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 지도자나 군 통수권자의 판단과 명령은 무고한 인명의 생사와 직결될 때가 적지 않다. 더구나 그것이 국운을 좌우하고 수많은 백성의 생존 여부와 연관되는 일이라면 더욱 심각해지고 만다. 이처럼 생사를 가르는 절박한 위기 순간에 냉철한 이성으로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 저마다 쉬운 일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거기에는 후일의 역사적 심판과 평가가 뒤따르게 되어 있다.
서기 935년 신라 마지막 임금 제56대 경순왕(897∼978)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준 사건을 놓고 지금까지도 이론이 분분하다. 사학계에서조차 평가가 엇갈려 있다. ▲임금의 자리에서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어떻게 천년사직을 고스란히 넘겨줄 수가 있느냐는 문책론을 내세워 패국군주(敗國君主)로 못박는가 하면 ▲이미 국운이 쇠락하여 대항해 보았자 승산 없는 싸움인데 아까운 군졸과 백성들을 잃지 않고 항복하길 잘했다는 시각도 만만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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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의 기단인 당판 아래 도툼하게 올라온 전순(前脣). 왕릉 앞에는 조영된 것이 많으나 자연이 빚어 놓은 전순은 대단한 길격이다. |
이에 대한 경주김씨(경순왕 후손) 후예들의 의견은 한결같다. ▲무심한 일부 사학자들이나 세인들은 ‘항복’이라고 표현하나 그것은 결코 항복이 아니고 반드시 손국(遜國) 또는 양국(讓國)으로 불러야 하며 ▲군왕의 권위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민생을 염려하여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난 높은 뜻을 올바로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순왕은 927년 경주 포석정에서 여흥을 즐기고 있던 55대 경애왕이 견훤군 습격으로 시해된 뒤 왕위에 오른다. 우리 한반도 역사 중 유일한 전국시대였던 당시 상황은 이미 ‘신라의 때’는 아니었다. 지방 호족의 창궐로 영토 대부분을 상실한 상태였고, 왕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기강이 무너져 왕명조차 짓밟히기 일쑤였다.
이런 풍전등화의 내우외환 속에서 경순왕은 장남 마의태자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의 극력 반대를 무릅쓰고 자진 망국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왕위에 앉힌 견훤을 마다하고 도량이 후덕한 왕건에게 나라를 넘겼다. 경순왕이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에 뻗쳤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왕건은 경순왕 김부(金傅)를 태자위에 해당하는 정승공에 봉했고 경주를 식읍으로 내주었다. 김부의 원장(員將)들을 모두 채용해 고려에 귀속시키는가 하면 큰딸 낙랑공주와 혼인토록 하여 부마로 삼았다. 그 후 경순왕은 신라가 망한 뒤로도 43년을 더 살다가 고려 제5대 경종 3년(978) 4월4일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신라를 통치했던 당시 왕들의 능은 모두가 경주 권역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경순왕릉은 경주 밖에 있다. 민통선 인근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1번지. 곳곳의 높다란 철조망과 함께 지뢰밭임을 알리는 빨간 표식이 분단국의 비애를 여지없이 실감케 한다. 이곳 고랑포는 1968년 1·21사태 때 북한군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택했던 침투로였고 능 뒤가 남방한계선이다. 노구를 이끌고 취재에 동행해 준 한국풍수지리중앙회 거봉 김혁규 회장과 임원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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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출한 능 앞의 석물들. 곡장(曲墻)과 함께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
고려 왕실의 따뜻한 배려로 천년 길지를 잡아 안장한 덕택일까. 능역에 들어서니 마치 어머니의 치마폭에 안긴 듯이 안온하고 푸근하다.
“기록에는 계좌(북에서 동으로 15도) 정향(남에서 서로 15도)으로 나타나 있는데 현재 상석이 놓인 방향은 축좌(북에서 동으로 30도) 미향(남에서 서로 30도)입니다. 후일 능을 사초하면서 달라졌을 수도 있으니까 이럴 때는 계좌 정향으로 봐야지요.”
거봉의 설명에 박동일(72·연천향교 전장) 경순왕릉 문화해설사도 동감한다. 15도의 차이지만 득수와 파구가 달라져 후손들에게 미치는 발복 여부는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하관할 때 적용하는 재혈과 분금에서는 더욱 정교함을 요하는 것이 풍수라는 학문이다.
“간향(艮向·동에서 북으로 45도) 입수룡(入首龍)에 을득수(乙得水) 미파구(未破口)니 길격을 갖춘 영화지지입니다. 특히 백호가 전순(前脣·묘 앞의 입술처럼 두드러진 둔덕)을 환포하며 수구(水口)까지 막아 주고 그 뒤를 임진강이 휘감아 돌았어요. 저 국세가 바로 금대(錦帶)입니다. 장손보다는 지손과 함께 외손의 발복이 두드러졌을 겁니다.”
왼쪽 청룡 방향의 파수(破水)가 월견수(어깨너머로 비치는 물)나 당문파(묘 앞에서 직사로 빠져 나가는 물)가 아니어서 지기 영향도 오래갈 것이란 국세 풀이다.
문득 도선국사 이전의 풍수형태는 어떠했을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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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릉제향 시 필요한 제기와 제복을 보관해 두는 재실. (왼쪽)◇경순왕릉 비각. |
“우리나라에 풍수가 전래되기 전에는 ‘밀교법(密敎法)’으로 산을 판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흙을 파서 색깔을 본다거나 맛을 보고 가늠해 내기도 했어요. 때로는 계란을 묻어 두었다가 곯지 않으면 좋은 땅으로 알고 묘를 썼고, 유불선 삼교에서는 기(氣)를 찾아 음택과 양택을 구분해 내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사례는 고대 왕릉의 조성 양태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경주 인근의 신라 왕릉 상당수가 황토에 평지분으로 용사되어 있음도 무관치 않다.
경순왕릉은 임진왜란 이후 오랜 세월 실전되었다가 영조 24년(1748) ‘敬順大王藏地(경순대왕장지)’라는 지석(誌石·장사 지낼 때 함께 묻는 표지석)과 함께 영역을 찾아내 새로 조영한 것이다. 원형의 봉분 하단에 둘레석을 돌렸고 상석, 장명등, 표석, 석양 1쌍, 망주석 2기가 배치돼 있는데 대부분 조선 후기 양식이다. 1975년 문화재 사적 제244호로 지정하여 국가가 보호하고 있다.
능 왼쪽 아래에는 백옥비석이 비각 안에 있다. 세월의 풍우에 씻겨 비문은 판독할 수 없으나 거대한 백옥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고가라 한다. 능 입구에는 재실(제기와 제복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 그러고 보니 20일(음 4월4일)이 경순왕의 제향일이다.
시조 묘의 제사나 임금의 능 제향은 기일(忌日)이 아니더라도 후손들이 별도로 날을 정해 모셔도 허물이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신라나 고려 왕 후손들이 산릉제향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지파별로 추진되고도 있다. 이 같은 전례문화의 복고 현상이 첨단과학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과 무관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과 왕비에 대한 제례인 종묘대제는 유네스코 선정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록(2001년 5월18일)되었고 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를 축소시킨 것이 바로 산릉제향이기 때문이다. 산릉제향 봉행 시 아헌관(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은 왕비 문중의 대표가 헌작하고 있어 예법을 모르고 있다가 당황하는 경우도 여러 번 보아 왔다.
산릉제향은 봉심(奉審)으로부터 시작된다. 제향 1∼2일 전 종손이나 초헌관이 능에 직접 올라 살피는 것으로, 반드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면서 봉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절차다. 이 봉심례는 사가례(私家禮)에도 그대로 적용돼 제사 지내기 전 반드시 묘를 한 번 둘러보는 것이 합당한 예의다.
산릉제향은 15명의 제관이 드리는 임금에 대한 제례이며 ① 초헌관 ② 아헌관 ③ 종헌관 ④ 감제 ⑤ 집례 ⑥ 대축 ⑦ 내봉작 ⑧ 외봉작 ⑨ 좌전작 ⑩ 우전작 ⑪ 봉로 ⑫ 봉향 ⑬ 사준 ⑭ 봉등 ⑮ 찬의로 구성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봉작과 외봉작을, 봉로와 봉향을 한 명이 겸할 수도 있어 13명으로도 가능하다. 제향 수일 전 습의(習儀) 과정을 통해 충분히 예행연습을 하므로 누구에게 임무가 주어져도 감당해 낼 수가 있다.
다만 ▲공수법(拱手法·오른손으로 왼손 엄지를 잡고 왼손가락이 오른손 등을 덮어 배꼽에 가볍게 대는 것) ▲보법(步法·두 손을 공수한 채 머리를 조금 숙여 앞사람 발뒤꿈치를 보며 반보로 걷는 것) ▲승강계법(昇降階法·계단을 오를 때는 오른발 먼저 올려 왼발 합치고 내려갈 때는 왼발 먼저 내려 오른발 합치는 것. 이를 연보합보라고도 함) ▲문 출입법(들어갈 때는 동쪽문, 나올 때는 서쪽문, 중문은 신문(神門)이라 하여 축함이나 제수만 출입할 수 있음) ▲부복법(俯伏法·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을 여덟팔 자로 짚고 팔은 편 채 고개는 다소곳이 숙인 자세) 등을 미리 알아두면 능 제향 참반 시 옆사람의 눈치를 안 살펴도 된다.
이때 모든 동작은 집례의 창홀(唱笏·제향 순서를 적은 홀기를 부르는 것)이 끝난 뒤 시작하며 절할 때는 반드시 안경을 벗는다. 왕릉은 4배, 왕자나 군의 묘에는 재배한다. 왕의 묘는 산릉(山陵), 왕세자는 원소(園所), 일반 묘는 산소(山所)라 불러왔다.
임진북 예성남정맥의 대맥인 성거산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흘러내리며 명혈지지를 작국(作局)해 놓았다는 경순왕릉.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77년이 지났건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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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 안의 백옥비석. 풍우에 마모돼 판독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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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라벌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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