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과 사주의 관계 관상은 사주와 관계가 깊다.
즉 부귀할 사주를 타고난 사람은 부귀할 상(相)을 지니게 마련이고, 사주가 미천한 사람은 보잘것없는 상을 타고 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내적인 사주와 외적인 상은 대부분 서로 호응하면서 비슷하게 작용을 한다.
사주와 상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숙명적인 운(運)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고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사주에서는 태어난 연. 월. 일. 시로 인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으로 소운(小運)정도의 변화는 가져올 수 있으나 운명이라는 큰 흐름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연월일시가 바뀔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로는 "사주가 상만 못하고 상이 마음의 쓰임새를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개인의 운명은 바뀔 수 있다. 상학에서도 마음을 어떻게 쓰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상과 운명이 달라질 수 있을 뿐더러, 때로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물길을 바꾸게 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사람이 살아가는 운의 방향을 보는 데는 사주가 긴요하지만, 사람 됨됨이와 그릇의 크기[局量]를 가늠하는 데는 상학만큼 정확한 것이 없다.
다양성에 있어서도 사주는 상학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사주는 정해진 문자로만 추론하는 간접적인 것이지만, 관상은 변화무쌍한 실상(實相)을 논하는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한 날 한 시에 태어나 같은 사주를 지닌 사람들은 많지만, 상은 사람마다 한 명도 같은 이가 없이 모두 다르다. 쌍둥이의 경우에도, 사주는 같지만 상으로 보았을 때는 분명 다르다. 따라서 사주학은 통계학이지만, 상학은 개체학에 가깝다.
옛 기록에도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 장군과 도적, 정승과 사공으로 운명이 갈라진 예들이 무수히 많다. 사람마다 천성과 마음씀이 다르고, 그것이 반영된 상이 다른데, 어찌 운명이 같을 수 있겠는가.
명나라 때 태조인 주원장(朱袁章)과 동시데에 살았던 사람으로, 주원장과 사주가 같았던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중원의 갑부 심만섭이었고, 또 한 사람은 거지대장 조목탁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사주는 같지만 상이 서로 달라서 주원장은 사람의 우두머리인 인중지왕(人中之王), 심만섭은 재물의 우두머리인 재부지왕(財富之王), 조목탁은 거지의 왕인 걸개지왕(乞개之王)의 자리에 각각 올랐던 것이다.
무엇보다 상은 사주와는 달리,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실제의 삶과 밀착된 분야라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적극적이고 왕성한 것이 대세를 지배하게 마련이다. 선천적으로 정해진 한 수원지에서 두 줄기의 물살이 잔잔하게 같은 방향으로 흐르다가, 한쪽의 물살이 왕성한 기운으로 방향을 잡아 나아가면 다른 물살은 기운찬 곳으로 합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주나 상학을 공부하면서 주어진 운명과 천성에 안주해버리면 그야말로 생긴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어 공부를 하지 않음만 못하다. 이런한 공부를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기운을 잘 파악하여, 이를 스스로 조절하고 헤쳐나가는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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