을 지키고 보호하라는 것이라면 이는 사회적인 관점일 것이다.
인성의 역활이 일간을 생하든 불생하든 한다는 것은 모양을 갖추기 위한 준비일 것이다.
관중심으로 인성은 좋게 말하면 사회규범을 준수하고 따르는 착한 인물이다.
반대로 인성중심으로 관을 좋게 말하면 사회규범에 판정을 받으려는 착한 인물이다.
관중심 인성은 법질서를 지켜가는 모범이 되는 인물이다.
인성중심 관이면 사회에서 적합한 관심을 받으려는 인물이다.
물론 격이라는 대전제나 상생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설명해야 하는 말이긴 하나,
인성이라는 것은 항시 관이 있든 없든 짝이 되어 움직이는 육신이다.
그래서 인성이 있고 관이 없으면 관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관이 있고 인성이 없으면 관도 없어지니 결국 인성도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인성이라는 것은 관이라는 대전제 속에서 관심을 받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성은 자신의 권리나 사회적인 관심을 받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성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이미 관심의 반대이니 소외받고 살 수 있는 조건이다.
인성이 없다는 것은 결국 소외받고 살아가니 어떻게 하든 관심을 받고 싶어 할 것이다.
그래서 무인성하면 입담으로 눈길을 받으려 하든지, 독특한 모습을 하던지
뭔가 보여주던지, 이상한 짓이라도 해서 눈길을 받고자 애를 쓰고자 할 것이다.
보통 유인성한 사람이 눈길을 잘 받는데 정말 그들도 눈길을 받고 싶어하는가는 아니다.
관심까지는 좋은데 간섭은 싫어하니 그때는 삐지고 토라져 그때 부터는 풀릴때 까지 묵언이다.
유인성은 삐지면 말을 안하고 토라져 몇날 몇일 잠수를 탄다.
사람 속 뒤집어 놓고 신경을 꺼주세요 하고는 정작 옆사람 속을 태운다.
유인성은 늘 자신이 부족하다 여기며 행동은 어줍잖고 어설프게 하여 관심을 받게 한다.
지켜보던 무인성 어설픈 행동이 낚씨 찌밥인줄은 모르고 덮석 물어 대신 손과 발이 되어준다.
유인성은 내면의 자신과 끊없이 대화를 하며 식상으로 발현되는 작용 반작용을 익힌다.
유인성에 무식상하면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부족하다 여기고 늘 배우려는 자세만 취할 것이다.
유인성에 식상이면 작용 반작용을 생각하니 반응에 따라 끊없이 자기를 점검하려는 것과 같다.
무인성에 식상이면 메아리 반응은 축척하지 못하니 끊없는 시행착오로 몸으로 익혀야 할 것이다.
나는 무인성이라 전화번호를 못외운다. 그러나 손가락이 외운다.
비밀번호도 모른다. 그러나 손가락은 외우고 있다. 참 히안하죵~~~,
타이핑 글자는 모른다, 그러나 손가락은 타이핑 되는 자리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인성은 자기 생각대로 준비한데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짜증을 내신다.
무인성은 준비하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순간에 충실하면 되지 화낼 일이 모있냐며 의아해 할 것이다.
인성이 만땅한 사람은 사람의 마음 씀씀이를 두고 무어라 할 것이다.
당신 입맛에 맞지 않으면 모두 어리석은 중생 취급하니 그의 심성이 알만 하다.
인성이 태과한 운따라 인성운이 오면 그러한 것인데 자기는 인성이 적당한가 생각하지 마라.
하루에 인성태과한 시간대가 되면 상대의 사고방식이 틀려먹었다는 생각이 홀연히 들것이다.
인성태과가 바라보는 시각은 그러한데 정작 자기 자신은 한 없이 부족한 것을 숨기고 싶었나 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들어내면 많이 쪽팔리고 부끄럽기라도 한 모양이시다.
인성이라는 것은 이런 알량한 자존심을 만들기도 하고 자기만의 대화를 끊없이 한다.
자기만의 대화에 익숙하다 보면 결국 세상과 문닫고 고립되는 것인줄은 모르고 산다.
인성이 없다는 것, 무인성하다는 것, 인성이 장간에 쬐끄만한 것, 무력한것, 재극인 맞은것,
이들은 스스로에 대한 신념이 없으니 자기 생각이 맞나 틀리나 묻고 확인하려 할 것이다.
인성이 쬐마난 분이나 없는 분은 내말이 맞지, 내 생각이 맞지 그런 동의를 구하고 싶은가 보다.
인성이 태과한 분은 당신 스타일을 고집하니 상대의 사고방식을 뜯어 고쳐보겠다는 심산이다.
지속적으로 뜯어 고쳐주면 감사하겠지만 어찌 인성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뜯어 고쳐질수 있겠는가?
차라리 무인성이 속편하지 쬐만한 인성의 아집을 어찌 쉽게 포기하라는 말인지 이해할런지 모르겠다.
무인성을 설명하는 것인지 유인성을 설명하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될 수 있겠다.
결국 둘다 알아야 무인성을 아는 것이다 단서로 출발은 했기는 했는데...
무인성하여 인성시간이 오거나 인성날이 오거나 인성달, 인성년 인성운에 오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산것에 대한 회한에 불편한 심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것이다.
뭔가 모르고 산것에 대한 더러운 기분, 성질나는 기분, 짜증나는 것, 왜 이러고 사느것에 대한
거시기한 기분, 열심히 살다 모든 것을 브레이크 딱 잡고 엄한 짓이라도 할까 조심스럽기만 하다.
인성날에 신림동 친구는 술을 퍼잡수신다. 꿀꿀하댄다. 왜그러냐고 하면 그냥 심란하단다.
불편한 마음이 골수에 파고 드니 해피맨도 저렇게 나약할 수가 있는 모양이다.
세상속에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엄청나게 한심하게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무인성이 자신을 생각하면 기분 드러운 것이다.
한 없이 부드러운 말로 친구야~!라 불러도 그의 귀에는 비꼬고 비양거린다 생각이 들것이다.
그것이 무인성인데 어쩌겠는가 팔자를 탓하든지, 세월을 탓해야지, 부처님을 탓해야 할 것이다.
팔자에 무인성이 운에서 온다고 유인성되는 것은 아니다.
무인성은 무인성이고 유인성은 유인성일 뿐이다. 이런 대 전제가 없으면 말장난에 불과하다.
무인성은 관에 지켜지 않으니 약속을 지켜본적이 없다.
무인성은 재극인 받아 보지 않았으니 현실에 유용한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무인성은 식상을 조절하지 않았으니 조건반사적인 반응에 무감각하기만 하다.
무인성은 일간을 생해보지 않았으니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니 당당할 수있다.
유인성은 늘 자신은 배고프다 여긴다. 무인성은 늘 자신은 배부르다 여긴다.
유인성은 늘 자신은 부족하다 여긴다. 무인성은 늘 자신은 완전하다 여긴다.
정편인을 나누지 않았으니 그냥 저냥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팔자에 인성이 태과하든 불급하든을 우선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운에 따라 태과불급이 타육신으로 어떻게 조절되는지를 보는 것이 실력이다.
인성태과한 양반은 인성운에 오니 할줄 아는게 공부밖에 없고 기도밖에 할 줄 모른다.
인성이 적절한 분은 상대의 심중과 교류소통하여 적절한 타협점을 이끌어 내게 된다.
인성이 불급한 분은 잘나가다가 엉뚱하고 미친소리로 상대방의 심사를 뒤집어 놓는다.
어쩌겠는가. 그것이 운명이고 팔자인 것을...
유인성이 재극인 맞으면 시대에 유용한 지식을 가질수도 있고,
유인성이 재극인 맞으면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이 뭔지를 알수도 있다.
인성이 일간을 생하고 재극인하면 이는 돈벌고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지식을 제공한다.
인성이 일간을 불생하고 재극인하면 돈벌고자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성이 있어 재극인이 안되면 그의 심상이 현실성이 없으니 때묻지 않은 않은 인물이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것이라 해야 할 지, 50년된 가방을 들고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는 댕기를 하고 짚신을 신고 다닌다고 무어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에 계신 분은 인성태과에 평생 재극인이 되지 않아 심결이 비단결이다.
오십이 다되어 재극인되면서 세상에서 필요로하는 지식과 앎이라는 것이 뭔지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지난시절 무용한 생각만하다 이제 유용한 것과 무용한 것을 알기 시작했다.
그 첫시작은 마치 무인성이 인성운에 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냉정한 현실에 마음과 같이 않되는 일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게 한다.
현실에 걸맞은 생각과 필요한 준비를 하라고 운에서는 메세지는 왔건만...
결국 이도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귀로만 듣고 살다 이제 비로서 보고 사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다는 것이 결국은 가장 먼저 냉혹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없는 것이 들어온다는 것은 낯선 경험이기도 하고 모두가 황당하기만 할 뿐이다.
화두를 너무 포괄적으로 잡으니 글이 질서가 없다.
무인성이든 유인성이든 인성은 인간사 잠재의식속에 모두가 있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조절하고 사는 것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행해야할 숙제인 것이다.
분명 답은 이것인데 저것이라고 하니 시행착오를 겪고 살아가는 것이다.
머리가 헝클어지면 쉽게도 눈에 뛰니 미용실에 가서 컷트하면 되는데,,,
마음이 흐트러지면 눈에 뛰지 않으니 시간이 약이다 여기고 때우려한다.
물론 옛날에는 미용실이 없어 대충 머리는 묶고 살았다.
물론 현실에는 철학관이 없어 마음이 다치면 스스로 자가치료를 했다.
운명상담이나 철학상담은 심심풀이로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다치고 아플때 치료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문화로 정착되지 않았다.
혼자 전전긍긍하는 시대는 지났다. 마음이 아프면 이도 치료해야 한다.
마음에 병이 몸에 이르는 것이고 몸에 병이 마음에 이르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다루는 것이라 함부로 방치하면 이도 문제인 것이다.
불확실한 것을 확실히 아는 것도 때로는 시간을 버는 지혜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집에 걸어가도 되는데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는 것은 시간을 벌고자 하는 문화이다.
시간이 곧 돈으로 직결되는 시대에 마음 툭툭털고 새로운 도전을 할려면 정리해야 할것이다.
출처 : 무인성으로 살아가기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