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역학이야기

김태서와 전주김씨

바른생활 | 2017-09-13 06: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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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와 전주김씨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본관은 전주김씨다. 전주김씨의 시조묘는 전주 모악산에 있다. 전주김씨의 선조는 본래 경주김씨였다. 그러나 여러 대를 내려오다가 고려 때 문장공 김태서(金台瑞)가 경주김씨에서 전주김씨로 분관하여 전주김씨가 된다. 그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의 후손이다.
 1928년에 간행된 족보를 보면 시조묘가 그려져 있는 전주 모악산 일대가 그려져 있고 시조가 김태서임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또 김태서의 32대 손으로 김일성의 본명인 <김성주(金成柱)>와 동생 <김영주>의 이름이 나와 있다.
 최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방북한 남한 언론사장단과의 오찬회동에서 "남쪽에 가서 그곳(시조 김태서의 묘가 있는 모악산)에 갈수 있으면 시조묘를 참배하겠다"고 밝혔다.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 제1권에서 "우리 가문은 김계상 할아버지 대에 살길을 찾아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한으로 들어왔다.만경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증조할아버지(김응우) 대부터였다"고 적고 있다.
김태서(金台瑞)는 고려 무인 집권기인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의 5왕조에 걸쳐 벼슬을 지냈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경주 일대를 폐허로 만들자 가족을 데리고 전주로 이주한다. 그가 전주군(全州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김태서의 아들 김약선은 무인정권의 집권자이던 최이의 사위다. 또 그의 딸은 원종비가 되어 충열왕을 낳았다.
 시조의 손자인 김혼은 고려 충열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왕을 대리하여 행성(行省)의 일을 맡아볼 정도로 총애와 신임이 두터웠다. 김태서로부터 시작되는 이 집안은 명종 이후 충열. 충선왕대에 걸쳐 고려에서 크게 번성한다.
김경(金敬)은 성종 10년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다. 그 뒤 전주에 있는 가족을 함경도 지방으로 이주시켜 함경도 전주김씨의 파조가 된다. 
 김경의 맏아들 김수산의 후계는 경원에 그대로 살았다. 김태서의 셋째 아들 김경손의 자손들은 영변 일대와 선천. 철산. 안주. 평양. 강서. 중회 등 대체로 황해도와 평안도 일원에 살았다.
 김경손은 고종 18 년 구주성 싸움에서 몽고군을 물리치고 공을 세웠다. 그는 또 고종 24년에 일어난 초적(草賊) 이연년의 난을 평정했다. 고종 36년 최이가 죽고 그 아들 최항이 정권을 장악한다. 최항은 김경손이 민심을 얻는 것을 시기하여 백령도에 귀양 보냈다가 2년 후 죽였다.
 한편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서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모악산 중턱에 있는 전주김씨 시조묘가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시조 김태서의 묘가 명당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이 묘소는 더욱 유명해졌다. 조상의 묘를 잘 썼기 때문에 후손이 빛을 보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전주김씨 집성촌은 거의 북한에 있다.  1930년 당시 전주김씨의 자손들은 함북 명천. 경성. 길주군 일원, 함남 영흥군. 흥남시 일원, 고원군 영동면, 문천군 문천면, 신흥군 원평면, 평북 초산. 영변. 강계군 일원, 자성군 중강면, 후창군 후창면, 평남 평양시. 평원군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남한에는 경상북도 의성군 신평면 청운리가 전주김씨 집성촌이다. 전주김씨는 2000년 현재 57,979 명이다. 그러나 북한의 인구를 합치면 이 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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