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 癸 丙 辛 乾
巳 丑 申 酉
庚 辛 壬 癸 甲 乙
寅 卯 辰 巳 午 未
제갈량(諸葛亮)은 181년(辛酉) ~ 234년(甲寅)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으로 자는 공명(孔明)입니다. 형주에서 지내던 중 207년(丁亥) 유비(劉備)의 삼고초려로 세상에 나와 삼국시대에 지략으로 출사표를 상고하여 전설로 남겨진 인물입니다.
194년(甲戌)에 양친을 여의어 한동안 백부 제갈현(諸葛玄)이 예장에서 돌보다 백부가 죽자 형주로 와서 농사를 지으며 양보음이라는 노래와 시화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때 난세를 피해 온 명망 높은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인맥과 지식을 쌓았다고 합니다.
209년(己丑) 적벽대전에서 손권(孫權)과의 연합을 이끌어내 당대 최강의 제후인 조조(曹操)의 남하를 저지하고, 214년(甲午)에 장비와 조운을 대동하고 서촉으로 들어가 유장(劉璋)의 항복을 이끌며 군사장군에 임명된 것이 유비와 군신의 관계입니다.
221년(辛亥) 유비가 황제가 된 후에 조정의 수장인 승상(丞相)이 되었고, 223년(癸丑)에 유비가 죽고 유선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에도 14년간 승상을 지냈습니다. 225년(乙巳)에 남쪽 호족의 반란을 봄에 남정을 개시하여 그 해 가을에 발란을 평정합니다.
227년(丁未)에 유비에게 부탁받은 후사를 실현하고자 위나라를 정벌하려 군사를 일으키는데 출진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은 원문 350자로 이것이 그 유명한 출사표입니다. 북벌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충신의 명문이 후세에 진한 감동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228년(戊申年) 봄 제갈량이 기산을 침공하자 남안과 천수, 안정 3군이 호응하고 강유(姜維)가 제갈량에게 귀순하는데, 그러나 가정에서는 마속(馬謖)이 제갈량의 지시에 어긋난 행동을 해 장합(張郃)에게 대패하여 마속을 처형합니다.
그 해 12월(甲子月) 제갈량은 스스로 우장군으로 지위를 낮추면서 승상의 사무를 대행하고, 다시 위나라를 침공해 진창을 포위하지만, 학소(郝昭)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식량이 다 떨어져 귀환하고, 이때 추격해온 왕쌍(王雙)을 물리칩니다.
229년(己酉) 제갈량은 위나라의 영토를 침공해 곽회(郭淮)를 격파하고 무도와 음평을 평정하여 공로로 승상에 복직합니다. 231년(辛亥)에 기산을 침공하여 상규에서 사마의와 싸워 대파하나 식량이 없어 퇴각하였고, 추격한 장합을 목문에서 사살시킵니다.
234년(甲寅年)에는 10만 대군을 일일이 통솔해 오장원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사마의와 대치하는데 제갈량은 목우와 유마라는 산악용 손수레를 사용해 식량을 수송하고, 식량 공급이 끊어지지 않도록 병사를 나누어 집결시켰다고 합니다.
그 해 8월(壬申月)에 사마의와 대치한 지 100일이 넘어서며 병으로 쓰러져 진중에서 54살의 나이에 병사합니다. 촉군이 철군한 후 사마의는 촉군의 진지 배치를 돌아보며 과연 적장이지만 시대가 낳은 천하의 기재로다라고 감탄을 했다고 합니다.
유언대로 한중의 정군산에 매장되는데, 청렴하고 축재를 하지 않아 집에는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농토 15경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후대 역사는 형벌과 정치는 엄격했는데도 원망하는 자가 없는 것은 상벌에 명확했기에 존경했다고 합니다.
辛酉年生 丙申月이니 천지(天地)의 조화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입니다. 辛酉의 本을 丙申의 令으로 받아내어 역천(易天)하니 난세의 영웅호걸들이 나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만한 춘추전국시대인 삼국시대를 잘 배경하는 듯한 火剋金의 세상입니다.
운향(運向)도 남동(南東)으로 向하여 火剋金하니 조용히 초야의 형주에서 머물지 못하고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전쟁터로 평생을 전전긍긍하고 삽니다. 火剋金의 살벌한 전장터에서 癸水日源은 홍일점과도 같은 부채든 신선과 같은 선비입니다.
癸丑日이 丙申月로 일월(日月)의 宅向으로 용처(用處)로 삼으니 처세가 만인에 모범과 우상이 될만 합니다. 墓向이 丁巳時로 보좌하니 냉철하게 시대를 바라보는 안목이 자로 재는듯 합니다. 金旺之節 金의 기세(氣勢)를 火水로 用하여 중화(中化)합니다.
申月 癸丑日은 자신을 절제하고 통제할줄 아는 신중한 인물입니다. 申月 金生水를 丑土로 조절하는 것은 無形을 사실화하는 실행력입니다. 火剋金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사회적인 활동으로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행위입니다.
일촉측발과 같은 절묘한 순간에 이기고 지는 전쟁은 火生土를 土生金으로 연결되어질때 역사에 남을만한 공과 업적이 됩니다. 火剋金이 火生土 土生金으로 연결되는 것은 복을복 게임과도 같아 그 변수는 알수가 없으니 마치 주사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申月은 火剋金으로 가치를 만들어 金生水로 유용한 가치가 알려지고 전파되는 것인데 이때의 癸水는 홍일점과도 같은 우상입니다. 丑土는 지도책을 펴놓고 申酉金이라는 광활한 삼국영토를 癸水라는 인물이 제도하고 평정하여 지도를 그려내려는 물상입니다.
申月이 金生水가 우선하고 火剋金이 차선이면 다수에 포함된 한사람으로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면 반대로 火剋金이 우선하고 金生水가 차선하면 백성중에 홍일점이 되어 신선과 같은 새털 부채를 들고 백성을 덕치(德治)으로 다스리는 인물입니다.
육신으로는 인수월령에 재극인입니다. 재가 일점 없었다면 순수학문인 종교나 철학에 몰두하였을 것인데 재극인되었으니 현실적인 시대를 받아 들여 국가 경영과 정책에 뜻을 두어야 합니다. 재생관해야할 재가 재극인하니 세상은 주인이 없는 무질서입니다.
인성월이 재생관받은 생왕한 관으로 관인상생되었다면 이는 태평성대의 강건한 군주국가에서 결제권을 위임받은 관료의 명입니다. 그러나 원명은 재극인으로 시장에서 목소리가 큰자가 가방끈 긴 먹물을 이길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를 배경하고 있습니다.
火剋金으로 재극인되어 육두문자를 쓰는 난세를 일간 癸水는 어떻게하든 인성을 구(救)하여 질서와 체계를 바로잡고자 했을 것입니다. 난세에 죽음을 각오하고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출사표를 황제에게 전하여 후대 신하에게 귀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천지(天地)간에 시대를 만나는 것도 사실이고, 일월(日月)간에 인명(人命)이 행(行)하는데서 운명(運命)은 존재하고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로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 삶입니다. 재극인은 새로운 기회를 여는 열쇠입니다.
재극인을 궁구하다보니 제갈량의 사주가 떠올라 몇자 소견을 써보았습니다. 을사월 임신일에 건대에서 부는 바람은 마치 재극인과 흡사합니다. 보시는 님들도 재극인으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지혜로운 5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제갈량(공명)의 命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