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
2018-04-18 06:40:51조회수 : 1,140
【서울=뉴시스】안채원 기자 =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팠던 기억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옅어진다는 의미다. 어떤 기억은 오래 붙들고 싶어도 어느새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곤 한다. 고통스럽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을 견디고, 한편으로는 망각되지 않도록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초 참사의 생존자인 김도연(21)양이 그렇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던 지난 14일, 도연양을 만났다. 긴 검은색 생머리에 체크무늬 웃옷과 밑단이 찢어진 청바지로 멋을 낸, 영락없는 20대 초반 대학생이었다. 도연양은 전날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고 왔다고 했다. 모두 도연양과 같은 생존 학생들이다.
"매번 그렇지만, 유독 이번에 힘들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4월이 되자마다 울었다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도연양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4월은 몸이 먼저 반응하는 달"이라고 했다.
"두통이나 위염이 심해져요. 몸이 먼저 알고 반응한달까요. 어느 순간 예민해져있고 날카로워진 걸 느끼고 내가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면 '아, 4월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몸 뿐만이 아니다. 세월호는 도연양의 머릿속에서도 생생하다. 당시 도연양은 세월호 3층 로비에 있었다.
"휴대폰을 떨어뜨린 친구가 휴대폰을 주우러 가던 중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고 그 친구를 따라 가던 저도 중심을 잃고 넘어졌어요. 순간 당황했는데 둘이 눈이 마주쳐서 웃었어요." 이미 배가 기울어져있을 때였다.
머지않아 두번째 충격이 오자 "모두가 배 안에서 날아갔다"고 한다. 도연양은 화물칸에 있던 사람의 도움으로 배 안에서 40~50분을 기다렸다. 해양경찰이 왔다가 갔지만 잠시 지나칠 뿐이었다. "나중에 영상을 보니까 그 해경정은 조타실에 가서 선원들을 태웠더라고요."
도연양은 "뛰어내리라"는 '승무원 언니'의 말에 맨몸으로 배에서 뛰어내렸다. 수영을 해 대기하고 있던 해경보트에 올랐고 어선으로 옮겨타 팽목항에 도착했다. 초반 탈출자 중 한 명이었다. 구조가 된 후에는 친구들을 기다렸다.
"차례로 탈출해 온 친구들을 보면서 친한 친구들을 봤냐고 물었어요."
그중에는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고(故) 김도언양도 있었다.
도연양과 도언양은 중학생 때부터 4년간 친하게 지낸 단짝친구였다. 문과를 택한 둘은 수능 선택과목까지 맞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같은 반이었다.
"이름도 비슷해 학교 선생님들은 우리를 여자쌍둥이라고 불렸어요. 함께 어울리던 남자쌍둥이 형제까지 일컬어 우리 넷을 가족 같다고도 했고요."
가족 같은 친구가 생존자 명단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진도체육관에서 마이크 너머로 더 이상 추가 생존자는 없다는 해양수산부 관계자의 말을 들었을 때 도연양은 '기적'을 떠올렸다고 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이 어떤 외딴 섬에 가있지 않을까. 물이 들어오지 않는 커다란 풍선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을까. 거기서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새벽까지 이어지는 오보는 도연양을 더욱 힘들게 했다. 도연양은 "이름이 비슷했던 터라 도언이 이름도 수십번 떴다"라며 "도언이 부모님께 가장 죄송한 부분"이라고 했다.
"도언이 부모님은 그때문에 수십번의 기적을 상상하셨을 테니까요." 말을 하는 도연씨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꿈에서 맴돈다. 도연양은 잠을 잘 못잔다고 했다. 사고 이후 반복해서 꾸는 꿈 때문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끝 장면까지, 계속 같은 꿈이다.
"사고 직전 친구들과 장난을 치던 장면부터 시작해요. 그리고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죠." 햇수로 3년째, 자주 잠에서 깨는 이유다.
여전히 생생한 사고의 기억과 꿈에서도 나타나는 장면들로 힘들지만, 도연양은 단단해보였다. 도연양은 자신이 대학에 진학한 후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도연양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생각보다 주변에서 세월호를 많이 기억하고 부정적인 반응이 많지 않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라면서 "생존자로서 세월호 사건에 대해 갖고 있는 수많은 의문들이나 생각들이 공유되지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학교 '416호' 강의실에서 모이자는 연락을 받았는데 저에게는 그게 '사일육' 강의실로 읽히는데, 누군가에게는 '사백십육호' 강의실이라고 읽히는, 그 괴리가 있었어요. 동기와 저 사이에 세월호를 느끼는 차이가 있으니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었죠. 당시 세월호 2주기였는데 그때 불거진 대학 '특례' 문제나 유가족을 향해 '이제 그만해라'는 반응도 두려웠고요."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도연양은 학생회에 참여하고 작년까지 과 부과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도연양은 "사람들과 활발히 만나고 페이스북 친구를 맺는 등 내가 먼저 다가갔다"고 했다.
"친구들이 저에게 '나 궁금한 게 있는데'라고 물어보면 '말해달라'고 했어요. 그 물음을 듣고 답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이야기했고요." 세월호를 제대로 알리고 부정적인 인식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었다.
"내가 곧 세월호 생존학생을 대표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잘하면 생존학생들이 잘한 것이고 내가 실수하면 생존학생 모두의 문제로 비춰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주변에서는 도연양과 함께 '행동'하는 대학 친구들이 많다고 했다. 도연양은 "함께 세월호 다큐멘터리를 보러가고 제에게 응원을 해준다"고 했다. 그 친구들 덕에 세월호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것 같은 사람은 으레 피했던 것도 이제 옛 이야기가 됐다.
"예전에는 세월호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만 세월호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는 크게 개의치 않아요. 제 주변 친구들의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거든요.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을 뿐, 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해요."
떠나보낸 친구들을 대하는 마음도 미세하게 달라졌다. 도연양은 "저번주 토요일 안산에 있는 '기억교실'에 갔는데 웃음이 나왔다"라며 "우리가 떠난 친구들에게 1년 전에 썼던 편지가 웃기고, 사진 속 아이들의 표정이 한결 같은 것에도 미소가 지어졌다"고 했다. 도연양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다 '감사함'을 언급했다.
"여전히 사진과 편지를 보면서 울기도 하지만 이제 마냥 울진 않는 거죠. 처음엔 그걸 보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이제는 이런 흔적이 남아있고 추억할 수 있다는 것, 이조차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니 흐릿해진 기억에 훔칫 놀랄 때도 있다. 도연양은 "예전에는 당연히 기억했을 친구들의 자리를 콕 짚어 이야기할 수 없을 때, 그 친구가 우리반이었는지 옆반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더라"라며 "내 머릿 속에서 친구들이 잊혀지는 걸 깨달았을 때 죄책감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도연양은 친구들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다잡는다. 벌써 수만번을 돌려보았을 영상과 사진을 매일 본다. 친구 특유의 발음이나 미소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스무살 겨울에는 왼쪽 팔 아랫쪽에 문신을 새겼다. '20140416'이라는 아라비아숫자가 선명한 문신이다.
"엄마가 로마숫자 등으로 좀 멋을 내보면 어떻겠냐고 했는데 저는 누가 봐도 딱 세월호를 의미한다는 걸 알게 하고 싶었어요." 오른팔을 조금만 들어도 보이는 곳에 문신을 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도언양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본 뜬 그림이 있는 휴대폰 케이스 제작을 의뢰해 받았다. 2014년 수학여행 가기 며칠 전, 레크레이션 시간에 선보일 춤 연습을 할 무렵이었다. 도연양은 "나를 위해서 한 것"이라고 했다.
"사진 속 단발이던 저는 어느새 머리도 길고 많이 달라졌는데 도언이는 아직도 단발머리에요. 그런 여전한 모습을 보는 것도 좋고, 친구로서 미안한 마음을 덜기도 해요."
잊기 힘든 기억을 매일 마주하고, 잊고 싶지 않은 친구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도연양은 4주기를 맞는 '의문'을 함께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생존학생들은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구조된 게 아니라 탈출했다고 말해요. 왜 사고가 아니라 사건인지, 구조가 아니라 탈출인지 한번쯤 모두가 의문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그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 의문을 풀고 싶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생길 테고 그 한 명이 우리와 함께할 거라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