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초반에 2명의 유명한 관상가(觀相家)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백운학(白雲鶴)과 우종학(禹鍾鶴).
백운학은 종로 보령약국 뒤의 한옥 집에서 살고 있었고,
우종학은 화신백화점 뒷골목에 ‘운수우거처’(雲水寓居處)라는
조그만 팻말을 붙인 집에서 관상을 봐 주었다.
우종학의 생긴 모습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다가 눈이 칼날처럼 가늘고 길었다고 한다.
평안도 사투리를 쓰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신상문제를 정확하게 집어내곤 하였다.
그 사람의 장기 운세 쪽보다는 단기 운세를 적중시키는 주특기가 있었다.
지금 당장 당면한 문제를 집어내는 능력은
그 사람의 얼굴 찰색(察色) 여부와 관련된다.
우종학은 ‘찰색’을 잘 보았다.
관상에서는 얼굴의 특정 부위가 빛이 나면서 밝은 색을 띠는가,
아니면 어두침침한 색깔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그때그때 운세 여부가 달라진다고 본다.
우종학의 적중률을 경험한 고급 관료나 사업가,
명사들이 운수우거처에 자주 드나들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집 한 채 값과 맞먹는다는 백색전화가 여기에 놓여 있었는데,
그 백색전화는 체신부 장관이 우종학에게 선물한 것이었다고 한다.
삼성 이병철 회창의 친형인 이병각씨도 자주 우종학에게 놀러왔다.
이병각 본인이 관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관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동생(이병철)은 요즘 관상 연구에 몰두해 있다.
시간 날 때마다 항상 관상서(觀相書)들을 들여다본다.
일본에 갔다 오면 일본에서 나온 관상서들도 많이 사가지고 온다”는 것이었다.
일본 관상서들은 간단하게 요점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보기에 편하다.
우종학이 가지고 있던 관상책들도 형인 이병각을 통해서 이병철에게 전달되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병철은 오랜 세월 동안 관상의 이론과 실전에 대한
내공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관상내공’(觀相內功)이 삼성의 신입사원 채용이나
간부직원 승진과정에서 일정 부분 작용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병철이 선호하였던 관상은 단정(端正)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단정한 관상은 정직하고 배신을 하지 않는다.
오늘날 삼성의 성공 뒤에는 창업자의 관상내공도 한 몫 하였다고 본다.
출처 : 이병철과 觀相 - cafe.daum.net/dur6f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