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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성 국회의원 임영신[任永信] 사주
Mr.대산 2017-10-06 (금) 09:25 조회 : 1878

임영신[任永信]

양력 : 1899년 12월 20일 20시
음력 : 1899년 11월 20일 20시

시 일 월 년
乙 甲 丙 己
亥 子 子 亥

76 66 56 46 36 26 16 6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乙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임영신[任永信]

1899.12. 20. 충남 금산 ~ 1977. 2. 서울.

교육자·정치인. 호는 승당(承堂). 1899년 충남 금산에서 12남매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많은 식구들이었지만 다행히 부잣집이여서 먹고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공부하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아버지의 반대가 앞을 가로막았으나 단식을 하면서까지 기어코 전주 기전여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졸업 후에는 충남 천안의 양대국민학교에 교사로 재직했다.

1919년 --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다 붙잡혀 6개월간 옥살이 함. 6월에 집행유예로 석방됨.

몇 달 후 일본으로 건너가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히로시마 여자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후 1921년 다시 귀국하여 공주 영명여학교 교사로 재직한다.

그러던 중 두 오빠가 가 있는 땅 미국으로 건너간다. 어렸을 적부터 미국은 임영신에게 꿈을 주고 환상을 주었던 나라였다. 하지만 단순히 환상만을 품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품속에는 관동대지진때 무참히 학살당한 조선인들에 관한 자료가 있었다. 미국 임시정부에 있는 이승만에게 그것을 전해주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던 것이다.

1930년 --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을 거쳐

1931년 -- 동대학원을 수료했다.

1937년 학교가 운영난에 빠지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한순교라는 사람과 결혼하지만 1년이 지난 1940년 혼자서 귀국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그녀의 아주 짧은 결혼생활은 끝이 난 것이다. 이후 결혼을 하지 않았고 조카를 양자로 삼음.

1957년 --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

1962년 -- 롱아일랜드대학,

1971년 -- 일본대학(日本大學) 등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1933년 --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를 지냈고

1945년 --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1946년 -- 중앙여자대학(지금의 중앙대학교)을 설립, 학장에 취임했다.

1946년 -- 남조선 민주의원 의원,

1948~49년 -- 초대 상공부장관,

1948년 -- 제헌의회 의원,

1950년 -- 제2대 민의원, 국제연합(UN)총회 한국대표를 지냈다.

1953~61년 --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63년 -- 민주공화당 총재고문,

1961~74년 -- 한국부인회 회장,

1963~71년 -- 중앙대학교 총장,

1965~72년 --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66년 -- 세계교직자연합회장,

1969년 --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을 지냈다.

1971년 -- 민주공화당 고문, 대한교원공제회 초대 이사장,

1972년 -- 중앙문화학원 이사장, 국민의회 대의원 및 운영위원을 지냈다.

1977년 -- 2월 사망


저서로 〈내가 한국을 위해서 분투했던 40년 My Forty Years Fight for Korea〉이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청조근정훈장 및 미국 아이젠하워 상을 수상했다.










제헌국회의 첫 여성 국회의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성장관 임영신이 취임했을 때의 일이다. 그녀가 장관실에 들어오자 부하직원들은 "서서 오줌 누는 사람이 어찌 앉아서 오줌 누는 사람에게 결제서류를 들고 가 고개를 숙이겠느냐"하고 쑥덕거렸다.

이를 들은 임영신은 "내 비록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왜놈과 맞서 싸웠고 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서 오줌 누는 사람 못지않게 뛰어다녔다. 그런 나에게 결재 받으러 오기 싫은 사람은 지금 당장 책상을 정리하여 보따리를 싸라. 언제든지 사표를 수리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날 이후 직원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임영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다.





일본으로,미국으로

임영신은 1899년 충남 금산에서 12남매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많은 식구들이었지만 다행히 부잣집이여서 먹고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공부하고 싶어하는 그녀에게 아버지의 반대가 앞을 가로막았으나 단식을 하면서까지 기어코 전주 기전여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졸업 후에는 충남 천안의 양대국민학교에 교사로 재직했다. 3 1운동을 맞은 임영신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전주에서 시위를 일으켰고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배후를 묻는 일경에게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그녀는 온갖 고문을 당해오다가 1919년 6월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몇 달 후 일본으로 건너가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히로시마 여자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후 1921년 다시 귀국하여 공주 영명여학교 교사로 재직한다.

그러던 중 두 오빠가 가 있는 땅 미국으로 건너간다. 어렸을 적부터 미국은 임영신에게 꿈을 주고 환상을 주었던 나라였다. 하지만 단순히 환상만을 품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품속에는 관동대지진때 무참히 학살당한 조선인들에 관한 자료가 있었다. 미국 임시정부에 있는 이승만에게 그것을 전해주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던 것이다.

임영신에게 '위험한 자료'를 받은 이승만은 "매우 장한 나의 딸이야! 너와 같은 딸들이 있으니 우리 조선은 꼭 독립이 되고 말게야."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임영신은 로스엔젤레스에 정착하여 남가주 대학과 대학원에 다녔다. 1931년에는 <한국 불교도들의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하는 길>이란 논문을 써 학위를 받았다.

1933년 귀국한 임영신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인 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흑석동에 땅을 사 중앙보육학교를 인수, 오늘날 중앙대학교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아주 짧았던 결혼생활

임영신은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나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다만 나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조국뿐"이라고.

사실 임영신은 독신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면서 평생을 보냈다. 세상을 떠나기 일흔 여덟해 동안 결혼생활은 단 1년뿐이었다.

1937년 학교가 운영난에 빠지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한순교라는 사람과 결혼하지만 1년이 지난 1940년 혼자서 귀국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그녀의 아주 짧은 결혼생활은 끝이 난 것이다.

사실 이전에 미국에서 이승만에게 청혼을 받은 일이 있었다. 임영신은 관동대학살의 자료를 넘겨 주면서 처음 만난 이승만과 교류를 계속하면서 지냈다.

임영신은 열심히 일하여 모은 돈을 이승만에게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어느 날 이승만 집에 인사차 들른 임영신은 이승만의 측근으로부터 간접적인 구혼을 받았다. 그 때 이승만은 국내에 부인을 둔 50이 넘은 나이였다. 임영신은 32살이었다.

임영신은 이승만에게 자신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것이며 독립운동과 이미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앞으로도 계속 이승만의 곁에서 언제나 동지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의 호도 이승만의 이름을 따서 승당(承堂) 이라고 지었다.






임영신의 활약상

해방을 맞은 임영신은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립한다.

1945년 윤치영의 집에서 창당대회를 열어 당수에 임영신, 부당수에 김선, 이은혜, 총무부장 박현숙, 총무 황현숙, 간사 최은희를 선출한다. 이들은 여성의 힘을 모아 민주사회를 건설하고 여성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건전한 민주경제를 확립하자는 의지를 다졌다.

1946년 한반도는 일제 식민지에서 행방되기는 했지만, 신탁통치안을 도구 다시금 혼란에 빠졌다. 이승만 일파는 단독정부 수립을 주창했고 김구 일파는 나라를 두 도막으로 쪼갤 수는 없다고 하여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하였다.

이 때 이승만은 임영신을 유엔파견 민주의원 대표로 임명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호소하는 일을 맡긴다.

결국 유엔 감시 하에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정부수립을 한다는 안이 가결되고 남한만으로 단독정부가 수립된다. 그리고 초대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된다. 이처럼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데 임영신의 공이 컸음을 알 수가 있다.

1948년 우리나라 역사상 여성 최초로 여성장관으로 임명된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 왕성한 의욕과 자신감 등으로 한국의 산업경제를 이끄는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갔다.

1949년에는 경북 안동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한국 최초의 여자 국회의원이 되었다.

1952년에는 제2대 정 부통령 선거에 여자국민당 대표로 부통령에 출마하였다. 그녀의 삶에 있어 절대적인 사람인 이승만에게 표를 몰아주자는 것이 그녀가 출마한 목적이었다.

1960년에 다시 이승만을 보필하기 위해 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5 16이후에는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한국부인회장, 중앙대학교 총장,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민주공화당 고문 등을 지냈다.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

임영신은 평생을 살면서 여성사에 남다른 기록을 남기고 떠났다.

최초의 여성장관, 최초의 여성국회의원 등 유난히 '처음'이란 단어가 많이 붙는 여성이었다.

남자같은 대담함으로 살았지만 말년에 그녀가 한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녀도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여성이고, 평생 노력하며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자신을 여자라고 의식해 본 적이 있습니까?

"별로 없어. 노력하면 모든 일이 다 되거든. 여자라고 안되는 일이나 못한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름다운 것은 좋아해. 화려한 빛깔이나 장식도구를 즐겨 사용하고 있어. 아마 그게 여자이기 때문이겠지?"

-지금 칠순이 넘은 이 시점에서 느끼는 것은?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어요. 내 뜻대로 살았으니까. 외로움, 그런거 못 느끼고 살았어. 더구나 내 생각을 이어줄 후계자가 있으니..."

평생 일구어온 중앙대학교 총장직을 그녀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철순에게 물려준 후, 임영신은 1977년 2월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사주명리 - cafe.daum.net/sajusa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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