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락서의 기원.
하도,락서에 대한 최초의 명칭은 상서(尙書) 고명편(顧命篇)에서 보이고 다음은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에 나타난다. 상서,고명편에 대옥(大玉) 이옥(夷玉) 천구(天球)는 하도의 동쪽에 서열(序列) 되어 있다고 했고 논어 자한편에서는 공자께서 이르기를 봉황이 나타나지 않으니 황하에서 하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관자(管子) 소신편(小臣篇)에서도 옛 사람은 천명을 받을 때는 黃河나 洛水에서 龍龜가 나타났는데 지금은 삼상(三祥-세가지 상서로움 즉 봉황, 기린, 용구를 말함)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어찌 黃河나 洛書에서 龍馬와 神龜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듯이 고인들의 대다수가 성인이 출현해야 따라서 세가지 상서로움(三祥)이 나타난다고 인정했고 ,또 河圖는 黃河에서,洛書는 洛水에서 나왔다고 인정했다. 주역 계사상전에서도 河出圖 洛出書하니 성인이 이를 관측했다고 한다. 禮記 禮運篇에서도 河出馬圖라 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河圖와洛書를 얻었는가? 고인들의 여러가지 관점을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1. 伏羲씨가 河圖를 받아 팔괘를 그렸다.
尙書의 顧命篇에 대한 설명을 孔安國은 복희가 천하의 왕으로 있을 때 황하에서 용마가 나타나서 그를 보고 팔괘를 그렸으니 이를 河圖라 한다 라고 말하고 있고, 예함문가(禮含文嘉)에 보면 복희씨가 천하에 덕을 베푸니 하늘이 감응하여 三祥이 나타나고, 땅에선 河圖와 落書가 나오므로 易을 만들게 되었다 라고 하였으며 漢書五行志에서 유흠(劉歆)은 복희씨가 하늘을 대신해서 왕으로 있으면서 하도를 받아 그림으로 그리고 관측 한 것이 팔괘라고 기술하고 있다.
2. 황제(黃帝)가 하도를 받아 귀장역(歸藏易)을 만들었다.
竹書紀年에 보면 황제가 임금으로 50년째 되던 칠월 庚申日에 鳳凰이 내려오니 황제께서 洛水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했고 이에 대해 주(注)달기를 黃河에서 龍馬가 나오고(龍圖出河) 洛水에서 神龜가 나왔(龜書出落)는데 하늘의 天神의 문자로 적문전자(赤文篆字)로 새겨진 것을 헌원황제께서 받으셨다(以授軒轅) 라고 했다. 路史 黃帝紀에서는 黃帝 有熊氏가 黃河에서 龍馬를 발견했고 洛水에선 神龜를 보고 河圖와 洛書를 완성했는데 이때 坤爲地를 제일 첫머리로 삼으니 이를 소위 歸藏易이라 했고 또한 황제를 이로 인해 歸藏氏라고도 부르게 된 것이다 라고했다.
3. 요임금께서 용마도를 얻었다(帝堯得龍馬圖).
宋書 符書志에 보면 堯 임금께서 70년 되던 해에 하락의 변에다 제단을 만들고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산 위에 올라 엎드려 비니 용마가 붉은 문양의 상자를 물고 나타나고, 한편 푸른 거북도 아홉개의 문양을 달고 단 앞에 멈추어 甲圖를 吐하고 가니 그 거북 껍질은 넓이가 9척이나 되고 그림은 玉으로 되었는데, 붉은 玉字에 황금가루 같은 것이 묻었으므로 이를 축약해서 하도 낙서라 했다.
4. 순임금이 황룡이 업고 나온 하도를 얻었다(帝舜得黃龍負河圖).
송서 부서지에서는 요 임금이 용마도를 얻었다고 했고, 또 순임금이 황하변에 제단을 차려 제사를 지내니 황룡이 그림을 등에 지고 나왔는데, 그림의 길이가 30척이나 되고, 넓이는 9척이나 되어 제단 옆으로 나가니, 붉은 문양에 푸른 색이 교차해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5. 대우가 낙서를 받았다(大禹受洛書).
竹書紀年에 하나라 우 임금이 황하에서 장대하게 생긴 사람이 얼굴은 흰 데 물고기의 형체를 해 가지고 나오면서 이르기를 나는 하수의 정(精)이 이다 하며 우임금을 불러 가로되 세상에 글을 전하고 황하를 치수(治水)하라 하는 말을 마치면서 하도를 우 임금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치수를 하고 이를 홍범(洪範)으로 삼았다 했고, 漢書 오행지에서는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리다 락서를 받아 그 방법대로 편 것이 구주(九疇)라고 말하고 있다.
6, 성탕(成湯)이 낙양에 이르러 붉은 문양의 글을 얻었고, 문왕이 락서와 하도를 받았다. 成王이 하락을 관람할 때 龍圖와 龜書를 얻었다는 등 수천년에 걸친 하도락서에 대한 전설이 책마다 다르게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같은 하도와 낙서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를 한마디로 답하기는 대단히 어렵고 어찌하든 동양학의 뿌리요, 학문의 根幹과 始原이 이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송대 이전의 고적이나 문헌상에는 하도 낙서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도 기재 되어 있지 않다고 하며 송대 초기의 진단(希夷先生)에 의해서 2천여년 이란 장구한 세월 동안 상실되었던 河圖와 洛書는 물론 先天圖, 太極圖 등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古人들은 일반적으로 복희 때에 황하에서 龍馬가 등에 지고 나온 것이 河圖요, 하우 때에 락수 중에서 神龜가 등에 지고 나온 것이 洛書라고 알고있다.
漢書五行志에서는 복희씨가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하도를 받았는데 이것이 八卦고 하우( 夏禹)가 황하의 홍수를 다스리다가 락서를 받았는데 이것을 배열해 보니 바로 홍범(洪範)이 되었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원대(元代) 오징(吳澄)의 역찬언(易纂言)에서는 황하에서 용마가 등에다 하도를 지고 나왔고 락수에서 신구가 등에다 락서를 지고 나왔는데 이것이 앞의 그림과 같은 고하도(古河圖) 와 고락서(古洛書)라고 말하고 있다. 오징이 설명하는 하도는 복희 황제때에 황하에서 용마가 나왔는데 등에 있는 털이 뒤에는 1,6 앞에는 2,7 좌에는 3,8 위에는 4,9 중앙은5,10으로 되었는데 그 털이 꼬인 형상이 마치 그림을 그린 것과 같아서 도(圖)라 했다고 말하고 있다.
복희가 그 음양의 기우(奇偶)에 대한 수를 관측하여 괘를 그리고 시수(蓍數)를 만들었다고 했다. 낙서는 하우가 치수 할때 낙수에서 신구( 神龜)가 나왔는데 등에 문양이 나타나기를 앞에는 아홉 뒤에는 하나(前九後一) 좌측은 셋 우측은 일곱 (左三右七) 중앙은 다섯(中五) 우측앞은 둘(前之右二) 좌측앞은 넷 (前之左四) 뒤의 우측은 여섯(後之右六) 뒤의 좌측은 여덟(後之左八)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양이 마치 글자와 같이 새겨져 있어서 서(書)라고 했다. 하우는 1에서부터 9에 이르는 수를 넓게 펴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 했는데 이상의 모든 전설을 송대의 구양수(歐陽修)는 모두 배척하여 말하기를 마도(馬圖)나 락구(洛龜)에 대한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괴설 (怪說)로 장구하게 전해 내려왔으나 하나도 믿을 바가 못 된다고 일축했고 이에 따라 청대의 황종희(黃宗羲)나 모기령(毛奇齡) 호위(胡謂)같은 대학자들도 다같이 전설같은 고대의 설화를 부정,배척하고 있다.
*, 하도낙서에 관해 후인들은 고인들과는 다른 여러가지 관점으로 보고 있다.
1. 원래 도가(道家)의 연단양생술(煉丹養生術) 에서 나왔다.
2. 은하계(銀河界) 성운(星雲) 관측에서 유래된 것이다.
3. 고대의 기후 변동이나 방위 관측에서 유래된 것이다.
4. 북두칠성의 두병소지(斗秉所指)하는 이치와 고대 역법(歷法)에서 나왔다.
5. 낙서는 혜성 꼬리의 궤적에서 기원 된 것이다.
6. 하도는 주역 계사전의 천지수(天地數)에서 나왔고 낙서(洛書)도 주역의 수리관에서 나왔다.
이같이 하도낙서에 대한 논설이 분분한데 앞에서 설명한 여섯가지 관점이 공인된 것은 아니나, 앞으로의 설명을 보고 각자 하도 낙서에 대해 각자의 관점대로 인식하기 바란다.
출처 : 하도낙서론(河 圖 洛 書 論) - cafe.daum.net/2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