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솟은 산도 풍수에선 살아 있는 산과 죽은 산으로 나뉜다. 구불구불(屈曲)하게, 아니면 솟았다 엎드리다(起伏)하며 흐르는 산이 살아 있는 산이요, 변화가 없이 일직선으로 뻗은 산은 죽은 산이다.
산의 생사(生死)는 흔히 뱀에 비유된다. 살아 있는 산은 산 뱀이 기어가 듯 흐르는 산이고, 죽은 뱀이 늘어져 있는 것과 같은 산은 죽은 산이다. 그 변화는 겨울에 봐야 확연히 들어난다. 요즘 나들이 길에 눈여겨 보라. 아니 그냥 본다는 의식만 있어도 전체 윤곽은 살필 수 있다.
집터나 묘터를 고를 때 죽은 산을 고르면 발복(發福)은 커녕 질병과 화액(禍厄), 손재(損財)가 잇따른다. 생기(生氣)아닌 살기(殺氣)가 흐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산이라고 해서 모든 곳이 다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산의 앞면과 뒷면을 구별해야 한다. 살만한 곳, 조상의 시신을 모실만한 곳은 산의 앞면이다. 역사가 오랜 자연마을이나 명당묘소는 하나같이 앞면에 조성되어 있다.
땅도 호흡을 한다. 산은 뒷면으로 기운을 빨아들이고 앞면으로 뱉어낸다. 따라서 앞면에 사는 사람만이 지기(地氣)를 흡수할 수 있다. 명당 주위의 산, 즉 사신사(四神砂)가 명당을 보듬어야 한다는 이유중의 하나가 이거다.
예컨대 돌아앉은 산은 명당에 기운을 보내는 게 아니라 되레 앗아간다. 따라서 그 명당에 사는 사람은 배반심을 키우게 된다. 또 뒷면을 보이는 산이 백호(白虎)라면 아내가 재산 빼돌려 도망갈 가능성이 많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피해를 본다.
나뭇잎을 보라. 앞면은 반질반질 윤이 나고 부드럽다. 하지만 뒷면은 거칠고도 어둡다. 꽃봉오리도 앞면에 맺힌다. 단적으로 우리 몸을 보면 확실하다.
산의 앞면은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기에 좋다.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이 정(情)이 있다. 하지만 뒷면은 거칠거나 꺼지고 패여, 사람이 등을 돌린 것과 같아 정이 없다. 앞면은 들판을 향해 있어 물이 흘러도 완만하며, 앞이 틔어도 급경사가 아니다.
반면 뒷면은 가파르고 바위가 많다. 비록 아래가 평평하더라도 이러한 곳은 취해선 안된다. 이 경우 대부분 끝 부분에 개울이 있고 시야가 틔어 전원주택지로 인기를 끈다. 하지만 풍수적으로 봤을 땐 ‘아니오’ 다.
또한 뒷면은 계곡이 있고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습기가 많다. 물이 흘러도 급류며, 그것도 산과 물이 같이 간다(山水同去). 돌멩이의 입자도 크며, 무엇보다 바람이 거세다. 토질도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균형이 깨져 푸석푸석하며 진창도 많다.
명당은 산의 앞면에만 이루어진다. 이러한 산의 앞뒤는 남향(南向)이니 북향(北向)이니 하는 방위와는 상관이 없다. 오직 산세(山勢)에 의해서만 결정이 된다.
땅투기로 나라안이 시끄럽다.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연일 여론에 몰매를 맞는다. 인간 과욕에 대한 땅의 노함인지도 모른다. 땅은 만물을 보듬는다. 인간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얘기다.
요즘 국도변 산등성이, 계곡을 유심히 보라. 초호화판 전원주택 천지다. 이런 곳에 살면서 잘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물론 일시적으론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풀린다’ 싶으면 터가 나쁘다는 이유로 내팽개치기 일쑤다.
그러면 남는 생채기는 원래 그 곳에 존재하던 이들의 차지가 되고…. 그네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적당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취하자. 인간에 부여된 땅을 가려 살자는 거다. 산의 뒷면은 뒷면대로 보듬는 게 있다. 그 대상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말이다. 쓸데없는, 아니 무지한 인간의 욕망으로 그마저 뺏는다면 그네들은 설 곳이 없어진다. 모두 함께 망하자는 심보다. 조화가 우선돼야 한다. 결국 인간도 땅이 보듬는 한 생명체일 뿐이다.
2005. 2. 매일신문 연재
출처 : 風따라 水따라 - blog.naver.com/chonjj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