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明成皇后]
양력 : 1851년 10월 19일 / 음력 : 1851년 윤8월 25일
77 67 57 47 37 27 17 07 -- 火 土 木 火 / 金 / 火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 戊 戊 戊 己 / 辛 / 己 : 45세 坤命
午 巳 辰 卯 寅 丑 子 亥 --- 午 申 戌 丑 / 亥 / 丑 - 年空(寅卯) 日空(寅卯) 命宮(己丑)
疾 遷 官 福 貌 命 財 兄 --- 시 일 월 태 / 연 / 命
=> 식상용재격에 金旺하여 洩侮克설모극하는 水木火 희신이고 土가 기신이다. 火金은 상황 따라서 희기가 다른데, 土와 조합되면 흉하다.
* 08세 己亥대운 戊午年에(1858년)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외동딸이다.
=> 胎와 月이 기신이고 己亥대운 土克水하고 戊午年 火土가 강한 채 土克水하니 흉년이다.
* 16세 己亥대운 丙寅年(1866년. 고종 3년) 3월에 부대부인 민씨의(府大夫人閔氏)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고종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했다.
=> 격국과 관계없이 土일주는 木이 용신이다. 己亥대운 丙寅年은 木旺한 해이다.
* 21세 庚子대운 辛未年에(1871년. 고종 8년) 자신이 낳은 첫 번째 왕자를 5일 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대원군과의 불화는,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完和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데서 시작되었는데,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 庚子대운은 자녀성 庚金이 사지에 든다. 辛未年은 기신 土金運이고 土克水로 도식한다.
* 23세 庚子대운 癸酉年에(1873년. 고종 10년)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한 명성황후는 앞서 대원군을 탄핵한 바 있는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삼고, 그해 10월 26일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소(疏)를 올리게 했다. 이때 조정의 의견이 서로 달랐지만 그녀는 최익현을 감싸고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원군은 양주 곧은골[直谷]로 물러나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 실각 후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 水旺한 해이다.
* 24세 庚子대운 甲戌年(1874년. 고종 11년) 03월 25일에 순종 탄생.
=> 용신이자 식상인 水가 旺한 해에 임신했다.
* 26세 庚子대운 丙子年에(1876년 고종 13년) 강화도 조약을(조일 수호 조약)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 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 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 호운이다.
* 31세 辛丑대운 辛巳年에(1881년. 고종 18년)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 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 청국 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 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 辛丑대운은 달가운 대운이 아니다.
* 32세 辛丑대운 壬午年(1882년. 고종 19년) 06월 05일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그녀를 비롯한 민씨 척족은 이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기울었고,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07월 31일 대원군이 청나라 군대에 납치됨. 8월 1일 명성황후 귀경함.
=> 壬午年은 용신 壬水가 투간한 해이다.
* 34세 辛丑대운 甲申年(1884년. 고종 21년) 10월 17일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청의 도움으로 이들을 3일 만에 제거했다.
=> 甲申年은 식상견관하므로 흉년이다.
* 35세 辛丑대운 乙酉年에(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을 일으키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교섭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했다. 이에 청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의 환국을 주선하여 민씨 척족 세력과 정권다툼을 벌이도록 유도했다, 대원군이 청국에서 풀려나 귀국함.
=> 乙酉年은 상관견관하므로 흉년이다.
* 1894년 01월 10일 고부에서 동학 민란 발생.
* 44세 壬寅대운 甲午年에(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그녀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에 대항했다. 더욱이 3국 간섭으로 일본의 대륙 침략 기세가 꺾이자, 러시아의 힘을 과신하여 친러 경향을 더욱 굳혔다. 갑오경장.
=> 甲午年은 천간은 길하니 지지는 흉한 해이다.
* 45세 壬寅대운 乙未年(1895년 고종 32) 01월 29일 :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등의 동학 농민군 지도자 교수형.
* 45세 壬寅대운 乙未年(1895년 고종 32) 10월 08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조선 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명성황후와 그 척족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 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玉壺樓)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사후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다.
=> 乙未年은 정관년으로 원국의 辛金 상관에 의해서 상관 견관된다.
77 67 57 47 37 27 17 07 -- 火 土 木 火 / 金 / 火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 戊 戊 戊 己 / 辛 / 己 : 45세 坤命
午 巳 辰 卯 寅 丑 子 亥 --- 午 申 戌 丑 / 亥 / 丑 - 年空(寅卯) 日空(寅卯) 命宮(己丑)
疾 遷 官 福 貌 命 財 兄 --- 시 일 월 태 / 연 / 命
* 47세 壬寅대운 丁酉年에(1897년)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 주택궁 월지와 申酉戌 金方을 이룬다.
* 48세 癸卯대운 戊戌年(1898년) 02월에 대원군이 사망했다.
=> 戊戌年은 흉년이다.
* 69세 乙巳대운 己未年(1919년) 01월 21일에 남편 고종 사망했다.
=> 乙巳대운은 상관 견관하는 대운이고, 己未年은 흉년이면서 남편성 甲木이 입묘한다.
* 69세 乙巳대운 己未年에(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 주택궁 월지와 丑戌未 삼형을 이룬다.
* 76세 乙巳대운 丙寅年(1926년) 04월 24일에 아들 순종 사망했다.
=> 乙巳대운은 상관 견관하는 대운이고, 寅午戌 火局으로 시주 자식궁이 동하면서 寅巳 형살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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