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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은나라 때 동물의뼈에 쓰여진 갑골문자. 십간십이지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다. |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이 인기를 끈다. 한해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은 약하고, 더욱이 요즘처럼 세상이 어수선하다 보니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보기 위해 점에라도 기대보는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월드컵 결과에 관한 점까지 나오고, 텔레비전에 나온 무당의 말에 전 국민이 귀기울이는 기현상은 과학대국을 목표로 하는 한국의 실정에 비쳐보면 한심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점을 치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으레 신에게 부탁하거나 점을 쳤다. 여기에는 한결같이 운명은 초인적인 존재, 이를테면 신이나 하늘이 이미 정해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고대 중국 은나라에서는 노루, 소와 같은 짐승의 뼈를 이용해서 점을 쳤는데, 앞으로 10일 동안 있을 일을 뼈에 새긴 후 불에 구워 그것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길흉을 판단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점치는 방법은 점점 복잡해졌다. 점술인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일반인이 함부로 점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또 일반 사람은 점을 치는 방법이 복잡해야 신비함을 느끼고 더 믿는 경향이 있다. 점을 잘친다는 이유만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큰 벼슬을 하는 시대도 있었다.
60년마다 동일한 운명의 소유자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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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한해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토정비결과 같은 점들이 인기를 끈다. | 과연 어떻게 인간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일까. 우리 주위의 모든 자연에는 주기가 있다. 인간의 운명 또한 자연과 더불어 변해간다는 생각이 가능하다. 따라서 태어난 시점을 바탕으로 인간의 미래를 점치려 했는데, 동양에서는 이 방법을 ‘사주팔자’라고 한다.
사주란 년(年), 월(月), 일(日), 시(時)를 말하는데, 이 뒤에 두개의 글자로 된 ‘간지’가 붙어(4×2=8) 팔자를 이룬다. 간지에는 10간과 12지가 있다. 우선 10간은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붙여도 상관없겠지만,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로 부른다. 12지 또한 마찬가지로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라는 12종류의 동물 이름이 붙어있다. 사주팔자로 점을 친다는 것은 사주와 간지의 조합을 생각하면서 판단하는 것으로 상당히 복잡한 일이다.
천체의 운동 모양인 원은 생년월일을 생각할 때 편리한 도형이다. 원을 6등분한 다음 각 변을 2등분하면 12등분이 된다. 즉 시계에서 시간이 12등분 돼있는 것처럼 12지를 원의 둘레에 배열한다. 12지는 해마다 하나씩 뒤로 밀리면서 이 원을 돈다. 한편 10간은 수학에서의 10진법과도 관련되는데, 역시 해마다 하나씩 뒤로 밀린다. 예를 들어 신사년 뒤에는 임오년과 같은 방식이다. 10진법과 12진법을 합하면 60진법이 되는데(10과 12의 최소공배수가 60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0간과 12지를 합친 것이 바로 60간지다.
2002년은 임오년인데, 최소공배수인 60년이 지난 2062년이 되면 다시 똑같은 임오년이 된다. 그런데 하나의 사주팔자는 운명이 똑같이 결정된다. 따라서 사주팔자에 의해 인간운명이 정해진다면 60년 후에 같은 운명을 지닌 사람이 또 태어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세상이 계속 변해가는 모습을 사주팔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일반인도 손쉽게 볼 수 있어 조선 중종 때 역학자인 토정 이지함은 사주팔자를 잘 보았다고 한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자식 사주팔자를 보니 그다지 신통하지 않았고, 벼슬이나 장사를 해볼 만한 재간도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 점이라도 잘치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을텐데 복잡한 사주팔자를 해석할 만한 능력도 없었다. 결국 그는 사주팔자 보는 법을 간추려서 ‘토정비결’이란 책을 만들어 자식에게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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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은 괘가 1백44가지에 불과해 40명 중에 한명은 같은 괘가 나올 수 있다. 이럴 경우 꿈보다는 해몽과 같은 식의 변명이 준비돼 있다. | 토정비결법은 태어난 시간을 무시하고 해, 달, 일 3개만을 간추려 단순하게 계산해 점을 치는 방법이다. 사주에 비하면 단순해 어떤 사람이라도 쉽게 익힐 수 있다. 간략하게 생년월일, 즉 6자로 괘를 정하는 일은 초등학교의 수학 실력이라면 누구나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간단한 만큼 해마다 같은 괘를 얻는 사람 수가 사주팔자보다 훨씬 많다. 실제 토정비결의 괘 종류는 모두 합해봐야 1백44가지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인구를 5천만명으로 잡으면 약 35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해마다 같은 점괘를 갖는다는 얘기다.
초등학교 시절의 생일파티를 생각해보자. 같은 달에 태어난 사람을 모아 합동으로 잔치를 여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경우 때때로 같은 날에 태어난 사람이 한쌍 정도는 있다. 이런 일을 보고 성질이 급한 사람은 전생의 인연, 또는 같은 팔자라고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확률적으로 따져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보자.
우선 같은 학년이므로 모두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생각하자. 1년은 3백65일이고, 40명 정도의 학급에서 생년월일이 일치하는 학생이 한쌍 있을 확률을 구해보자. 적어도 한쌍의 학생이 생일이 같을 확률을 구하기 위해서 우선 40명의 아이들의 생일이 완전히 다른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
학급 학생 모두에게 1부터 40까지의 번호를 주고 생각하면, 처음 번호가 1인 학생이 3백65일 가운데 어느날에 태어나는 확률은 3백65분의 3백65, 즉 1이다. 틀림없이 일년 중 어느날에 태어난 것이므로 당연한 일이다. 다음 번호 2의 경우는 3백65일 가운데 1번의 생일 이외의 어떤 날에 태어날 확률은 3백65분의 3백64, 다음 3번이 1번과 2번의 생일 이외의 어떤 날에 태어날 확률은 3백65분의 3백63…, 마지막 40번은 앞서의 날짜를 제외한 3백26일(3백65-39일) 가운데 어느날 하나를 택하게 될 확률은 3백65분의 3백26이다. 학급의 학생 모두가 생일이 달라져야 할 확률은 이러한 경우가 동시에 성립돼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을 전부 곱하면, 결과는 약 0.1087 이다. 이것이 모든 학생의 생일이 완전히 달라지는 확률이다.
이제 이 결과를 통해 적어도 한쌍의 학생이 생일이 같을 확률을 구해보자. 특정한 하나의 사건 A가 발생할 확률을 P(A)라 하면 사건 A가 발생하지 않을 확률은 1-P(A)이다. ‘모든 학생의 생일이 다르다’는 사건을 A라고 할 때 A가 발생하지 않을 사건은 ‘적어도 한쌍의 학생이 생일이 같다’는 사건이다. 따라서 적어도 생일이 같은 한쌍이 있을 수 있는 확률은 10.1087… = 0.8912…, 즉 89%가 된다.
토정비결에 따른다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40명 중 같은 운명을 지닌 사람이 적어도 한사람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생년월일이 같은 사람은 항상 같은 운명을 갖는가. 이런 질문이 나오면 점쟁이는 새로운 변수를 내민다. 같은 생년월일이라도 시가 다르다, 또는 장소가 다르다는 식으로 운명결정 요인을 계속 늘려가는 것이다. 그러면 ‘쌍둥이는 같은 운명을 갖게 될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름이 다르다는 식으로 또다른 변수요인을 만든다. 뿐만 아니라 ‘괘보다는 해설’ 또는 ‘꿈보다는 해몽이 중요하다’는 식의 변명이 준비돼 있다.
이와 관련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이성계가 왕이 되자 아첨하는 신하들이 많이 나왔다. 어느 신하는 “임금님 나라를 얻은 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며 사주팔자의 덕택”이라고 그의 운명을 칭송했다. 그 말을 듣자 태조는 왕의 팔자를 타고 태어난 사람이 또 있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전국에 영을 내려 자신과 같은 ‘생년월일’, 즉 사주팔자가 같은 사람을 찾았다. 결국 한사람을 찾았는데, 그 사람은 강원도 산중에서 벌을 기르는 자였다. 그러자 그 신하는 “임금님은 만백성을 다스리는 팔자이며 그 노인 또한 많은 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팔자는 많은 신하를 거느린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싸한 변명이었다.
마술에서 과학으로 진리라는 것은 예외가 단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된다. 맞지 않는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며, 다른 예외적인 경우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여러분이 과학을 믿는다면 임금 노릇과 벌 기르기가 같은 진리의 결과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과학사에는 ‘마술에서 과학으로’라는 말이 있다. 흔히 주변에서 발견되는 돌을 금으로 만 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의 욕심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어느 세상에서나 나오기 마련이다. 돌이나 물질을 분석하고 약을 섞어 조합하면서 주문을 주절거리며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금은 아니더라도 무엇인가는 나올 것이다. ‘현대 화학’은 마술사와 같은 이런 연금술사의 지식이 모이고 체계화된 것이 큰 도움을 주었다.
또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면 무언가 신비스럽다. 이것을 이용해 세상의 변화를 알기 위해 열심히 행성의 움직임이나 혜성이 나타나는 시기를 계산하려 했다. 이런 일을 통해 얻은 지식이 체계화되면서 ‘천문학’이 형성됐다. 수학에서 중요한 분야로 알려져 있는 ‘확률론’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 도박장이다. 도박장에서는 항상 재수가 좋은 때와 재수 없을 때가 큰 관심사이다. 그러는 가운데 재수와는 관계없이 좋은 괘가 나오는 경우를 생각한 것이다. 위대한 과학자로 알려진 ‘뉴턴’도 연금술과 점성술에 관심을 보였다.
<김용운, 토정비결-과학인가 재미인가, 과학동아 2002년 1월호에서 발췌> 크게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