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불탄 것은 곧 조선이 불탄 것으로 봐야 합니다. 숭례문은 서울의 제1 관문이자 정문이고 조선의 정신적 대들보였던 선비와 유생의 지킴이 역할을 했습니다. 음양오행으로 남쪽은 불(火)인데 불은 곧 정신을 가리킵니다. 남대문의 소실로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조선의 악습(유생의 패거리문화)이 청산되고 공직사회의 대대적인 혁신이 이뤄지게 될 겁니다. 사람들이 많이들 선비와 유생을 혼동하는데 선비는 지와 덕을 실천하는 사람인데 반해 유생은 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집단이에요. 당파싸움을 일으킨 장본인들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숭례문 방화사건에 대해 풍수지리와 명리학의 대가인 재야 한학자 용암(龍庵) 박운학(朴雲學 선생(71)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상당히 긍정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선생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선사와 만공스님의 제자이자 무소유의 실천과 기행으로 유명한 춘성(春城)스님(1891∼1977)으로부터 풍수와 주역, 달마(達磨)상법을 사사한 뒤 40여 년간 정진했다.
동국대 불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고 최종현 SK그룹 창업주의 고문을 지냈다. 주말마다 경기도 양평 용문에 있는 용문서당에서 후학들에게 동양 고전을 가르친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선생을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남대문 소실의 의미와 풍수지리로 본 서울의 도시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은 평소에 사람들이 만나야 일이 이루어지고 사람이 만나는데 최고의 의사소통 수단은 술(酒)이라고 강조한다.
좀 뜻밖입니다. 숭례문 참화에 대해 일반인들의 반응은 국보1호가 전소된데 대한 안타까움과 국보1호를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한 행정당국에 대한 질책과 분노,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국보 1호가 불탄 것이 불길한 전조가 아니냐는 우려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선생님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시는군요.
숭례문 참화를 계기로 우리 모두 각성하고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다는 거지요. 서울은 신라 고어(古語)로 '서쪽의 울타리'란 뜻입니다. 서울의 지형을 생각해 보면 이를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에 광장이 있다면 한국에는 마당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서양의 광장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했다면 울타리가 쳐있어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한국의 마당은 당파(黨派)를 만들어냈습니다. 서울의 도심에 있는 마지막 울타리가 사라짐으로써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가속화될 것입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뒤 도읍을 정할 때 계룡산의 신도안 등 다른 곳도 둘러보았다고 하는데 서울을 도읍지로 정한 데는 어떤 배경이 있습니까?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이나 도시는 보통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조성되는데 마을이나 도시를 사방에서 감싸주는 조산(組山) 중 형세가 뚜렷한 네 산을 외사산(外四山)이라고 합니다. 한양은 진산(鎭山)인 북쪽의 북한산, 남쪽의 관악산, 동쪽의 용마산(일명 아차산), 서쪽의 행주 덕양산 등 외사산 뿐 아니라 북쪽의 북악산(백악산)과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남산), 동쪽의 낙산(일명 타락산 동대문 근처)의 내사산(內四山)에 의해 겹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국입니다.
서울의 내청룡(內靑龍)은 주산(主山)인 북악을 중심으로 삼청터널-혜화동을 거쳐 낙산까지 이어지는 좌측 능선이며 내 백호(內白虎)는 북악산 우측으로 창의문(자하문)-인왕산-무악재로 이어지는 능선입니다. 안산(案山)은 백호 능선이 이어져 주산인 북악산을 마주보고 있는 남산입니다. 내수(內水)인 청계천은 서북쪽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서울을 감싸 안아주면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수한 뒤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외수(外수)인 한강과 합류하여 서울 전체를 감아주어 태극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은 외사산과 내사산, 외수와 내수가 어우러진 명당이죠. 또 관악산 줄기가 내려와 동작동 국립묘지 부근에서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공작포란(孔雀抱卵)형 지세를 형성하고 있는데 공작은 새 중의 귀족 아닙니까? 엘리트와 귀족들이 모이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의 약점은 없습니까?
물론 있죠. 가장 큰 문제점은 인왕산 대신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우 백호(인왕산 높이 330m)에 비해 좌 청룡인 낙산(높이 120m)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동쪽 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만 옹성을 쌓고 허약한 좌청룡의 지기를 돋우기 위해 산맥 모양의 之자를 넣어 이름을 네 글자로 지었습니다. 또 하나는 경복궁이 남면(南面)하고 있어 관악산의 화기에 정면으로 노출돼 있다는 겁니다. 관악산은 방위상 불에 해당하는 정남쪽에 위치한데다 산봉우리가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어 화형산(火形山)이라 불리웠습니다. 관악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됐는데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인 정도전은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는 이화치화(以火治火)의 논리로, 관악산의 화기와 정면으로 맞서도록 성의 정남쪽에 세운 대문의 이름을 숭례문(崇禮門)으로 정했습니다. 례(禮)자는 발음상 오행으로 볼 때 불(火)에 해당하며 여기에 불꽃의 형상과 비슷하면서 '높이다'는 의미를 가진 ‘숭(崇)’자를 더해 현판을 수직으로 써내림으로써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의 양 옆에 해태상을 세운 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피하거나 제압하기 위해서 였어요. 해태는 알다시피 물기운을 몰아온다는 바닷 속에 사는 상상의 동물이에요. 이것으로도 안심할 수 없어 지금은 메워졌지만 서울역 광장 부근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만들었고 남대문 안에도 자체 우물을 팠습니다. 남대문이 관악산의 화기를 막다가 자신이 화를 당했을 때에 대비한 자체 소방시설이지요.
서울은 주자학과 풍수지리설의 원리를 구체화해 설계된 계획도시라고 들었습니다. 조선 초 서울의 도시계획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1392년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민심을 혁신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면 도읍의 천도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권신들의 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건국 3년 만인 1394년 10월 한양 천도를 단행합니다.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뒤 태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왕권의 상징인 궁궐과 종묘, 사직을 축조하는 일이었어요. 주(周)나라때 만들어진 도성과 궁궐배치 규범인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원칙에 따라 주궁(主宮)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宗廟), 서쪽에 사직(社稷)이 설치됩니다. 경복궁이 완공된 이듬해인 1396년 태조는 성곽 축성공사를 명합니다.
도성은 내사산인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연결하는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총연장은 18km에 달했어요. 공사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주역의 팔괘를 모방하여 여덟 방향으로 4대문과 4소문을 만듭니다. 사대문은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서쪽 돈의문(敦義門), 남쪽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 숙정문으로 개명)이며 사소문은 동북의 홍화문(惠化門으로 개명, 현재의 동소문), 동남의 광희문, 서남의 소덕문(후에 소의문으로 개명, 현재 서소문), 서북의 창의문(자하문)입니다. 당시 활동했던 무학대사뿐 아니라 정도전도 신라 말 수입된 중국의 풍수를 우리 풍토에 맞게 도선국사가 재정립한 비보(裨補) 풍수의 대가였습니다. 자생비보란 모자라는 곳을 도와서 채워준다는 뜻이에요. 그는 대문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의 오덕(五德)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바탕으로 동쪽에 인(仁), 서쪽에 의(義), 남쪽에 예(禮), 중앙의 종루인 보신각(普信閣)에 신(信)을 각각 집어넣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 조상들이 서양인들 못지않게 상당히 과학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치를 정하는 것은 물론, 이름 하나 짓는데도 정신과 물질을 아우르는 풍수지리의 원칙들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고려를 했으니까요. 40여 년간 풍수지리를 공부하셨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계신데 풍수지리란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땅의 형태와 모양에 관한 학문이니 달리 말하면 기하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풍수지리는 주변 자연 환경과 지형(地形)이 개인과 사회의 길흉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때문에 오늘날 많이 얘기하는 친환경의 정신을 일찍이 구현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숭례문 참화로 조선의 정신이 사라진다는 건, 우리가 좋은 영향력을 잃는게 아닐까요?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정신을 요구합니다. 오늘날은 전통을 보존하는 시대가 아니라 동양과 서양, 옛 것과 실험적인 것이 서로 섞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퓨전(fusion)의 시대입니다. 조선 600년의 역사가 남대문의 소실로 사라졌다고 해서 한탄하기 보다는 밀려들어올 세계화에 대비해야 할 때입니다.
인터뷰 내내 자신을 재야에 묻혀 지내는 노술객(老術客)으로 불러줄 것을 신신당부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누구보다도 젊고 미래지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