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 of life, 카발라 타로를 연구하는 경향은 두가지로서, 한가지는 이론적 심오함을 연구하는 것이고, 또다른 한가지는 그야말로 예언(divination)의 측면에서 어떻게 하면 정확성을 기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나무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설명은 전자(前者)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주제입니다.
1) 생명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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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내용은 한메세계대백과 사전에서 발췌)
- 유대교·그리스도교의 전통 가운데,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전해오는 나무.
《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신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있었던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지혜의 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나란히 생명의 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금단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생명의 나무는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룹(cherub)과 두루 또는 화염검(火焰劍)으로 지켜졌는데, 그것은 생명 나무 열매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 생명 나무는 천상에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고 박해받는 가운데서도 신앙의 길을 끝내 지키는 사람에게는, 이 나무 열매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종교학에서는 이와 같은 종교현상을 생명의 나무, 또는 세계수라는 술어로 표현한다. 종교학적으로 볼 때, 특정수목을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숭배하는 신앙과, 풍요·생산의 상징으로서 수목을 도상화(圖像化)하는 현상이 세계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고대 오리엔트를 중심으로, 한 그루의 나무와 그 양쪽에 각각 한 마리의 동물이 그려진 도상이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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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내용은 두산세계대백과 사전에서 발췌 )
생명의나무는 우주의 기원과 구조 및 삶의 근원을 상징한 나무. 종교사(宗敎史)의 맥락에서 나무는 항상 성스러움을 현현(現顯)하는 성물(聖物)로 나타난다. 하늘을 향하여 높이 치솟은 형상,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과 재생의 생명력은 나무가 어떤 거룩한 실재를 표현하고 있다는 종교적 직관을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널리 발견되는 나무에 대한 신앙은 나무 자체를 신격화한 것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실재가 나무를 통하여 현현되었다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나무가 현현하는 거룩한 실재는 생명의 근원, 우주의 창조성, 우주의 중심, 지혜의 원천이 되는 신적 존재를 지칭한다. 생명의 나무는 우주목(宇宙木)·세계수(世界樹)·중심축(中心軸:axis mundi), 지혜의 나무라고도 한다.
생명의 나무와 관련된 신앙은 세계적으로 산재한 신화와 의례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인도의 오래된 문헌에는 우주가 커다란 나무로 묘사되어 있다. 《우파니샤드》에서 우주는 하늘에 뿌리를 두고 땅 위에 가지를 드리운 거꾸로 서 있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우주의 신 브라만을 상징한다. 북유럽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그드라실(Yggdrasil)은 뿌리가 지구의 중심까지 뻗어 있기 때문에 지구를 떠받치는 중심축이며 생명의 샘이 곁에 있기도 하다. 신 오딘(Odin)은 끊임없이 여기로 와서 지혜를 구하기도 한다. 세계의 종말이 다가와 대재난이 시작되어도 이 나무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나무와 지혜의 나무는 공존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에덴 동산의 한가운데에 두 나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공존 현상은 다른 고대 전승에서도 많이 발견되는데 생명의 나무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지혜의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먹어야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타(佛陀)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는 원래 인도의 종교전통에서는 지혜의 나무이자 우주목이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화인 단군신화에는 환웅(桓雄)이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인간을 다스렸다는 내용이 있다.
신단수는 태백산 꼭대기에서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여기서 태백산은 세계의 중심이며 신단수는 이 산의 정상에서 하늘과 맞닿은 채로 서 있다. 또한 웅녀는 신단수 아래서 기도하여 사람으로 환생하며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기도 한다.
따라서 신단수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축이자 생명력이 흐르는 통로이기도 하다. 결국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는 세계의 중심과 생명의 원천을 동시에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2) 카발라
다음은 한메 세계대백과 사전에서 발췌
- 중세 유대교의 신비사상이다. 유대교에서의 신비주의적 교설이나 관행은 이미 탈무드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에서 율법주의적 유대교와 함께 원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 유럽으로 전해져 크게 전개된 것에 대해 카발라(전통·전승)라는 말이 쓰인다.
독일에서의 카발라는 기도·헌신·명상·금욕생활에 힘씀으로서 영혼의 앙양(昻揚)을 얻어 숨은 불가지신(不可知神)의 영광(카보드)을 환상으로 본다는 신비체험을 강조한다.
한편 프로방스(남프랑스)·에스파냐지방에서 발전한 카발라에서는 숨은 신은 그 속성인 10가지 세피라(지혜·자비·공정·아름다움 등)를 통해 파악되는 것으로,
이것의 복수(複數)인 세피로트를 구사해서 우주의 창조과정·구조·유지를 논하고 신과 그 피조물 세계의 조화와 통일을 사색하였다. 에스파냐에서의 신비사상은 1300년 무렵 출판된 《조하르(광휘의 책)》에 나타나는데 이는 유대인
신비가의 교과서가 되었다.
다음은 두산 세계 대백과에서 발췌
카발라는 중세 유대교의 신비주의이다. 헤브라이어로 ‘전승(傳承)’을 뜻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나 《에제키엘》의 하느님이 나타나신 이야기를 둘러싼 《탈무드》의 신비주의적 교리로 말미암아 실천적 내용은 박해가 심했던 13세기의 독일에서, 이론적 내용은 14세기의 에스파냐에서 성행하였다.
그 교리는 다음과 같다.
창조 과정에서 악이 세계에 혼입되었는데, 그 악으로부터의 구제, 질서의 회복은 하느님 나라의 수립이라는 형태로 종말론적으로 실현된다. 사람은 하느님의 협력자로서 창조되어 천상계(天上界)와 지상계(地上界)의 접점(接點)을 이루고, 신비가는 금욕 및 신과 천사의 이름을 외는 것을 통해 황홀경에 들어가며, 천상계의 비의(儀)에 관여하는 신비적 경험을 얻는다. 그때 다른 신비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이 신적 존재에 흡수·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사람이 찬양해야 할 ‘영광’이라고 한다.
타로 카드 - 카발라의 전통을 모방한 것인가 ?
엘리파스 레비(Eliphas Levi)라는 사람(위 사진속의 인물)은 19세기 중엽무렵에 타로 카드의 자기 인식과 계발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강조하였다. 즉, 신비한 카발라(Kabbalah)의 전통과 타로 사이의 철학적인 관련성 사이의 작업은 타로카드의 이미지에 대한 더욱 신비스러운 이해를 더욱 조장하였다.
비록 카발라가 역사적으로는 타로카드와 관련이 없지만, 카발라의 철학과 상징은 타로카드의 이미지를 해석함에 있어 levi에 의하여 손쉽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메이저의 22장과 헤부르 문자의 숫자가 동일하다는 것이 표면적인 명백한 관련성이었다. 비록 아주 피상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관련성은 타로카드가 고대의 이스라엘의 성직자들의 사실상의 지혜의 잔여물이라는 가정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즉, 성직자들이 사원이 파괴될 당시에, 자신들의 숨겨진 지혜를 양피지(가죽)의 조각에 기록하였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양피지의 기록들이 결국은 표면적으로 볼 때, 중세무렵 집시들에 의하여 중부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타로 카드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가설이다. 진지한 카발라 연구가들은 카발라와 타로카드의 관련성에 대한 이
러한 주장들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두 분야를 연결하는 철학적인 해석은 끈질지게 발전되어 왔으며, 현재까지도 타로 카드 연구가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