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재운에 경조사가 많은 것은 가정사나 친지분들이 장성하고 발전하여 세력을 확장되어야 하는 때와 같아 결혼이나 칠순, 팔순 잔치로 자축받을 일에 참여해야 하는데 이번주 주말은 충주 잔치집에 들려 울주(울산옆동네)에 다녀와할 사정이 있습니다.
끈끈이에 붙어버린 새앙쥐처럼 상담하고, 글쓰고, 강의하고만 하고 픈데 노릇과 역활에 소홀할 수 없는 것이 살아가는 과정에 일부인가 봅니다. 여튼 소한의 한파가 아무리 춥다고는 하나 3寒 4溫은 지켜줄 것이는 믿고 이번주는 쉬고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을목이 정화가 습을 말린다는 것은 생긴대로 쓰이거나 활용되라는 의미입니다. 병화는 을목에 습을 끌어 올려 활목으로써 성장을 돕는다면 정화는 재료로서 활용되라는 것과 같으니 걷는 자 옆에는 뛰는 자가 있고, 뛰는 자 옆에는 하늘을 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하니 개그콘서트에 서울메이트 코너처럼 사투리 쓰는 정남이가 가져온 물건이 서울것과 똑같다고는 본질적으로 다름이라는 의미입니다. 을목 병화가 차린 밥상은 정성이 들어가 있다하나 을목 정화가 차린 밥상은 차리거라 수고한 것만이 있을뿐입니다.
이마트에서 똑같이 단순판매인 캐셔를 해도 을목 병화는 웃음과 고객 써비스를 했다고 여기는데 을목 정화는 바코드 찍어 계산하고 카운터에 숫자보고 돈 받고 거스름돈을 내어주는 것으로 여기니 자동화 기계에 사람이 으뜸인지 부품인지의 차이입니다.
비유가 개그수준이라 거시기하긴 한데 여튼 을목여자는 그져 장성하여 병화의 자식을 낳고 자식으로 하여금 보호속에 살아가니 애를 낳은 엄마로서가 절반의 성공이고, 병화를 생하는 갑목으로 의지처로 삼으니 그의 낭군의 애뜻한 정에 꽃이 만개합니다.
혹, 을목 낭군이 육친이라는 동네에서 경금이라 하는데 이는 을목 특유의 성질을 용도변경시키는 것과 같으니 아름다운 꽃과 같은 삶보다는 이웃집 울타리에 흔하디 흔한 잡초처럼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며 세월에 길들여진 종마로 살라는 것과 같습니다.
을목을 옛 선현들께서는 넝쿨로 비유하셨는데 참으로 적절한 비유입니다. 담쟁이 넝쿨과 나팔꽃 처럼 갑목이라는 담장을 타고 오르고, 나무를 타고 오르며 담장보다 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며 덮어 버리니 이보다 적응력이 뛰어난 것은 없습니다.
갑목은 무기토를 의지처로 하나 을목은 갑목을 의지처로 삼는 것을 좋아하니 담쟁이 넝쿨처럼 접착력이 좋고 호박은 더듬이가 나와 휘어감아 오르기 좋아하니 그의 강인한 생명력에는 찬사를 보내나 그 내면에는 각종 벌레들의 온상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습이 지나치게 되면 바이러스가 자라는 온상이 되듯이 휘어감아 오르는 담쟁이 넝쿨의 입새는 대개가 넓적하여 태양의 양기를 흡수하며 내부의 습기를 뿜어 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연사가 사람사는 인간사 속에 녹아드는 것으로 비유해도 똑 같습니다.
을목은 갑목이 있던 없던 휘어감고 오르려는 적응력이고 호기심입니다. 일단 타고 오르고 퍼지는 것인데 주변 환경이나 배경에 적응되어 물도 흡수하고 불도 흡수합니다. 물이 없으면 이슬이라도 흡수하고 불이 없으면 반딧불빛이라도 흡수하며 성장합니다.
이런 뛰어난 생명력을 적응력이라고 달리 표현하고, 물과 불을 흡수하는 집광판과 같은 빨판은 어떻게하든 타인의 관심을 끌어내기도,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앞면과 뒷면을 만드는 은밀함을 만들기도 하니 마치 손과 발이 두개라 마주쳐 온기를 더합니다.
부싯돌은 부비면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손을 비벼 온기를 더하고, 접촉되어 온기를 가두고, 을목은 부드럽고 유연하여 어우러져 부러지기 보다는 뒤엉겨 하나의 결실도 되는 것은 하나의 목적에 여러가지 부수적인 개연성과 유연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을목은 흔하디 흔한 것이고, 손쉽고 손쉬워 심심풀이 새우깡이나 땅콩처럼 부담이 없이 저절로 손이 가기도 하고, 심심풀이 껌처럼 입안에서 오물거리다 벼름빡에 붙었다가 굳어진 것을 다시 떼어서 씹고 싶은 충동은 그져 무료함을 달래는 용도입니다.
만만 하다는 것, 편 하다는 것, 익숙하다는 것만큼 사람을 태만하고 나태하게 만드는 것도 없는데 이래 저래 나쁜 습관에 젖게 하고, 순간에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하니 사람의 욕망과 유희로 인한 향락에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마치 건강에도 않좋은 담배와 술을 왜 하시냐고 묻는 것과 같은데 처음에 어찌하다 시작되었으나 익숙해지면 마약처럼 끊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아닌것은 알겠는데 순간에 유혹에 어제의 습관에서 저절로 담배를 빼어물로 라이타불을 당기는 것입니다.
비유를 이런것에 들어서 그러하지 성인남녀의 사랑에 대한 것도 않하면 그만인 것을 시작한 것이 습관이라 않하고는 몸이 근질근질 간지러워 즐거움과 행복을 원하는 것에 주님말씀은 종족번식 이외의 행위에 대한 집착은 변이 퇴라하나 퇴가 폐라합니다.
잠시도 멈출수 없는 꿈틀거리는 욕망과 습관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악습이라해도 즐거운 것을 어찌할 것이고 좋은 것을 어찌할 것인지, 담배를 하루 정도 굶다 피는 한모금의 담배연기에 핑 돌고 어질어질한 그 기분에 뽕맞은 것처럼 타락하게 하기도 합니다.
담배곽에는 지나친 흡연은 건강을 해칠수 있다하는데도 무시하고, 어떤 담배에는 폐가 썩는 사진이 있어도 무엇이 좋다고 열심히 피워 댑니다. 지나친 음주는 알콜중독이 될 수 있다하고 하는데도 무엇이 좋다고 하루도 쉬지 않고 마시고 마셔 취하고자 합니다.
을목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입니다. 부담없고 손쉬워 만만하여 잠시 한쪽 발만 살짝 걸친다는 것이 끈끈이에 붙은 새앙쥐처럼 붙어버리기도 늪에 빠진 것처럼 빠져나오기가 어지간한 의지로는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악습이고 위안이 주는 마약입니다.
을목은 스토커이기도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강력 접착제와 같이 따라 붙습니다. 어떤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남녀간에 있어 자기는 분명 딱 짤라서 헤어지자 말했다고 하나 표정과 눈빛이 사실이 그랬는지는 상대에게 전달된 느낌은 사실과 다름입니다.
말은 헤어지자고 하고 눈빛은 끈적이고, 어쩌라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안되겠다 만나지 말자 메일에 문자는 했는데 왜 그 옆을 기웃기웃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마음은 그러한데 몸이 붙어서인지 몸이 붙어있는데 마음이 떨어진 것인지요?
을목은 인간사에 가장 큰 안위이기도 행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안위와 행복이 주는 태만함과 나태함이 사회적인 발전과는 상반적으로 나쁜 길로 인도합니다. 사람이 성장하는데는 그에 상응하는 성장통을 겪어야 하는 것을 불편하고 번거롭다합니다.
여튼 하여튼 을목은 병화로 하여금 보호 받고 제도적인 사회적 성향에 성장통을 당연시합니다. 만약 병화가 없다면 끈끈이에 붙은 새앙쥐처럼 악습의 유혹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병화가 없다면 차라리 정화도 없고 화기라는 것은 깔끔하게 없어야 합니다.
어설프게 화기의 냄새를 맡은 것은 오히려 골치 덩어리입니다. 을목은 병화가 우선하고 갑목으로 하여금 의지처가 있어야 내적인 자질이 차지게 되고, 그리고 경금으로 순서에 맞게 배합되어야지 이러한 순서가 이지러지게 되면 해석이 심란합니다.
을목이 임진년은 외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마치 엉뚱한 것이라도 붙어 버릴까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좋은 환경 쾌적한 환경에서 부디 악습에 물들지 않기를 을목에게 바라며 을목은 좋은 것이지 어찌하다가 나쁘게 표현된 것은 글쓴자의 편협된 의지일뿐입니다.
출처 : 을목에 대하여2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