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누가 피우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남녀간에 바람은 두 사람간에 있어 보통 권태기에서 시작되는 모양이다.
남녀는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려는 노력하는 과정만 존재하지 하나가 되는 것은 꿈일 것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하나가 될 수는 있으나 영원히 하나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 남녀관계인가 보다.
남녀는 두사람이다.
육체가 하나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하면 남녀 둘다 쌍코피 터지는 것이다.
정신이 하나되는 것은 믿음과 사랑인데 의심하고 불신하면 애증과 집착에 불과하다.
두사람이 영원히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에 가지는 희망사항이다.
결국 각자 필연에 의하여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시행착오와 변수에 맞설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남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다.
처음 먹었던 마음이 과정에서 작은 비바람에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헤어짐을 가지는 것이다.
연애시절 이사람 저사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연습게임이니 그럴수도 있다고 묵인하는 문화이다.
이런 문화가 발전하여 이제는 결혼하고 애기 낳고 이혼하는 것은 시행착오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남자와 여자의 만남,
직원과 사장의 만남, 사람과 물건의 만남,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고 필연인 것이다,
이런 모든 만남은 결국 따지고 보면 이해타산에 의해 만나기도 헤어지기도 하는 것이 냉철한 현실이다.
내 마음이 변하지 않았는데 너 마음이 변했다고 하면 배신이라 하고 불신하고 원망하는 세상이다.
탓하는 것은 나이고 불만하는 것도 나이다. 상대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화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 탓과 불만은 결국 작은 소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각하고 부인하고 싶은 모양이다.
바람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인가?
바람이 부는 것은 찬공기와 뜨거운 공기가 교차할때 시작되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전하는 말에 움직이는 이가 있고 움직임에 동요하는 이도 있다.
바람이 불지 않게 하려면 찬공기와 뜨거운 공기가 교차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다.
항시 차거나, 항시 뜨거우면 바람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나서 몸을 부비면 뜨거워 지고, 헤어져 있어 식으면 차가워 지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동물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이성이 있는 사회적인 고등 동물로 인정하는 것은 감사하나,
어찌 배고픈 것을 참으라 하고, 어찌 졸리운 것을 참으라 하고, 어찌 화장실 가고 싶은 것을 참으라 하는가?
선비와 양반은 자제하고 살았다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스님과 수녀는 인내하고 살아갈줄 아는 종교적으로 신성시되는 분들이다. 과연 그럴까?
참는 것은 병인지 약인지 사리가 왜 생겨 났는지 알지는 못한다.
모든 과하지 않는 적절한 인내는 인의와 도덕인데 덜함과 과함은 병이고 흉이 되는가 보다.
사람은 천가지 만가지 생각하는 것이 틀리고 천가지 만가지고 얼굴 생김새도 틀리게 되어 있다.
저마다 다른 존재를 처음에는 동경했다가 결국은 시들어지는 것도 상대가 아니라 결국 나인 것이다.
사랑이 식었다는 것은 내가 식은 것이지 상대가 식은 것이 아니다.
우리네 어머님 세대에는 남편의 바람끼를 혹시나 자식이 모를까 방송을 하셨던 것도 같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면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있어 반듯이 둘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람이다.
그런데 바람피운 남편만 있고 바람피운 아내는 없는 세상에 살아온 듯도 하니 참 묘한 세상이다.
바람이 일어나는 원인이 있다.
바람이 일어나 동요되는 원인도 있다.
사람은 대부분 한 사람의 인연으로 평생을 함께하는 것을 정숙하고 조신하다 귀결짓는 모양이다.
이를 후원한 것이 종교이고 그다음 민심이 따르기 시작했고 나라도 결혼과 이혼을 법으로 다룬다.
남녀의 바람끼는 양방향이 통행이다.
바람끼 있는 사주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바람피울 수 있고 내가하면 사랑이고 너가 하면 외도이고 불장난이라하면 곤란하다.
나는 순수하고 상대는 늑대고 여우라 여기는 것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같은 얼굴이 없듯이 같은 마음도 없는 것이다.
같지 않은 사람이 상대를 존중하고 동경해서 혼자보다는 둘이라는 편리함을 알았으면 그만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편리하고 간편함보다 큰 유혹은 없는 모양이다.
편리를 안다는 것은 불편함으로 가지 않겠다는 기준점과 같아 나름 객관성으로 굳어진다.
내가 봐서는 불편한데 상대가 봐서는 편리하다면 이도 문제이니 공존하는 법이 서툴기만 하다.
이런 서로간에 육체와 정신이 하나되어 의식으로서 함께 공존해야 하는 것이 남녀의 관계이다.
공존이라는 것은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하나라고 하면 이미 둘인 것이다.
둘이라고 하면 이미 하나인 것이 바로 공존하고 공생하는 첫걸음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남녀가 몸과 마음을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생각보다는 많은가 보다.
마음이 통하지 않았는데 어찌 몸이 통하겠나 싶다. 몸이 통하지 않았는데 어찌 마음인들 통할까도 싶다.
상담자의 말을 빌러 표현하면 대개 이렇게들 말한다.
"우린 성격이 안맞아요" "우린 속궁합이 안맞는것 같아요" "원래 저사람 그런 사람이예요"
이런 무수한 말들에 근원은 결국 자기팔자에 있는 것이지 상대에게 있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래도 성질이 머리끝까지 난 분한데 당신의 소홀이라고 하면 서운하고 동조하면 덤이 있는 현실이다.
하여간 남녀간에 소홀하면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여겼으면 한다.
화초에 물을 주면서 화초에게 물어본다. 혹여 소홀한 것은 없는지 안색을 살피고 병색을 물어본다.
남녀가 하나되기를 바라거나 원하는 것이 이미 불행의 씨앗을 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기 보다는 혹여 소홀한 것이나 부족한 것이나 부합되지 못함을 여쭙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다.
소홀해서 부족해서 무엇을 몰라서 화초가 윤기가 없어지면 미안하다.
말하지 못하는 식물이나 눈에 즐거움을 주어 고마운데 그에 부합하지 못해 미안할 뿐이다.
부부가 상생하고 상합하고 살자는 것은 꿈인 것이다.
상생이라는 것은 서로 돕고사는 모양을 옆사람이 보니 그러하다는 것이다.
남녀가 바람을 피우지 않고 행복하게 살려면 상생하고 사는 것인데 서로 미안하다 여기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으면 과신하게 되고 과신하면 명령하게되고 명령하게 되면 굴복시키려는 것이다.
남녀가 재생관으로 상생하고 산다는 것은 한 사람이 양보와 희생에서 사회로 표면화되는 것이다.
여자의 맹목적인 양보를 희생이라면 지나치긴 하지만 여튼 미안한 마음이 없으니 당당한 것이다.
"나는 정말 할만큼 했거든요" "나 만큼만 하라고 그래요" "나 정말 많이 참고 살았습니다"
"이웃이 다 알아요 나 고생하고 사는것"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난 이렇게 정성을 쏟았는데"
좋아 할때는 주변사람의 동의도 없이 혼자 멋대로 좋아하고는,
싫어 할때는 주변사람의 동의를 구해 자신은 정당하고 상대가 틀렸음에 위안받고 싶은 모양이다.
명리는 이러한 사람 살아가는 상식에서 논리와 이론이 정립되는 것이다.
상식이 없는 명리는 거짓이고 사정을 모르고 답하는 것은 현문에 우답이다.
바람이 시작되는 것은 온도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온도를 잘 알아야 한다.
바람은 그져 따끈따끈 해야 삘을 받고 쌀쌀하고 추워지면 혼자 살아 남기에 급급하다.
온도를 알려면 계절을 알아야 하고 계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2절기를 알아야 한다.
한해 농사를 잘 지으려면 24절기에 따른 온도를 잘 알아야 잘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것이다.
절기에 따른 온도는 서당에 훈장선생님이 아시니 고하거나 여쭙고 농사를 지면 되는 것이다.
여쭐때가 없으면 그동안 살아왔던 경험으로 하던지 모르면 감각적인 계절정도는 알아야 한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따뜻하다는 것을 모르면 이글을 읽을 수도 없을 것이다.
온도을 알아야 바람끼가 어떻게 동요되고 시작되는지를 아니 일단 팔자를 잘 봐야 한다.
사주팔자에서 추운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해가 들고 날이 따뜻해야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여름에 태어난 사람은 시도때도 없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서늘해져야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아무리 합충변화도 중요하나 이보다 앞서는 것은 짝짓기할 마음이 동요되어야 한다.
합이 되었다고 해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으면 바람이 일지 않는다.
합은 상호간에 약속인 것이다. 생이라는 것은 함께한 시간과 세월이니 쌓여진 정을 말한다.
마누라와 남편과 함께한 세월만큼 미운정 고운정 들었다는 것은 생인 것이다.
합한 것은 서로 타협하여 계약하고 약속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생한 것은 서로가 교류하며 익숙해진 시간에 쌓여짐이 있다는 것이다.
남자가 식상이 다자해서 바람둥이고 바람끼가 많다는 것은 이곳 저곳 관여할 여인이 많다는 말이다.
이곳 저곳에 관여할 여인이 많다는 것은 오해인 것이다. 그져 오지랍 넓게 참견하는 것이 운명이다.
이런 육신은 사회생활에서 상호간에 역활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우발적인 것은 아니다.
남자는 그져 관심만 주었을 뿐인데 여자는 홀로서지 못하고 기대고 의지하려 하니 넘어진 것이다.
이것을 삼자가 보니 남자는 껄떡였고 여자는 위로 받았으니 쓰러지고 넘어진 것이다.
이것이 과하면 불장난이고, 불륜이고, 외도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랑이고 바람끼인 것이다.
바람끼는 육신으로 살피면 서로 잘못을 구분하기 어려우니 법정에서 심판받아야 하나 보다.
오행으로 살피면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니 이것은 불량을 만든 위대한 조물주에게 물어야 한다.
여자가 인성이 회합하고 군집하여 다자하고, 다현하면 준비된 사람이다.
여자는 절대 꼬신 적이 없고 꼬리친 적도 없다. 그져 기달렸고 고개를 끄떡였을 뿐이다.
그져 이남자 저남자에게 기회를 열어두었고 준비를 해두었다면 응큼녀라고 할런지는 모르겠다.
그져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사회생활에서 배우는 자세로 일관한 당연한 것인줄만 알았다.
정인은 정관이 원하는 것에 부합하려는 준비와 노력을 부단히 하고,
편인은 편관은 다 나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고 단언하니 그는 점쟁이가 분명하다.
편인은 남편은 부실해보이고 편관은 나를 보면 사죽을 못쓴다고 착각을 하고 사시는 모양이다.
이런분은 이래 말한다. "나 좋다는 사람 외면하고 당신이랑 결혼했더니 이게 모야" 모긴 팔자지.
육신은 역시나 코미디하기 딱 좋은 말장난이다.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착각하고 혼란하여 혼돈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람끼라면 그대 가슴에 손을 얹어놓고 생각하기를 권장한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라면 역시나 오행으로 살피는 바람끼가 제일이다.
한습한 사주가 바람끼가 있다는 것은 춥고 외로우니 여기가 따뜻할까 저쪽이 따뜻할까,
가슴에 손넣어 보고 배꼽에 손 넣어 온도를 재어보자고 하니 이를 바람끼라 한다면 본능인가?
사람은 자고로 추운 겨울에 따뜻한 온돌방에 엉덩이 지지고 등짝이 따시면 몸이 노곤해지는 것이다.
등짝이 따시고 몸이 나른해지면 생각나는 것이 잠이면 좋은데 잠도 많이자면 호기가 발동되는 것이다.
바람을 피우고 싶어도 님있어야 뽕을 따는데 ...
마음이 동요되는 것은 무엇이고 님은 무어란 말인가?
마음이 동요되는 것은 온도가 오르거나 내리면 되는 것이다.
님은 극하거나 극당하는 것이 첫째이고 오행으로는 수화와 금목의 관계이다.
목화나 금수로 상생하는 것은 옆에 있는 것이고,
금목과 수화로 상극하는 것은 저짝에 있는 것이다.
바람이 재너머 저짝 동네 처자랑 정분이 났는지,
바람이 같은 지붕 직원이랑 정분이 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토수는 한 솥밭 먹는 식솔과의 만남이니 등잔밑이 어두운 법이고,
수화는 재너머 산너머 차타고 오지게 가야 하니 마음만 더 애 닳기만 하다.
출처 : 바람끼 사주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