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일간이 식신으로 발현되는 것을 표현력이라 합니다. 만약 일간이 근(根)으로 왕하다면 표현력은 행동을 동반한 추진력이기도 합니다. 흉신인 편인이 길신인 식신을 도식하면 외부적인 표현 소통보다는 내부적인 점검과 조사 확인을 거치려 합니다.
일간 중심에서 식신으로 가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자기 표현이 외부와 소통하는 것이라면, 편인은 상대적으로 밖에서 안을 살펴야 하는 것과 같아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여 자신을 조사하고 점검하는 것과 같아 자신과의 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근(根)왕한 일간의 도식은 반복적인 자기 점검으로 이렇게 하면 안되는 것을 경험한 유경험자와 같아 전문가로 살아남는 다면, 근(根)쇠한 일간의 도식은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만 경험하고 다시 도전하지 못하니 비전문가로 도태되기도 합니다.
근쇠한 일간의 도식은 식신을 살려내지 못했으니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는 것만 경험하게 되고, 근왕한 일간의 도식은 어떻게하든 식신을 살리고자 했으니 어려움중에 안되는 것을 되게 했으니 근쇠한 도식은 맨티가 되고 근왕한 도식은 맨토가 됩니다.
단지, 일간을 배제하고 편인이 식신을 도식하는 단순한 상극의 해석은 식신이라는 것은 일간이 식신으로 발현한 것이 자기 개성이고 표현인데, 식신은 주어진 기회와 혜택과도 같다면 편인 도식은 내가 과연 저걸 할수 있을까 망설이는 주저함과 같습니다.
결국, 이곳에는 두가지 팁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려움을 극복한 도식이고, 하나는 어려움을 포기한 도식입니다. 또 하나는 기회라 무조건 밀어붙인 도식이고, 하나는 그것이 과연 될까 안될까 주저하고 망설이거나 안될꺼라고 스스로 포기하는 도식입니다.
좀더 쉬운 예로 표현한다면 근왕 식신은 음식도 맛나게 하니 장금이와 같은 주방장입니다. 근쇠한 식신은 주방장을 돕는 시다발이입니다. 장금이 주방장은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음식을 요리하고 신선한 맛과 온도를 맞추니 일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근약 식신은 시다발이 10년째인데도 몸에 배인 노련함으로 능숙해야 해야 할 주방 일을 잔머리님을 굴리자니 미리서 찬을 미리담아 놓아, 시간이 지나 담아 놓은 반찬이 겉은 마른 상태가 되니 도식이고 고객이 이를 먹자니 밥한끼의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대개, 도식의 음식은 보양식과 같아, 3년 묵은 묵은지와 같은데 설명이 없이 10년 묵은 묵은지를 내어놓고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고객은 보기도 먹기도 불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태백산에서 숙성시킨 십년묵은 것이라 설명하면 보약으로 여길 것입니다.
위와 같이 식신은 행위로서 표현되어지는 음식이라면 편인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식신이 양파로 그냥 먹기 불편하다면 편인은 양파는 비타민이 풍부해서 숙취해소에 좋은 음식이라고 설명한다면 먹기 불편해도 참고 먹는 것과 같습니다.
몸의 감각으로 익숙해져야 할 것이 식신이라면 정신적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 편인인데, 식신은 달콤한 사과와 같이 과일과 같다면 편인도식은 맵고, 시고, 달고, 짠 향신료와 같아 부담없고 편리한 식신에 비해 응축되고 농축된 특성이 나타납니다.
다른 방향으로 비유하여 설명하면 일간이 식신을 생하면 내가 낳은 자식입니다. 만약 일간이 식신을 불생해도 내가 낳은 자식이기는 하나 내 몸을 빌어 낳았으나 함께하는 시간이 일간이 식신을 생하는 것에 비하여 다소 적고 많음에 차이가 날 뿐입니다.
일간과 식신의 관계는 동물적이고 생물학적인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이는 친구같은 엄마입니다. 이곳에 편인이 개입되면 사회적인 어머니로 마음으로 자식을 길러낸 어머니라해야 모친분들이 좋아들 하시는데 늘 자식걱정과 우려로 양육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일간이 식신만 생했다면 자식과 친구같이 함께 지내다 보니 자식도 성장하고 엄마도 성장한 가족입니다. 그러나 편인이 도식하면 자식에 대한 걱정과 우려로 마음만 노심초사하고 말로 어머니 노릇을 하거라 애썻다는 말입니다.
대개, 정인은 자식에게 사회적으로 더 큰 기회를 열어주고자 하는 어머니로 자식을 양육했다는 것이고, 편인은 자식인 식신에게 가정사의 사정과 인연과 도리를 승계시키는데 엄마 입장에서는 인상을 쓰고 참았다하고 자식의 입장에서는 꺼름직하다 합니다.
상관은 남과 비교하며 양육하게 되니 자식을 경쟁으로 몰아세워 처음에는 공을 세우매 기특하다 하고 나중에는 패하매 어찌하냐 합니다. 식신은 조선에도 없는 자식 그져 금이야 옥이야 품으로 안아 길러 냈으니 처음에는 답답한듯 하나 나중에는 잘 삽니다.
식신에 도식이라는 것이 엄마의 젖이 부족하다는 표현을 한 것은 자식이 홀로 의관정대할때까지 홀로 설때까지 지속적으로 수유를 해주어야 하는데 젖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동량젖을 물렸다고 하고, 소나 양의 분유를 타서 먹이거라 애쓴 엄마사정입니다.
이를 거칠게 표현하면 자식이 스스로 숱가락질도 잘 못하는데 알아서 하라고 힘든 표정을 졌다는 것이고, 옷을 입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는데 알아서 옷을 챙겨 입으라 했든가, 엄마도 먹고 사니라 힘겨우니 귀찮게 하는 자식은 나쁘다 양육하기도 합니다.
편인 도식되면 엄마는 보호자의 역활을 열심히 하고, 자식은 보호와 양육속에 길러지고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데, 易하여 편인만땅 도식되면 오히려 엄마가 보호자 보다는 자식이 되어 보호와 양육속에 있지 못하면 안절부절을 못하시니 안타까울뿐입니다.
편인 도식되면 자식은 일찍이 정성맛보다는 입맛이 좋았었는데, 엄마는 입맛보다 정성맛에 끼니를 때우시니, 이도 易하여 식신만땅이 도식되면 입맛을 즐기면서도 정성맛을 따지게 되니 변덕이 하루에도 열 두번도 더 바뀌니 그 비유맞출 길이 없기도 합니다.
푸른소금이라는 영화를 보니 이런 대사가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세상에 가장 좋은 세가지 금이 "황금"이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소금"이고, 세번째가 "지금"이라 합니다. 식신은 지금이 중요한데 편인은 늘 과거와 오지도 않을 미래에 전전긍긍합니다.
지금 행복하면 이는 과거가 될 것이고, 또한 쌓이다 보면 미래에 지금도 될 것인데, 참 식신다운 낙천적인 지금입니다. 편인은 지금을 맞추지 못하니 늘 과거에 머물러 전전긍긍하고, 오지도 않을 미래를 우려와 걱정으로 살아가니 지지리 궁상이라 합니다.
식신의 낙천적인 사람 옆에, 편인의 지지리 궁상이 도식을 한다고 가장을 해보면 이것이 자식과 엄마의 입장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져 함께 지금을 즐기면 되는데 오죽하면 밥그릇을 엎는다는 도식으로 표현을 했는지 이해하고 납득이 갈만 합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잔상이 남지 않는다는 것은 식신과 같아 몸에 배여 살에 대한 대처능력을 가지게 한다면, 편인 도식이라는 것은 골수를 파고 들어 뼈에 사무치는 말과 같아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업장과 같은 징크스를 스스로 가지려는 어리석음입니다.
교육이나 상담을 하여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면 물과 같은 평이함으로 샘물을 마셨으니 목마르지 않았다는 것이고, 독한 알콜은 먹을때도 쓰지만 휴우증도 남으니 물보다 비싼값을 주고도 아깝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 개인이 정한 양심의 룰이기도 합니다.
도식은 걱정과 우려로 마음으로 전전긍긍하지 말고, 그져 뒤도 앞도 보지 않고, 당신 앞에 놓여진 상황이 최선이고, 당신 앞에 놓여진 인물이 최선이라 여기고, 지금 이순간 놓여진 환경과 사람이 만족하고 환하게 웃을때 까지 열심히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출처 : 도식(倒食)에 대하여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