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한 두뇌를 소유하려면
육신으로 겁재가 있어야 하고
오행으로는 수화가 상전되어야 한다.
육신으로 겁재가 없다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타인을 알지 못하니 나를 안다고 할수도 없는 것이다.
타인이 없으니 나를 비춰볼 거울이 없으니 나도 읍는 것이다.
나도 읍다는 말을 하니 섬짓하다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호감을 주는 것도 겁재이고,
상대의 아쉬움을 아는 것도 겁재이다,
겁재가 없으면 자기방어적이라 자신만 추스리는 것이다.
자신만 추스리다 보니 자신의 정체성에서 헤메이는 것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막연한 것이다.
타를 통하여 나를 아는 것은 객관적이다.
막연히 타인을 아는것처럼 말하나 그럴것이다라는 상상에 불과하다.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역활을 찾는 것이 현실적으로 상대를 이해한 것이다.
겁재가 없으면 상대의 질문에 동문서답을 한다.
자기 말을 한 것이지 상대의 입장에서 대답한 것은 아니다.
참고로 나는 겁재가 없다.
참 인생 불쌍한 인간이다.
그래서 지독히도 음양을 알고자 몸부림을 쳤는지도 모르겠다.
사주에 겁재가 있는 분들은 그냥 음양을 이해하고 알고 있다.
아주 당연시하고 당연하듯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니 굳이 거론할 주제도 되지 못한다.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니 음양이 이렇다 말한다.
추론한 것이다. 추상한 것이다.
운명의 울타리에서 탈출이 되지 못한다.
평생 팔자의 그늘안에서 뱅뱅뱅 돌고 돌며 살것이다.
지금 겁재를 말하는 것은 천간의 겁재이다.
지지의 겁재는 근으로 활용되는 것이지 겁재는 아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정도로 활용할 정도는 된다.
겁재는 나와 너고, 너가 주체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주체가 될 수도 있다.
하나 겁재가 있으면 너를 주체로 해서 내가 객체로 활용되는 것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객체인 겁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객체인 겁재가 주체로서 주체인 나를 객체로 여겨야 이해하는 것이다.
겁재가 없다는 것은 머리가 좋다고 할수는 없다.
머리가 좋으려면 겁재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똑똑해질 수 있다.
겁재가 없으면 안똑똑하다가 된다.
주체 객체의 출발은 일간과 겁재로 부터 출발한다.
가장 쉬운듯 하면서 가장 어려운 육신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겁재고 항시 걱정과 우려속에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분의 자제분도 겁재가 있는 분이다.
지금 그가 방황을 하고 있단다.
나이도 어린 양반이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나는 없고 너가 원하는 세상에 인형처럼 꼭두각시처럼 삐에로처럼
열심히 귀염둥이로 살았는데 헌신과 양보를 미덕으로 알고 살았는데...
더한 것을 원하고 꾸짓는다면 서운하다.
겁재가 없는 사람은 겁재가 있는듯 당당히 겁재가 있는 사람을
다룰려고 하고 조율하려고 한다.
겁재가 있는 사람은 불쌍한 무겁재인 사람들을 위해 애써주고
마음써주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세상은 아이러니고 넌센스다.
이런 말들이 다소 미친듯이 들리고 다소 말장난 같지만 이것이
음양이고 인간사에 나와 겁재와의 관계설정이다.
진실이 가져다 주는 아픔은 있는 것이다.
가식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내 생각이 스스로 틀렸다고 여기고 살면 좋겠다.
나는 편인용신자다.
스스로 옳다 여기는 생각이 타인이 보기에는 허구맹랑한 것이다.
틀린생각을 하고도 맞다고 여기고 있으니 분명 정상은 아닐 것이다.
흉신이라는 것은 정당화 할 수 없는 진행형인것이다.
정답은 없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데 단정지으려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다만 이런 것도 있다는 것을 제시할 뿐이지 자신의 의지를
옳다고 여기면 곤란한 것이고 전파한다는 것은 미친짓일 것이다.
겁재가 비견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편인이 정인으로 정착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명리를 하는 사람들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하잘것 없는 지식을 이용하는 것은 좋은데 세상사를
뒤집을 생각은 하지 마라.
보이며 산다하여 말하지 말고
그들이 간절히 원할때 한마디 할 수 있는 자제력을 가져야 한다.
세상을 순수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꾀를 내고자 했으니 미안해야 하고 죄송한 것이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스스로 고행을 자초해야 할것이고,
질서속에 동화되는 음양지인이 되기를 간절이 기대하고 소원한다.
내기도가 상대의 마음에 통하려면 겁재가 있어야 한다.
겁재가 없으면 마음은 굴뚝같아도 상대에게 와닿지 않으니 말뿐인 것이다.
겁재는 뭔지도 모르고 걱정말라 하면 되는 것이고,
무겁재는 걱정말라 하면 죽을 힘을 다해 소원하고 빌고 빌어야 한다.
스스로 힘들어야 상대는 행복한 것이다.
인도사람이 왜 스스로 고행을 자초하는지 알것 같다.
이빨이 무너지고 다리에 신경이 흐르지 않고 팔과 손이 남의 손같이
느껴지는 것을 보통사람은 알지는 못할 것이다.
음양은 살아있다.
겁재의 영특함에 나는 관리대상자가 되는 것이고,
나의 영특함에 겁재는 관리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좋은 말로 관심이다.
나쁜 말로는 요주의 인물이다.
언제 사고 칠지 모르는 어디로 튈지 알수 없는 탱탱볼과 같다.
겁재는 스스로 자생력을 가질려고 한다.
일간은 식재관이라는 것에 붙잡혀 사는 볼모인 것이다.
현실이란 것에 볼모가 되어 나는 한발짝도 뗄수 없는 볼모인 삶이다.
일탈을 하면 큰일 나는줄 알고 내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철창신세이다.
내 마음이 감옥이고 내 생활이 감옥인것이다.
이 지독한 감옥생활이 50대 중반이 되서야 끝이 난다.
최근 이년전에 음양에 대한 깨우침이 아직은 목마르다.
겁재가 사는 삶을 육신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자.
그는 겁재에 의지하나 관심도 받고 싶어 한다.
밝은 햇살에 달빛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달이 없다 하지 말자.
은근한 달빛은 해가 지면 아름다운 것이다.
해가 있어 달빛은 쉴수 있다. 그의 휴식을 간섭하지 말자.
미안하고 송구한 것은 표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로만 미안하다 하는 것을 겁재가 모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