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수 중심의 이론풍수만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시·공간적 존재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삶이 시간과 공간으로 대변되는 환경적 요인과 인간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잠시도 쉼 없이 ‘변화’되는 시간, 그리고 세계 어느 곳 하나 동일하지 않게 ‘차이’가 나는 공간과 관련되는 인간의 삶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인간의 삶이 그에 주어진 시·공간적 조건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간의 관계는 결정론적 관계라기보다는 상호 순환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이 인식과 행위의 주체인 인간에 따라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시.공간과 인간의 관계는 상호순환적 관계
이러한 인식의 동양적 표현이 곧 천(天)·지(地)·인(人) 삼재(三才)사상이다. 주역의 핵심사상이기도 한 삼재사상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로 천·지·인 세 가지를 설정하고 그들 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기서 천을 단순히 하늘(sky)로, 지를 땅(earth)으로, 그리고 인간을 인간(human)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관련된 천지는 음양(陰陽), 오행(五行), 사상(四象), 팔괘(八卦)처럼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수천, 수만 가지 현상을 크게 구분하여 개념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들 개념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수많은 인적, 물적 조건들을 다양한 기준을 통해 묶어 언어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삼재사상에서 인간과 관련된 천지는 어떤 기준을 통해 개념 구분된 것인가? 음양이나 오행, 사상 등이 ‘밝다·어둡다,’ ‘차다·뜨겁다,’ ‘단단하다·무르다,’ ‘뾰족하다·둥글다·판판하다’ 등과 같은 ‘현상의 특성’을 기준으로 표현한 개념이라면, 천지는 인간의 삶과 관련된 ‘변화(시간적 차원)’와 ‘다양성(공간적 차원)’의 조건 즉, 시간과 공간의 요소를 대변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천지는 인간의 삶과 관련한 변화와 다양성 대변
따라서 천지인 삼재사상에서는 인간이 관련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요소에 의해 인간 삶이 달라질 수 있음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요소가 어떻게 인간의 삶에 관련되는지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 왔고, 그것이 일정한 틀을 가지고 정리된 것이 다름 아닌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과 지리학 즉, 풍수인 것이다. 그럴 때 사주명리학이 시간과 인간간의 관계에 주로 주목했다면, 풍수는 특히 공간적 조건과 인간 삶의 관계를 이해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간적 조건과 인간 삶이 관련된다는 것을 풍수에서는 어떻게 이해한 것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형세풍수, 이기풍수, 형국 풍수 등이 갈라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들 풍수의 구분은 인간 삶과 관련된 다양한 공간환경적 요소 중 어느 부분에 특히 관심 갖는지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다.
풍수는 공간적 조건과 인간 삶의 관계를 이해
먼저 형세풍수(形勢風水)는 묘지, 주택, 마을, 도시, 수도 등 인간 삶과 관련된 다양한 입지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주변 산수의 외형적 조건에 주목하는 것이다.
보통 중국 강서지방에서 유행했다고 해서 강서지법(江西之法)이라고도 불리는데, 초기단계의 ‘거친’ 풍수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대둔산처럼 뾰족뾰족하게 바위덩어리가 많은 산은 그 기세가 아주 강하다든가, 두툼한 토양으로 덮혀 있는 지리산은 만인을 포근히 감싸 안을 만큼 넉넉한 산세라든가, 평야지대 한 가운데 홀로 우뚝 솟은 영암의 월출산은 마치 외로운 수문장처럼 단단함과 비장함이 느껴진다든가, 물길이 마을을 향해 달려드는 모양이 마치 화살이 날아오는 듯하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러한 형세풍수는 산수의 외형을 통해 입지를 정하는데 있어 다음에 설명할 형국풍수와 일견 비슷해 보이나, 그 구체성에 있어 훨씬 덜 분화된 어찌 보면 인간 본능적 차원에서의 환경적응적 측면이 강한 풍수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풍수의 역사상 형세풍수는 주로 통일신라 하대의 사찰(보통 九山禪門이라 불리는 사찰들) 입지를 정하는데 관련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형세풍수, 거친 풍수 주변 산수의 외형적 조건에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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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
이에 반해 이기풍수(理氣風水)는 방위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풍수이다. 흔히 풍수하면 패철이라고 부르는 나침반을 떠올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그림 1)
또한 최근 쉽게 접할 수 있는 풍수 이론서의 대다수도 방위와 관련된 이기풍수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형세풍수가 강서지법이라고 하는데 대해 종묘지법(宗廟之法: 조상을 모신 사당 방법론)이라고도 불리는 이기풍수는 인간의 사용목적에 따라 정해지는 입지나 인공 구조물의 방위배치, 그리고 이들과 주변 산수 간의 방위 관계에 따라 인간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방위를 살피는 주 대상이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음양론, 오행론, 팔괘론의 적용 유형 등에 따라 이기풍수도 상당히 달라질 수 있는데, 지리신법·88향법·현공풍수향법·통맥법·양택삼요법·정음정양법·율려법 등이 그것이다.
이기풍수에서 방위에 집중하는 것은 취해지는 방위 또는 방위관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공간적 기운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방위 요소는 환경론적으로 인간 삶과 관련된 미시기후의 차이를 대변해준다고도 볼 수 있는데, 풍수에서는 절대적인 방위보다는 선택적으로 선호되는 좌향(坐向) 방위에 관심 갖는다. 앞서「풍수는 모자이크다 ②」편에서 언급한 엘리트풍수의 주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도 이기풍수라고 할 수 있다.
이기풍수, 방위에 집중 풍수이론서의 대다수마지막으로 형국풍수(形局風水)는 현재 확인되는 풍수 유형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대중화된 풍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뒷산의 모양이 호랑이가 숲에서 뛰쳐나오는 모양이라든가(맹호출림형 猛虎出林形),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에 마을이 자리 잡았다든가(옥녀직금형 玉女織錦形), 앞산의 뾰족한 산이 붓처럼 생겨 문재가 뛰어난 인물이 난다든가(문필봉 文筆峰), 도시를 감싸안아주고 있는 산세가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세라든가(비봉형 飛鳳形), 묏자리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에 자리 잡았다든가(금계포란형 金鷄抱卵形), 마을이 지네산(蜈蚣形)에 기댄 관계로 앞에 있는 닭산을 경계하기 위해 숲을 조성했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형국풍수는 땅의 형체와 역량과 기세를 사람, 사물, 짐승, 조류, 문자 등의 형상에 비유하여 그 형태에 상응하는 기운이 내재해 있다고 본다. 즉 산천의 형태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기운이 땅속에 응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우주만물만상이 이기(理氣)와 형상(形象)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외형물체에는 그 형상에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돼 있다고 보는 관념을 원리로 삼는다.
형국풍수, 대중화된 풍수 땅을 특정 모양에 비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일명 물형규국론(物形規局論)이라고도 하는 이러한 형국풍수가 중국 풍수서의 내용 중에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형국풍수는 주로『산수도(山水圖)』,『명산론(名山論)』,『손감묘결(巽坎妙訣)』등 한국의 풍수 실용서에서 많이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풍수 형국에 따른 묘지나 주택, 마을, 도시 입지의 결정이나 장소 의미 구성이 한국 풍수의 특징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실제 마을단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동체풍수의 주종을 이루는 풍수형국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주변 사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결국 현재적 입장에서 전통마을이나 공간구성의 특징적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풍수가 다름 아닌 형국풍수임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아직까지 이기풍수 중심의 이론풍수만을 마치 풍수의 전부인양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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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정 : 서울대학교 및 동대학원,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지리학 전공(교육학박사). 현재 한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저서로 '풍수 그 삶의 지리, 생명의 지리'(공동), '대덕의 풍수', '풍수로 금산을 읽는다' 등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