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운명이 사주팔자 안에서 살고 있는것이 보여져 그 옛날 용감하고 무모하게도 運命을 아는 易學이라는 현판을 떡하니 내 걸은 것이 금왕절 금태왕한 주변여건을 마치 정묘일주가 현혹하려는 것이 필연이기라도 하였나 봅니다.
금왕절 금태왕한 주변상황에서 정묘하나가 일장당관이 되어 질서를 잡아 보겠다는 것이 곤경에 처하거나 삶에 안정과 희망으로 살고자 하는 분들에게 작은 희망이나 근본적인 권리나 의무를 찾고자 하는데 제대로 답하였는가 싶기도 합니다.
아호보다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김병우라는 이름 석자를 내 거는 것이 그나마 끝까지 양심이라도 져버리지 않는양 최선은 다한다지만 타고난 그릇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서는 그져 어리석은 자가 뻔뻔함도 모르고 떠들고 말하고 사는데 급급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첫번째 숙명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는데 걸린 시간이 아마도 10년의 세월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명 두명 가까운 가족들부터 시작해서 타인의 운명을 아는척 참견해온 세월도 어느덧 또 10년이 흘렀나 봅니다.
결국 나의 운명 너의 운명을 기웃거려 안 것이라고는 사람은 인격이 있는 사람이지 동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격국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니 인간이라는 인격체를 마치 동물취급하면서도 아니라 부정하는 것은 무지함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보려는데 걸린 시간도 만만치 않은 세월이고 그러다 보니 결국 인격체를 동물로 밖에 인정을 하지 않았으니 틀리는 것에 대한 부끄럼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부끄러운 것은 스스로 옳다 여기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동물로 보면 결국 30프로 적중률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다 맞는 것인양 착각하고 이책 저책을 뒤적이며 선배님을 탓하나 봅니다. 사람을 인격체로 보면 그나마 60프로의 적중률을 보일 수 있는데 다 아는양 하는 것이 거짓이고 진실을 외곡하는 양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운명을 아는 역학이 아닌 운명을 모르는 역학이라는 현판으로 바꿀때가 된 모양입니다. 세월만큼이나 사람의 의식이 점점 높아지며 격국이라는 것도 그에 부합되는 논리가 세워져야 하는데 경제문제로 주어진 과업을 미루어야 하는데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인가 봅니다.
사람은 의식이 있는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한낱 오행을 운용하고 합충변화로 사람을 동물취급하는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잣대인줄 안다면 접근하기가 민망스러울 것입니다. 물론 격국이 성격된 것이 흔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방법론이지 정법은 아닙니다.
격국이라는 관점이 세상에 한사람이 어떻게 일조를 하고 살아가는지를 살피는 것이라면 년주라는 것은 삼라만상이라는 자연사적인 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살피는 기준입니다. 일간의 억부라는 것은 고작 한사람이 만물의 영장인양 사는 것에 대한 적용범위일 뿐입니다.
명리를 하는 사람이 보통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져 조금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세상의 이치를 먼저 이해하고 안 것뿐이지 결국 운명은 모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의사는 모든 병을 다 알고 치료할줄 안다고 하나 사실은 상식적인 부분에서 실수하지 않는 의사가 용한 의사입니다.
운명을 아는 것도 결국은 상식적인 부분에서 틀리지 않는 것을 재조명하는 것인데 마치 모든 것을 아는 듯이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범주가 되는데 여튼 하여튼 운명은 아는 것이 아니라 운명은 모르는 것입니다. 변화는 무쌍하니 삼가 운명을 신중히 살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 運命을 아는 易學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