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임진(臨津) 이북의 땅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는 ‘정감록’의 예언은 문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북 땅은 불안하다는 말 아닌가! 이 대목은 이북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다. 특히 풍수도참(風水圖讖)을 철석같이 믿었던 이북 비결파(秘訣派)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원래 풍수도참은 이남보다도 이북 사람들이 더 좋아하였다. 조선시대 내내 중앙권력으로부터 차별을 당했던 이북 지역은 중앙정부에 대한 ‘안티(anti)’의 성격이 진하게 담겨있는 ‘정감록’과 ‘풍수도참’의 내용이 입맛에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정감록의 이 예언을 믿고 대략 1890년대 후반부터 이남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 1번지는 ‘십승지’의 제일 첫 번째 승지(勝地)인 경북 풍기(豊基)였다. 당시 평안북도의 박천, 영변 지역에서는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금을 캐기 위해 서부로 간 것이 아니라 난리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남쪽으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내려 왔다.
그 1진이 1890년대에 왔다면 2진은 1920년대에 왔다. 2진은 개성·평양에서 약 100여 가구가 풍기로 집단 이주를 하였다. 3진은 1945~50년 사이에 이북 전역에서 약 600가구가 ‘풍기로 가야 산다’는 말을 믿고 이주를 하였다. 1가구에 5명만 따져도 600가구이면 3000명에 해당한다. 대략 4000~5000명의 이북 사람들이 오직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이북에 있던 전답을 팔아서 풍기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현재는 이들 후손들이 1000가구 정도 남아 있다. ‘풍기발전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인순(59)씨의 경우에는 박천에서 살다가 6촌 이내 일가족 40명이 아버지를 따라 모두 내려왔다고 한다. 1942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교통의 오지였던 풍기에 오려면 걸어서 와야 했으나, 철도가 개통되면서부터 대규모의 이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6·25 이전에 비결을 믿고 월남한 이들은 객지인 풍기에 와서 먹고 살 수 있는 호구지책으로 ‘직물(織物)’과 ‘인삼(人蔘)’을 주로 하였다. 평안북도 사람들은 직물 쪽을 하였고, 개성 사람들은 인삼을 하였다. 정감록 믿고 망한 사람도 있지만, 풍기의 경우처럼 재미를 본 사람도 있다.
(조용헌·goat1356@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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