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나 세상이 원하는 것은 재생관입니다. 대개의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원하는 것은 재생관입니다. 시대가 하루가 모르게 발전하고 나아지고 있는 것이 재생관입니다. 몸과 마음이 성장하고, 경제적으로 넉넉해지고, 사회적인 지위도 올라가는 것이 재생관입니다.
또한 재생관은 사회적으로는 사회적인 체제를 이루어 가는 시대의 중심이라면 개인적으로는 사회에 부합하는 선견지명이나 미래관이기도 하고, 때와 상황에 걸맞게 행할 줄 아는 합리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천년의 세월이 하루같이 흘러 가고 있는 것이 재생관입니다.
세상은 재생관으로 역사가 세워지고, 행해지기도 하며 이순간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생관을 개개인의 운명이 잘하고 사나 보려는 것이 술사이고, 묻고자 하는 분은 시행착오를 줄이고자 이곳 저곳에 묻고 확인하여 재생관에 부합하는지 검증받으려 합니다.
개인의 운명은 대개가 재생관으로 사회속에서 일익을 감당하며 열심히 일하다가 노후에는 관인상생으로 퇴직연금을 받는 분도 있으시고 노후에도 젊은 시절 못지않게 생활보장을 받고자 합니다. 백년의 삶을 재생관하고 관인상생하고 살면 이와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개인의 운명이 재생관하고 관인상생까지 된다면 나의 수고로움으로 나의 자손들까지 연금이라는 튼튼한 반석에서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생관은 꿈결만 같고, 관인상생은 특정인에게만 주어진 혜택과도 같아 대부분의 운명이 이리 되지 못하매 구천을 떠돌고 있습니다.
재생관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도 표현하면 어두운 밤길에는 일보 앞에서 등불을 밝히는 안내자와 같다면, 한 낮에는 삼보 뒤에서 행여 혹여 그림자라도 밟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따르려는 충성심입니다. 선견지명과 같은 미래관은 앎과 지혜로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무엇을 제대로 알아야 앞서 걷지 모르니 어두운 밤길을 안내 할 수가 없습니다. 옛 선현의 이율곡처럼 임진왜란을 대비하는 십만양병설은 성급한 발언으로 관철되지 못하였고, 틈틈히 화석정 기둥에 기름칠을 한 것은 요긴하게 쓰였으니 이것이 안내자의 역활입니다.
충성심이라는 것은 나라에 충성하고, 이 사회를 믿고 따르고, 주군을 존경하고, 톱스타를 좋아하고, 흠모하고, 맹목적인 믿음과 신뢰속에서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말합니다. 상황이나 상대의 부족함을 아는 순간 재극인이고 이를 탓하는 순간 상관견관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하니 재생관은 꿈결로 표현해봤고, 관인상생은 특정인에게 주어진 혜택이라 한 것은 세월을 인정하고 문지방이 마르고 닳도록 쓰고 닦아내며 세월의 흔적을 지켜내었고, 땅의 진리에 부합하려 하였고, 시대의 요구에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으니 동작동 국민묘지에 머물기도 합니다.
군주가 아끼는 신하가 되는 것은 우선은 충성심이고, 차선이 충성심에 대한 댓가라는 의미입니다. 고로 재생관하고 관인상생하는 국가에 충성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당연히 동작동 국민묘지에 안착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나 개인의 운명에서는 스스로 객관성이 떨어지나 봅니다.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이 개죽음이라 여기는 국가정서라면 그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국가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축복이고 영광이라는 사무라이 정신이 세계 경제대국의 역사를 보고 계시나 개인의 가정사에 대한 수고로움을 개죽음이라 떠올리는 순간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라와 국가라는 거시적인 시대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이나 가정사와 더불어 개인의 처세에 으뜸은 재생관하고 관인상생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재생관으로 살라고 했더니 재생살하고 있으면서 나 잘하고 있지요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 져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재생살은 이율곡이 임진왜란을 대비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대라는 물결에 너무 앞서라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나서는 순간 제명되거나 제외당하거나, 소외당할 수 있습니다. 오버하는 순간 아무리 그 뜻이 옳다해도 함께하기에는 부담스럽다하여 분수를 알자고 합니다.
물론 재생관을 제대로 하려면 상대적으로 인성이 일간을 생해야 원활한 것인데 이는 개인적인 믿음과 신념을 말하고, 시대의 진리를 믿고 부합하는 가운데 재생관하라는 말과 같으니 개인적으로 무조건 재생관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관인상생하고 재생관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지피지기이면 백전백승이라는 말과 같으니 적을 알고 나를 알아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자명한데 개인의 운명은 때로는 재생살하고, 때로는 재극인하고, 때로는 상관견관하면서 자신은 나름대로의 재생관을 하고 살고 있으니 관인상생해달라 합니다.
재생관으로 이쁜 짓을 해야 관인상생으로 총애와 사랑을 너에게 줄 것인데 그렇치 못하니 미안합니다. 자신 스스로 관인상생하여 재생관으로 행하면 타인과 상대가 관인상생해주는 것이라 이해하고 안다면 백년도 못사는 인생사 두려울 것도 없는데 10년도 못참고 할만큼 했다 합니다.
시대적 기준이 이러한데 개개인의 운명은 이러하지 못합니다. 오랜세월 찾아봐도 개인의 운명이 재생관 관인상생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하지 않은 홍일점인지 찾기 힘들기만 합니다. 대부분 반대가 되는 것이 많고 그러지 못하고 비슷한 것만 볼 뿐입니다.
개인의 운명이 재생관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일이든 믿고 맡겨 볼만한 인물입니다.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를 의심해서는 아니 되십니다. 재생관하는데 비겁이 있어 쟁재하게되면 재생관이 아니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은 재생관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니 모든 사람이 미래관과 충성심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네가 나의 미래관과 충성심에 관인상생해주지 못한다는 불신과 의심이 드는 소리를 비겁이 친구가 이웃이 옆에서 그러니 시대를 믿지 못하고 한 개인을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상황이나 시대를 따르지 못하고, 아군적군을 가릴 수 없는 홍역을 치루는 것과 같아 그 분의 병은 달콤한 사탕을 주는 사람을 아군이라 하고, 쓴 소리하는 친구를 적대시할까 염려스러운 분입니다. 순간은 도움이 되나 훗날을 기약할 수 없는 소인배에 의지하는 것을 희신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재생관하는데 식상이 있어 혹여 상관견관이라 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입맛에 맞는 사람만 찾는 것과 같아, 내 뜻이 통할 사람이나, 내 능력이 먹힐 사람이나, 알아주거나 인정해줄 사람을 원한다는 것인데 세상에 이러한 이치는 없는데 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재생관이라는 것에 뜻과 의지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개인적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충성맹세로 혈서를 쓰면서까지, 너 아니면 난 죽을 것이라는 회사를 사랑하는 노조의 마음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개인사를 높이 평가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원하고 인정해 달라는 것인가 봅니다.
내가 믿바닥까지 다 내보이며 모든 것을 주고자 했는데 너가 나를 알아주거나 인정해주지 않으니 서운한 것입니다. 또한 개인사를 공론화시켜 모두와 함께 공유하고 공론화하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옷을 다 벗고 투명하고자 하는데 너는 왜 이리 불투명한것 투성이냐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공적인것에 사적인 것을 끌여 들이고자 했으니 결국 필요에 의해 공론화될 수는 있으나 그러한 거래는 인연이라는 일대일적인 점조직 관계이고, 재생관이라는 직위서열이나 짬밥을 뛰어넘으려는 성급한 인사를 행하거나 성가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나 마패를 원하기도 합니다.
재생관이 살을 보면 소외되거나 외면될 수 있는 것에서 부터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과 같아 첫째는 이시대나 저시대나 재물이 제일이고, 돈이면 사람의 장기나 목숨도 살수 있으니 이로서 독과점으로 튼튼한 자리 굳히기를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두번째는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남을 만한 살인면허나 면죄부로 무공훈장이면 죽을죄도 사하여 준다하였고, 이도 아니면 나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일에 대한 정보와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없으니 제명되고 후일을 도모하지 못하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소리를 합니다.
여튼 하여튼 점점 어렵게 재생관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재생관 관인상생하고 살아가는데 있어 자신은 재생관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관인상생하여 노후에 대한 대비는 하고 계시는지를 팔자로 따지기 이전에 행하는 의지가 그러고 있는지를 묻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