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풍수도참(風水圖讖)을 믿고, 이북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온 장소를 대표적으로 꼽는다면 경북 풍기이다. 풍기 외에 강원도 횡성(橫城)도 있었다. 강원용 목사의 자서전인 ‘빈들에서’(1권)를 읽어 보면 횡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강 목사의 부친은 평소 풍수도참설을 신봉한 나머지, 해방 전에 고향인 함경도를 떠나 강원도 횡성으로 전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소식을 들은 강 목사가 횡성까지 찾아가서 부친을 설득하여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북 사람들만 풍수도참을 신봉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남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북과 이남이 공통적으로 선호했던 지역이 계룡산 ‘신도안’(新都內)이다. 계룡산 남동쪽 기슭에 해당하는 신도안은 이성계의 조선개국 당시부터 도읍지로 물망에 오르던 곳이었고, 지난번에 행정수도 이전이 논의되었을 때도 전국의 풍수지리가들은 대부분 신도안을 그 후보지로 꼽았다. 나라가 망한 일제시대에는 조선 비결파들이 총집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새나라가 세워지면 바로 이곳에 도읍지가 들어서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북은 물론이고, 충청, 경상, 전라, 심지어는 제주도 사람들까지 신도안 근처로 이사를 왔다. 고향에 있는 논 팔고 집 팔아서 온 결단이었다. 어림잡아 2만~3만 명의 인구가 풍수도참을 믿고 계룡산으로 이주를 하였다고 본다.
김제 금산사(金山寺) 밑에 있는 마을인 원평(院坪)도 일제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세상이 개벽되면 이곳이 그 중심지가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집 팔고 논 팔아서 이사를 왔다. 재미있는 점은 원평에 온 사람들의 상당수가 경상도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일제시대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로 이사를 많이 왔었다. 들판이 넓어서 경상도보다 먹고살기 좋다는 판단도 작용한 듯하다.
경상도 비결파들이 대거 이주해온 또 한군데의 승지(勝地)가 정읍 산외면(山外面)의 평사리(平沙里)이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대명당이 있다고 하여 태평양전쟁 무렵에 경상도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았다. 풍수도참이 성행한 시기는 시국이 어수선한 시기이다. 민초들이 살기 위해서 자구책으로 내놓은 안이 바로 풍수도참이었다.
(조용헌·goat1356@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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