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택의 개요 및 원리

비보,결언

햇님달님 | 2017-09-30 07:16:25

조회수 : 1,542

 

고성군 대가면 우산리(牛山里) 외우산(外牛山)
 
    ㉮ 마을 개황; 현재 마을을 이루고 있는 함안이씨, 성산이씨의 조상은 약 500여년전에 이
         마을에 입촌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여러 성씨가 거주하며 98가구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 입지; 마을 뒤의 산세가 소가 누워있는 것처럼 생겼으므로 소슬산 혹은 우산(牛山)이라
         하였다. 행정마을로 내우산․외우산․상촌 마을이 있다. 내우산은 암소슬이라고 불렀으니
         암소에서 비롯된 말로 골의 안쪽 마을이고 외우산은 바깥 마을이다.
    ㉰ 비보위치 및 형태; 마을 앞에 4천여평의 못을 파고 못둑에는 숲을 조성하였으며, 우산숲
        동산에는 동제탑으로 돌탑이 모셔져 있다. 연못은 현재 규모가 절반정도로 축소되었다.
    ㉱ 비보동기 및 기능; 와우형(臥牛形)의 마을 형국상 못을 파는 것이 좋다고 하여 조성한
       것이다. 우산못은 소의 죽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못에 물이 많이 차면 소의 먹이가
       많아 마을에 부가 오리라고 믿고 있다. 연못 앞으로 숲이 있는데 이것은 와우형 형국에
       소꼴의 상징을 지닌다.
 
․ 함안군 가야읍 설곡리 월성동 소실
 
    ㉮ 마을 개황; 김해 김씨 동족촌으로 총 130여 가구 중에 70여호가 김해 김씨다.
    ㉯ 입지; 마을 이름이 소실[牛谷]으로, 풍수적인 형국이 지명이 되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소가
         드러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말한다.
    ㉰ 비보형태 및 위치; 소는 풀과 물이 있어야 하므로 소의 입에 해당하는 동구(洞口) 모서
         리에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 구시로 삼았으나, 5,6년 전에 경지정리 과정에서 없어졌다.
 
3. 맺음말
    진주, 영산, 창녕, 함안 고을의 주민들은 형국적으로 고을의 지세를 해석하고 그 체계에 상응
    하는 비보경관과 문화를 창출하고 있었으니 진주의 죽림과 영산의 쇠머리대기 놀이, 창녕의
    비보못과 함안의 비보숲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고을의 비보경관은 비보대상적 측면, 형태적 측면, 기능상의 문제, 발생적인 측면으로 살펴
    보았는데, 대상적 측면에서 국역비보사탑인 진주 영봉산 용암사와 고을비보사탑으로서 김해
    고을의 흥무암, 밀양고을의 만어사와 억석암 등의 비보사탑 현황을 살펴보았다. 형태적
    측면으로는 지면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는데 사탑, 숲, 조산, 못으로 대표될 수 있으며 각각의
    풍수적인 기능을 분류하고 사례별로 비보지점, 기능, 출처, 현황으로 요약 정리하였다. 그리고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지세비보, 흉상압승, 보허, 수구막이 등으로 분류하여 보았다. 그리고 풍수
    비보경관 이전에 존재하였던 마을지킴이로서의 토속 신앙물이 풍수 수용 이후에 비보물로 기능
    하는 점을 유의하였다.
    경남의 향촌민들도 풍수가 말하는 이상적인 거주공간을 찾아서 취락을 조성하는 한편 삶터
    에서 보이는 풍수적 결함은 비보를 통하여 길지(吉地)로 가꾸어 나갔으니 고을에서와 마찬
    가지로 다양한 비보경관이 드러났다. 경남 지역의 40여 마을에서는 마을지명이 풍수적인
    형국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삶터를 풍수 명당의 형국에 근접하여
    인식하려는 향촌민들의 의식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놀이라는 문화적 매개를 통해서 지세의
    풍수적인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 사례도 함안군 칠원면 용정리의 줄다리기에서 알 수 있었다.
 
    마을의 비보는 수구막이가 많았고 그것은 지기의 누설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 밖에도 지세
    보허, 형국 보완, 음풍방어 등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조산과 숲, 못을 조성한 마을이 매우 많았다.
    밀양시의 다죽리에서는 마을의 지기를 보전키 위하여 인위적으로 개울이 마을을 감돌아 나
   가도록 수로를 조성한 사실도 확인 할 수가 있었다. 함안군 동촌리 서촌마을에서는 마을터의
    좌청룡 산자락이 짧은 지세적인 문제점을 산에 잇대어 숲을 조성함으로써 풍수적인 장풍
    (藏風) 조건의 구비와 함께 북서 계절풍의 방풍 효과도 겸해서 얻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오늘날 근대화 과정에서 대부분의 고을 비보경관은 소멸하고 없었다. 그러나 마을의 경우에는
    많은 수가 잔존하여 현재에도 마을지킴이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거나 심지어는 새로이
    조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함안군 유원리의 조산은 방치되고 있었으며 마산의 사동리 처럼
    도시에 근접하여 도시화가 진전된 마을일수록 비보경관은 사라지고 현재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한편, 공동체적 결속력이 큰 마을일 수록 비보경관은 보전되는 경향이 강하였으며
    특히 산촌의 오지에 있는 비보조산의 경우는 마을 제의 형태로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보아 비보경관의 지위는 마을 당산 보다는 낮은 격으로 취급되었다. 최근에도
    진주 가정리에서는 새로운 비보경관을 조성하는 사례도 발견되었다.
 
 

출처 : 풍수학 - blog.naver.com/ksks55555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150 Fun 다음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150 Fun 다음
© 원제역학연구원

select count(*) as cnt from g4_login where lo_ip = '3.145.10.80'

145 : Table './wonje2017/g4_login' is marked as crashed and should be repaired

error file : /m/bbs/board.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