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월 임수는 금생수하고 토극수도 한다. 만약 무토가 투간되면 토극수를 먼저하고 금생수를 하는 것이고 무토가 투간되지 않으면 금생수하고 토극수하는 것이다.
술월은 순환적인 의미에서 보면 유월에서 해월로 전환하는 절기로 활동을 최소화하고 정신적인 활동으로 전환하는 교차점이다. 주변 干支의 동정에 따라 작용력이 달라질 것이다.
만약 戌土 주변에 亥가 있으면 활동을 멈추고 은퇴나 은닉을 권고하는 것과 같고, 酉가 있으면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모아 늙은 호랑이의 포효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이때 午火가 불러준다면 노익장을 과시할 수 있는 마지막 포효를 할 것이고, 반대로 子水를 보면 이제 그만 죽어라 하는 것과 같으니 물러남이 또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신호와 같은 것이다.
한세대의 시작과 끝이 이처럼 戌月을 중심으로 주변에 타 干支를 만나며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운명인 것이다. 10干 12支를 만나는 작용력의 설명은 소설같은 가설이라 생략하기로 한다.
오늘의 화두는 술월에 임수일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으니 이는 이미 육체적인 활동이 주체가 아닌 정신적인 인물로 시대에 주역이 되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금생수한다는 것은 활동력을 최소화하고 정신적에너지를 활용하는 주체로 살라는 의미이다. 이때 토극수라는 것은 한정되고 제한된 영역에서 쓰임을 말하는 것이다.
술월에 임수는 갑목으로 소토하라는 것은 무한성을 주는 주체로 다음 세대를 준비하라는 메세지를 주는 것이고 병화라는 것의 쓰임은 필요하고 유용한 인물로 등극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그림 동화같은 가설을 제시하는 궁통보감이 주는 상징적인 문구는 사색과 궁리를 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암호문과도 같아 열정만으로 터득되는 것은 아닌듯도 하다.
戌이라는 하루중에 수면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루 일과를 고단하게 하고 지친 몸을 추스리고 재충전을 할 것인지 아니면 밤에 유희를 다시금 즐길 것인지를 판단할 것이다.
사람은 절대 스스로 혼자 무언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주변 환경과 여건에 따라 움직이고 결정하게 되어 있다. 만약 이를 부정하고 하나는 옳도 둘은 틀리다 하면 서글플 것이다.
앞서 술월 임수가 금생수하는 것이 무엇인지 토극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함인데 이때 술월에 무토는 이런 전환기적인 톨게이트 역활을 주재하려 할 것이다.
이는 마치 금생수를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순서와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월에 목생화도 절차가 있듯이 술월에 금생수도 순서와 적법한 절차가 있는 것이다.
금생수는 너무 어렵다. 백과사전을 다 알아야 할만큼 어려운 것이 금생수이다. 마치 인간사에 모든 일에는 적당한 규제와 제한이 있듯이 이를 조절하고 조율하는 것이다.
눈으로 금생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예가 적당한지 모르겠으나 한번 들어나 보자. 사람이 감기가 들었다. 감기약을 쓰는데 아스피린을 100알을 주면 적당할까? 아니면 안될까?
이는 약사만 알것이다. 보통사람은 노란것은 흥분제고 허연것은 아스피린이고 뻘건색은 소화제쯤으로 알것이다. 이것은 금생수를 인식도 자각도 못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약을 얼만큼 써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약사이다. 그러나 금생수는 이런 모든 상식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것과 같다. 현대에 침으로 시술하여 병을 고치는 사람은 부지기수로 많다.
그러나 침이나 뜸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끝에서 상대에게 전이되는 신경을 얼만큼 자극하여야만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감각은 화타만이 안다면 이는 금생수를 방임한 것이다.
어떤이는 금생수를 흉내내는 이도 있을 것이고 어떤이는 그런게 어딧냐고 뻥치지 말라고도 할 것이다. 금생수는 눈으로 보여지거나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이에게는 귀한 성경 말씀과 같고 부처님의 경전과 같은 진리인 것이니 보약과도 같다.
예를 든 것이 거시기 하여 다른 예시를 들어보겠다. 주택청약이 몬지도 모르는 점쟁이가 있다. 주택청약에 대한 제도가 어떻게 만들어 졌고 어떻게 쓰고 어떻게 활용되는지 애매하여 이런 저런 자격과 조건을 맞춰 청약제도 인터넷 검색으로 공부하려니 관심도 없지만 시간도 만만치 않게 깨져 에라이 포기하고 말았다.
역시나 금생수를 모르는 점쟁이다. 차라리 전화해서 조건이 되요 안되요. 물어보고 말지. 전자공학과를 나온 점쟁이가 미분 적분학을 수시로 풀었지만 지금 보면 깜깜이 무소식이니 금생수를 아는 척만 하지 결국은 모르는 것이다.
미분적분학 몰라도 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아들이 하는 말이 그말이 맞다 차라리 응원하고 만다. 아프리카 말을 모르는데 어찌 영어를 안다고 하겠는가 포괄적 범주에서 금생수는 이러한 시대에 모든 제반사항을 다 아는 범주를 말하기도 한다.
이런 금생수를 다시금 금생수하는 것은 알기쉬운 원문의 성경책을 보통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과 같고 부처님 경전을 다시금 쉽게 범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보여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이렇게 설명하면서 이미 토극수를 설명하고 있고 이미 토극수라는 것은 이런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소통하게끔 만드는 톨게이트 역활이니 번역기라고 해두는 것이 적당한 비유인지 모르겠다.
번역기라고 하니 마치 또 착각을 하여 기계식을 말하면 곤란하기도 하고 설명이 부족한 점쟁이 가슴팍만 두둘겨야 할 모양이다. 하여간 음양오행은 설명이 이처럼 구차하고 소설같기만 하다. 이를 비논리라고 한다면 맞는 소리다 현실에서는 필요없는 소설일 뿐이다.
목마른 분들에게는 큰 힌트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편지함에 쌓여진 쓰레기같은 우편물에 불과한 것이 또한 금생수라고도 할 수 있으니 눈하나 있는 동네에서 눈이 두개인 사람이 바보취급 받지 않으려면 조용히 있는 것이 금생수다.
목생화가 시대의 주역이기는 하나 반듯히 언젠가는 금생수가 필요할 것이다. 그들이 간절히 애원하여 찾거든 한마디 할 수는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먼저 금생수가 동한다는 것은 이것은 미친짓에 불과하니 이또한 숨죽이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무토가 임수를 制하는 것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공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임수가 무토에게 극당하는 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사가 주인이라는 것을 정당화 하기 위한 조정작업이나 조율정도가 될 것이다.
갑목이 무토를 제하여 임수의 생을 이끄는 것은 백성이 건강하게 살아가게 하는 지혜를 건네줌이다. 있다 없다는 중요하지 않다. 없으면 때가 되면 하는 것이고 있으면 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뿐이다.
토극수하고 금생수하는 것은 보통사람이 알기 쉽게 이해를 돕는 것이고, 금생수하고 토극수하는 것은 경전을 해독하는 전문가가 되어 군주의 부름을 받기위한 노력과 애씀을 말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복잡하기만 하다. 정치를 모르는데 정치인을 상담하고, 주식이나 펀드를 모르는데 펀드메니져를 상담한다는 것이 늘 부족하고 인간사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삼라만상을 알지 않고 어찌 음양오행을 안다고 하는지 허접한 비유로 범인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마치 재주인양하니 술사는 영원히 학인이 되지 못하고 점쟁이로 머무를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