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철은 지남반(指南盤)·지남철(指南鐵)·윤도(輪圖)·나경(羅經)으로 불려지며, 중국 한 대에 이미 실용화되어 점을 치는데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A.D.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 고분에서 식점천지반(式占天地盤)이란 패철과 비슷한 물건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식점천지반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원반과 방반의 두 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반의 중심에는 북두칠성을 두고, 그 주위에는 12월 신명을 두르고, 그 다음에 간지를 기입하였다.
그 후 4∼5세기경에 침에 자성을 띄운 자침을 만들어 회전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결과 방위 측정이 가능하여 풍수가들의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다.
선조 때, 명나라에서 풍수지리에 밝았던 이문통이 조선을 찾았다. 그는 광화문의 어로(御路) 위에 패철을 놓고서 지세를 살폈다. 그 광경을 본 조선에서 그가 사용한 패철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또 영조 18년에는 중국에서 구해 온 천문도와 5층 패철을 본떠서 패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오늘과 같은 패철이 한국 땅에서 사용된 것은 조선 후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시대에는 천문학이 활발히 연구되면서 패철이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 시대에도 천문학을 담당하던 관상감에서 패철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풍수가의 전유물로 여겨진 패철이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였다. 뱃사람이나 여행자들이 방향을 보는데 이용하기도 하고, 천문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이 휴대용 해시계의 정확한 남북을 정하는데도 패철을 이용하고, 사대부들은 부채의 끝에 작고 단순한 모양의 2·3층 짜리 패철을 만들어 매달고 다녔다. 이것을 선추(扇錘)라 부른다.
현재 한국에서 전통 패철을 만드는 사람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輪圖匠)으로 지정된 김종대(金鍾垈)이고, 그는 고창군 성내면 산림리 낙산마을에 산다. 이 마을은 300년 동안이나 패철을 만들어 온 유서 깊은 고장으로, 마을 뒷산에는 신기하게도 '거북 바위'가 있다. 동서로 가로놓여진 바위는 그 위에 7개의 구멍이 파져 있고, 완성된 패철을 그 위에 놓으면 남북이 정확히 맞는 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마을에서 패철을 만들어 '거북 바위'에 놓으면 남북이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김종대는 큰아버지인 김정의로부터 패철을 만드는 기술을 전수 받았다. 김정의는 치밀하고도 꼼꼼한 솜씨로 패철을 만든다고 소문이 나, 평안도·함경도에 사는 사람들까지 사랑방에 진을 치고 패철을 사 갔다고 한다. 수요가 많을 때면, 패철 1개의 값이 쌀 10섬 가격에 해당되고, 뱃사람들이 한꺼번에 50개씩 주문하기도 했다. 덕분에 김정의는 일제 시대에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았고, 기술을 조카에게 전수시킬 수 있었다.
패철을 만드는 재료로는 대추나무나 회양목· 은행나무가 쓰이는데, 이 나무들은 눈매가 곱고 단단하여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다. 박달나무를 쓰면 무르면서 가벼워 대추나무보다 못하다. 대추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고 말려 놓으면 잘 트지 않는다. 그리고 비단결 같은 윤기가 나면서 오래 갖고 다니면 색이 더욱 빨개져 고와진다. 대추나무는 예로부터 보은에서 나는 것을 많이 썼다. 보은은 대추나무가 많고, 대추를 팔아서 혼수 자금을 마련했다는 고장이다. 그래서 '삼복(三伏)에 비가 오면 보은 처자가 운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대추가 적게 열리기 때문이라 한다.
패철을 만들 때면, 150∼200년 이상 된 대추나무가 쓰인다. 굵으면 좋지만 덜 굵더라도 한줄기로 곧게 자란 것이 좋다. 트거나 옹이가 있으면 사용할 수 없고 속이 꽉 찬 것이라야 적당하다. 그런데 대추나무는 성장이 느리기 때문에 수령 200년 이상의 굵은 나무를 구하기 어렵고, 더군다나 벼락을 잘 맞아 쓸모 있는 나무가 드물다. 설령 수령이 오래된 것을 구했더라도 옹이나 썩은 부분 또는 갈라진 부분이 다른 나무에 비해 많아, 잘라 보아야만 쓸모가 있는지 어떤지를 판단 할 수 있다. 김종대는 '꼭 사람의 마음을 닮은 나무이다.'라고 말했다.
나무를 구했다면 다루기 쉽도록 손질해야 한다. 생목인 상태에서 패철을 만들기에 적당한 크기로 잘라 놓아야 운반도 쉽고 말리기도 용이하다. 대추나무는 워낙 단단하여 잘 마르지 않을 뿐더러 마른 후에는 더 단단해져 톱질이 매우 어렵다. 자른 나무는 그늘에서 3년 이상을 말리거나, 바닷물이나 저수지에 2∼3년 동안 담가 두었다가 건져서 그늘에서 1년 이상을 말린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가마솥에 넣고 삶아서 말리는 방법도 있는데, 오래 삶을수록 진이 빠지면서 건조하기도 쉽고 트지도 않는다.
마른나무는 먼저 백변을 떼어 내는데, 백변은 흰색이 나면서 무르기 때문이다. 나무가 손질되었으면, 중심 잡기, 층수를 정해 동심원 그리기, 분금하기 순서로 작업이 진행된다. 패철은 정간이 생명이며, 정간은 동심원 하나를 최소 1°의 각을 이루도록 360개로 분금해야 하는 매우 정교한 작업이다. 만약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패철은 그 생명인 정확성을 잃게 된다. 그 다음에는 글자를 새기는 까다롭고 지루한 작업이 계속된다. 김종대는 '글자 새기는 일은 눈이 빠지는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한 층을 각자하는데 보통 한나절이 걸리고, 글자 수가 많은 층은 하루가 꼬박 걸린다. 만약 하나의 획수라도 잘못 조작하면, 며칠이 걸려 완성한 패철판을 모두 갈아없애고 다시 조각해야 한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작업을 중단하고서 산책으로 마음을 다스린다고 한다.
"정간, 각자 작업을 할 때는 온 집안 식구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글자를 새기다가 잘못되면 사소한 일에도 굉장히 화가 나, 가족들이 신경을 쓰지요. 큰아버지는 중간 중간에 단소를 옆에 끼고 나가 동네를 돌아다니다 오기도 했습니다." 글자 새기기 작업이 끝나면 먹으로 전체를 검게 칠하여 동심원의 모양이 제대로 되었나 살피고 자침을 넣기에 적당한 깊이인가를 살펴서 손질한다. 그 다음엔 옥돌 가루를 칠하는데, 옥돌의 흰색이 각자와 분금 속에 들어가면 먹칠 바탕 위에서 글자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동· 서· 남· 북 정방향을 나타내는 글자에는 붉은 색을 띄는 주사를 입힌다. 자침을 만들 때면, 만주에서 구해 온 원석(原石)에 쇠침을 붙여 두고, 자침을 패철에 놓은 다음 유리 덮개를 덮어 완성한다.
패철은 우리 조상의 정성과 인내가 깃든 예술품으로, 공들여 만든 만큼 사람들을 위해 유용하게 쓰여지는 도구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해 힘든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드물다. 태어나서 낙산 마을을 한 번도 떠나지 않은 김종대는 아들과 그 친구에게 패철 만든는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 그림 :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 김종대씨가 완성된 정통 패철의 정확성을 체크해보기 위해 마을 뒷산의 거북바위에서 확인해보고 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발행,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