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 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2]
융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자기>Self와 <자아>Ego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자 기>는 우리의 생각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밑바닥에 깊이 놓여 있는 세계이다. 또 한 그 세계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자아>는 자기의 세계보다 훨씬 작은 세계이다. 그리고 의식과 분별의 세계이다.
자아는 자기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의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식으로서의 자아는 무의식으로서의 자기를 지각할 수 있을까? 그것은 꿈이다. 꿈은 무의식의 활동이 우리의 인식 속에 지각되는 현상이다. 자기는 끊임없이 자아에게 꿈의 상징들을 통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전하려고 한다.
이제 꿈은 자기와 자아가 만나는 접촉점이다. 나를 넘어선 세계와 나의 세계는 꿈을 통하여 이어진다. 그래서 융은, 꿈이야말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 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3] 그렇기 때문에 꿈의 언어를 잘 이해하는 길이 저 심연에서 고요히 놓여있는 자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자기와 자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한 등산가가 융을 찾아왔다. 그 등산가는 어느 날 밤 높은 산의 정상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자신의 꿈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융은 그 꿈을 다 듣고 등산가의 앞에 닥쳐올 위험을 알았다. 그리고 융은 꿈이 주는 경고를 강조하여 그에게 스스로 등산을 자제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등산 중에 발을 헛디뎌 "허공으로" 낙하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아의 미래를 감지하고 그것은 꿈으로 전달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등산가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의식적인 이성이 자신의 미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 컴컴한 순간일 지라도, 인간의 무의식은 정확히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4]
융에게 있어서 <자기실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자아>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 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원형의 세계에서 뿜어내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 그 것이 융이 말한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융에게 있어서 삶은 자아가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은 바다 위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 천 해리 깊이를 가진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 는 여정이다.
하지만 중심으로 향해 가는 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특히 상징과 신화의 언어를 상실한 현대 일수록 자아가 자기를 찾는 여정은 그만큼 힘겨워진다. 왜냐하면 분화된 의식으로서의 자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세계를 내동댕이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과 신화의 상실은 자기 상실이다. 이러한 상실의 시대를 가로질러 어둠의 세계인 자기의 세계를 빛의 세계인 자아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과정 이 깨달음의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실로 그 깨달음의 과정은 한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융은 더 나아가서 인류의 문명 또한 기나긴 깨달음의 과정으로 본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인류를 한 개인으로 볼 때, 우리는 인류가 무의식의 힘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과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5]
인간은 문명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들을 거쳐 서서히, 그리고 힘들여 의식 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가 온전히 완성되기에는 아직은 거리가 멀다. 저 안개와 같은 인간 본성의 허다한 부분이 아직 어둠에 쌓여 있다. 그 자아의 세계는 빛이 닿지 않는 무한한 자기의 세계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세계일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은 자연이 획득한 매우 새로운 것이어서 그것은 아직도 실험적 상태에 있다. 실로 의식은 불완전한 기능이다. 이렇듯 인류는 험난한 진화의 과정 을 통하여 자아의 세계를 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아는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인류는 무의식의 힘에 의해 이끌리고 있고 무의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융은 원형Archetype,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 개성화Individuation, 그림자Shadow, 아니 마Anima, 아니무스Animus 등, 다양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개념을 사뭇 조심스럽게 선보인 다. 사실 융이 인류를 향해 새롭게 선보인 개념은 몇 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개념은 앞으로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왜냐하면 그의 개념은 이론가의 책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철저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진지한 숙고의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일생동안 수만 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았다. 그리고 융은 분석가나 이론가이기 이전에 '영혼의 의사'로서의 순결한 사명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삶 가운데서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서 삶의 목적은 "환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고 보존하여 환자가 그의 생애를 그 자신의 뜻의 따라서 살도록 하는 것"[6]이었기 때문이다.
환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은 "병든 의사만이 치료할 수 있다"는 융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융의 삶은 환자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삶이었고, 환자의 고통과 같이 하는 삶이었다.
한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에 대한 융의 사려깊고 진지한 노력은 그의 삶의 여러 곳에 스며있다. 특히 환자의 꿈에서 드러난 상징을 분석가(分析家)가 해석하는데 있어서, 환자의 <상징>과 분석가의 임상 결과 에서 일반화된 <의미>를 쉽게 대응시키지 말라고 융은 당부한다. 융은 상징을 연구하는 데 반 세기 이상 을 보내 온 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징과 그 상징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분석가 개인의 일반화된 이론을 미련없이 버려야 함을 강조한다. 회색 이론은 삶을 찢는다. 오히려 "나는 환자의 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7]는 자세로 환자를 만나야만 한다고 말한다. 환자의 상징은 환자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환자의 삶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야만 그 상징의 의미가 올바로 드러난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융에게 있어서 꿈 해석의 보편적인 규칙은 없었다. 환자의 삶만이 유일한 해석의 경전이 되었던 것이 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환자는 자신의 이론의 적용대상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의 대상이 되었 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만이 유일한 현실이다."[8]
이러한 융의 자세는 이후 프로이트와 영원히 결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꿈해석에 있어서 보편적인 이론을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융은 인간 그 자체에 관한 이해 위에서만 꿈의 해석이 가능 하다는 점에서 화해할 수 없는 견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동시성 현상
융의 일생은 정신의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신의 불멸과 맞닿아 있는 '신의 문제'와 정신의 사멸과 맞닿아 있는 '죽음의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1959년, 융은 영국 방송공사(BBC)의 죤 프리만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프리만은 융에게 신을 믿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영국의 수많은 시청자들은 융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며 긴장하였다. 융은 차분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신을 압니다." 저 대답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우 리는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신의 세계까지도 접근해 들어간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 까. 마치 바울이 그러하였듯이(갈라디아서 2:20), 융은 자신으로부터 ?레야 떼어낼 수 없는, 마음 안에 내 재하는 신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융은 자신의 삶 가운데 죽음을 아주 가깝게 체험하곤 하였다. 실제로 융은 죽은 자를 만나기도 하였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융은 기이한 환상을 경험한다. 융은 밤중에 깨어 전날 장례를 치룬 친구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융은 죽은 친구가 방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친 구는 수 백 미터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융을 데려갔다. 융은 그 친구를 따라갔다. 그리고 친구는 서재에서 적색 표지의 책 한 권을 가리켰다. 너무도 기이한 체험이어서 융은 다음날 아침 죽은 친구의 서재를 직접 찾아가서, 환상에서 가리킨 적색 표지의 그 책의 제목을 확인해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死者의 유산>이었다.
융은 실제로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說法>[9]을 마흔 한 살이 되던 1941년에 개인적으로 내놓았다. 이 설법은 죽은 자들이 질문을 하고 융이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문헌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융은 죽은 자와의 대화를 하였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문헌은 융이 죽기 바로 전에 어렵게 세상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결론부에 있는 글자 수수께끼인 아나그람마(Anagrama)는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암호의 열쇠를 공개하지 않고 융은 죽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상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 번 왔었다는 느낌, 혹은 현실에서의 이 순간은 언젠가 꿈에서 한 번 보았던 순간 같은 느낌을 자주 경험 한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이러한 기이한 느낌을 자주 체험하기 때문에 앞으로 그 체험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려 한다.
물론 본인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위와 같은 경험을 자주 듣곤 한다. 융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융의 삶의 대부분은 이러한 환상과 희귀한 체험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10]
어느 날 융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순간 뒷머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권총자살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총알은 마침 융이 심한 통증을 느낀 부 분에 박혀 있었다.
1918년 융은 영국인 수용소의 지휘자로 있으면서, 자기(Self)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像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 그림은 황금의 성 모양을 한 만다라였다. 얼마 뒤에 리햐르트 빌헬름이 융에게 보낸 책 안에는 융이 그렸던 만다라 그림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융은 이러한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의 의미 있는 일치를 동시성(Synchronicity) 이론[11]으로 부르고, 이와 같은 정신현상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한다. 사실 융이 최초로 이론화한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 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의 정신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12]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융의 저 이론 에 대하여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13] 실로 융에게 있어서 텔레파시나 예언현상은 신비한 체험이나 주관적 환상이 아니라 자명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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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마음의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門)이며 그 문은 저 우주의 태고적 밤을 향하여 연다. 그것은 아직 자아의식이 없던 시기의 마음이었고 자아의식이 일찍이 도달할 만한 곳을 훨씬 넘어서 있는 마음이 될 태초의 밤이다.[20] - 칼 구스타프 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