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일주와 간지가 같은 복음 대운과 세운에 대해서도 귀한 말씀 부탁드리면 안될는지요?
그런 시기에는 대개 어떤 상황들이 벌어지는지요?
보통 위험한 시기라도들 하는데 어떻게 대처하면 좋은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주와 간지가 같은 것을 운에서 만나는 것을 대개 복음이라고 하나 봅니다. 대운은 월주를 기준으로 순행하기도 역행하기도 하며 오행에 상생상극에 영향이 있다면 세운은 년주를 기준으로 순행을 하며 길흉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년주는 사회와 외부에 접촉하는 나라고 한다면 월주는 사회적이고 직업적인 활동을 하는 나입니다. 일주는 인간관계 속에 접촉되어지는 개인적인 나라면 시주는 취미적이며 개인적인 개성을 가지려는 나입니다.
년월이라는 주어진 세상에서 일주는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취향을 가지고 인간관계로 도움을 주기도 받기도 하며 살아가는 형태로 살아가는 나입니다.
60갑자중에 일주와 동일한 운에 왔다는 것으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주와 운에서 만난 두가지 관점만 두고 업드려 신음한다는 복음살이라 표현하나 봅니다.
개인적으로 복음살에 대해서는 모르는 신살입니다. 대개 좋은 일이기 보다는 나쁜 일이 많다는 내용으로 귀동냥해 본적은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지 원인도 모르고 과정도 모르면서 결론을 내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아 궁리해보지는 않았습니다.
신살이라는 것도 연구해보면 분명 원인이 있고 논리가 있을 것인데 또한 과정이 있고 나타나는 현상이 있을 것인데 단지 일주와 운의 간지가 같다하여 복음살이니 나쁘다는 식의 적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개 신살이라는 것이 합충변화에서 생성되기도 간지의 순환적인 관점에서 차고 넘치고 비고 채워지는 이치에서 만들어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러한 순환과 합충변화 동비했을때 나타나는 것을 음양과 오행 상생상극으로 일주가 같은 것이 운로에 맞았을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설명해도 되는데 굳이 신살로 표현한 이유에 대한 당위성은 모르겠습니다.
결국 일간과 같은 간지의 운을 오행으로 볼 것인지 음양적인 관점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관점에서 생각해볼만하다 생각은 합니다.
가령 세운에 복음살이면 음양적인 관점에서 일주와 같다는 것으로 모든 내마음처럼 내 뜻대로 될 것 같기도 하고 내게 익숙한 현실에 부합하여 내마음과 동일하다는 기대감도 줄 것이고,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었던 일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려는 현실과 같지 않나 싶습니다.
사람은 본디 년월이라는 세상에 부합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한낱 일주라는 개인적인 편의에 의해 세상에 부합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에 대한 부작용을 설명하려 한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유추를 해봅니다.
보통 일간과 같은 세운이라는 것은 나와 동일한 시절이라는 것은 일간에 맞추어 무엇이든 할 수 있을것만 같고 이룰 수 있는 시절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저으기 개인적이라는 것이지 년월에 부합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이 내맘과 같다라는 것이 스스로 자아도취에 빠져 정체되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대개 사람은 나하고 싶은 것보다는 주어지는 현실에 부합하고 어려운 상황에 견디거나 이겨내고자 할때 대개 성장하는 국면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일주를 일간관계라는 것으로 설정한다면 가능한 상대에 맞추어 부합되어야 하는 내가 되어야 원만하지 나에게 맞추려 한다면 처음은 좋으나 결국은 내 맘같지 않으니 이산되고 분리되는 것이 인간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대운이라는 것은 오행의 상생상극적인 관점에서 일간과 동일한 복음인데 이는 단순히 너와 나라는 주체와 객체적인 관점이 아닌 상호 어떠한 상황설정에서 무엇을 도모하고 협조하고 이지러짐을 살펴야 함인데 단순히 일주의 동일함만 두고 길흉을 논하기 어려울것 같습니다.
외부적인 상황설정이 일간과 동일한 기운을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고, 필요치 않을 때도 있을 것인데 쉽게 부정적이라 단정하여 흉함을 논하기는 성급한 판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무식상 사주가 자기 명식에는 없었던 식상대운을 다 지나고 나면 어떤 양상이 벌어지는지도 궁금합니다.
=>무식상이라는 것은 일간이 생아자하는 육신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운로에서 맞았다는 것은 그 시절과 환경이 식상이 있는 분들과 어우려져 함께하며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을 간접 또는 직접적으로 경험을 하던 시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팔자에 없는 육신이라는 것을 운로에서 맞았다는 것은 그것이 나이기 보다는 타로서 살피는 것이 우선합니다. 육신은 살아가는 모양이나 역활과 같아 내 역활과 네 역활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 나는 인성과 일간이 있으면 상대는 일간과 식상이 있어 인나는 전략과 작전을 짜고 나식은 행동적인 경험치가 많은 팔다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인성과 일간 옆에는 반듯이 일간과 식상이 있는 분과 한팀이 되어 한사람은 머리쓰고 한사람은 손과 발이됩니다.
그러면서 인비는 탁상공론만 하다가 비식을 만나며 세상물정을 알아가고 경험하게 되고 역시나 세상물정과 경험은 있으나 전략과 작전이 미비에 통하지 않았는데 인비와 짝을 이루며 서로간에 상부상조하는 인간사를 그리게 되며 살아갑니다.
또한 팔자에 나는 관살이 있으면 운로에 식상은 하도급, 하청업체, 하위업체 서로 연계되어 납품을 주고 받는 관계로서 상호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관살은 식상을 받아들이며 융통성을 보이며 다양한 자회사로 부터 납품이나 연계되어 사업을 하는 것으로 확대되기도 축소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육신의 상극적인 관계 이외에도 팔자에 비겁이 식상운을 맞이하며 상호 협조하며 살아가거나 일하는 관계가 되는데 대개 가족이나 인간관계에 더불어 함께하기도 맘이 맞지 않는다 헤어지기도 하는 것으로 인간관계에 얽히고 설키는 문제를 대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팔자에 재성이 있는데 식상운은 재성을 관여하는 식상운이라는 것은 재성에 맞추어 식상이라는 능력을 빌려오거나 품목이 물건이거나 인물이기 쉬운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성가신 일로 분주하게 지내야 하는 세월이었음을 말합니다.
위에 식상운이라는 것을 객체로 하여 사주팔자에 있는 육신의 상호관계가 식상대운이 지나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식상운이라는 것은 대개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가며 인생의 산전수전을 경험하며 경험치를 쌓아가는 것인데 대개 시행착오도 많은 세월인데 지났다해서 잊는 것은 아닙니다.
식상운이 지나고 나면 대개 무모하게 앞만보고 열심히 살아왔던 세월에서 이제는 시행착오를 번복하지 않으려 신중하게 다시금 관망해 보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식상운이 지나 재성운이 이르면 넓고 넓은 세상에 아둥바둥 살아가는 자신을 보며 현실과 타협하는 세월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식상운이 역행으로 비겁운에 이르면 바둥되고 살았던 자신의 무모함에 안되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으로 재무장하려고 떠남이나 일선에서 다소 물러서 편안한 방법으로 경쟁력을 갖추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육신은 다만 설정이고 역활에 따른 소설이니 희기도 없습니다. 지나치게 확대한 감이 있으니 더이상 확대하지 않고 이정도의 한계선에서 그렇다라는 생각을 해보시는 것은 어떤가 싶습니다.
출처 : 복음(伏吟)에 대하여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