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는 모계혈통으로 이어지는 가정사에서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상호간에 역활이란 것이 있습니다. 모자지간만 해도 엄마의 역활이 있고 또한 자식으로서 역활이 있습니다. 그러한 상호간에 역활이 잘했다 못했다는 수극화가 결정하려는 것인데 이런 하찮은 것을 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금극목되어 인간으로는서는 어찌할 수 없는 감성과 이성으로서 견디어 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죽지 못하고 살아야 하겠기에 어떻게든 자신과 타협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밖에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을 마음에 큰 상처와 병을 얻지 않고는 알지 못할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역활이 한가지만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것은 없겠지만, 대개 이시대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은 작게는 두개에서 많게는 다섯가지 역활도 하니 이런 역활속에 타협할 수 없는 고충과 애환도 있고 결국 납득할 수 없으매 세상을 버리기도, 자학하기도 하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50대에 한 남자 사주의 역활이 관인상생이 되어 있다면 이는 나를 대신하여 가정을 건사해줄 아내가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알아서 가정사를 잘 돌보아 주고 자신을 지켜주니 감사하고 고마움에 존경하는 아내입니다.
그러나 이도 편인으로 인해 관설이 되면 밑바진 독에 물붙기와 같아 밖에 나가 뼈꼴이 빠지게 일해서 돈을 벌어다 주어도 항상 역부족인 가정사를 말하는 것인지, 만족을 모르는 아내를 말하는 것인지, 지켜주기 보다는 부족함과 모지람을 탓하니 의기소침해질 수 밖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대개 편인으로 관설하는 경우 아내도 가정사에 보탬이 되거라 경제적인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여튼 편인으로 관설하거나 인성이 다현하여 관설하는 경우도 있고, 재생관이 되지 않아 관설되기도 하는데 이도 결국 꾸준하지 못하고 수입에 대한 지속력에 대한 문제를 들어내는 것이긴 합니다.
재생관이 관인상생에 이르면 앞서 불편한 문제는 거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자의 입장에 재생관이라는 것은 내 자식을 낳아준 애 엄마를 말합니다. 연약한 중에 자식까지 낳아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당연히 사회적으로 존경받아야 마땅한 것이 애기를 낳은 엄마입니다.
말처럼 관인상생이 어디 쉬운 것이고, 재생관이 어디 그렇게 쉬운 것인가 싶습니다. 재생관은 인성으로 신왕한 일간에게 재성이 존경스러움에 관을 낳고 따르는 것과 같은 것인데 행여라도 근으로 태왕하면 쟁재하니 남자의 힘과 완력에 어쩔 수 없이 재생관하는 애기 엄마의 속셈도 있습니다.
비겁으로 인하여 쟁재하여 관이 재성을 구한 것을 재와 관이 있다하여 재생관이라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역학자의 눈이지, 사주팔자 주인이 사는 법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는 어려운 중에도 참고 인내하며 수고스럽게 살아가는데 편하게 해줄것 같이 남자가 유혹했었다는 암시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수고스럽게 돈벌이하는 것도 힘들고 지겨운데 어차피 해야할 결혼 조금 일찍해서 애 낳고 살다보면 좋아지겠지하고 살다보니 좋아진다면 오죽이나 해피엔딩하겠습니까마는 가는 길이 첩첩이 산중이니 아마도 산중호걸이라 하여 동물에 왕국인 세상이 호락호락만은 않습니다.
애를 낳았으니 길러내야 하고, 애 엄마 애를 낳았고 나는 애 아빠가 되었으니, 애는 혼자 낳은 것이 아닌것도 같고 자식을 위하여 힘들고 험란한 세상에 어떻게든 아이를 길러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내를 수고스럽게 다시금 일터로 내몰아야 하는 남편의 미안함은 마음이고 현실은 고마움입니다.
쟁재가 관을 지켜내면 고마운 것이지만 세상사가 유부녀를 애 엄마를 좋아하는 호환마마와 같은 동물에 왕국의 논리에 다시금 유혹되고 말았으니 모르면 약인데, 알고 목격한 것이 미안함과 고마움이 변하여 분노와 배신, 서운함이 교차하기도 이성으로는 이해하나 감성이 용납하기 힘든가 봅니다.
팔자의 역활이 관인상생보다는 관설, 재생관 보다는 쟁재의 역활이 두번째고, 세번째가 식상생재인데 이는 장성한 아이 둘을 낳은 애 엄마도 여자라고 봐주는 남자의 본능적 연애감정이니 언제나 청춘이라 해야 할 지, 애들 보기 민망하고 남들 볼까 쪼매 닭살같기도 하니 거시기 합니다.
애 엄마는 처녀때도 뚱하긴 했으면서 둘째 낳고 배가 꺼지지 않았데나 어쨌데나 허리 싸이즈가 앞에서 보는 것이 그나마 덜 민망하고, 옆에서 보기 거시기한데도 나이들면 다 이런것이 정상이라나 합리하며, 큰 냄비에 밥 두공기 넣는 것을 보았는데 버리는것 아까워서 남는 것 먹는다나 어쩐다나...
양볼에는 심술보가 구리구리하고, 목이 길어 외롭고 가녀린 사슴이라는 싯귀는 순전히 거짓말이고, 구제역으로 멧돼지처럼 목이 굵고한데도 식상생재는 괜찮다, 건강이 제일이라 하는 것이 몸아파 돈들어 가는 것보다 나은 계산법인지 자연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궁금하시면 옆에 계시는 남자에게 물어 보시는 것이 빠를 것이고 여튼 식상생재라는 것은 적어도 진실로 여자를 돌보고 사랑할 줄 아는 남자의 특권이라고 쓰면 엿장수 마음이라 욕도 먹을 것 같고, 그냥 옆에 있으니 너를 관여해줘야 하는 남자의 의무감이라면 격상시킨 우월감도 듭니다.
식상생재는 남자가 늘 처음처럼 너를 여자로서 이뻐해주고 사랑해주려는 동물적인 남자로서 자연발생적인 현상이기도 한데, 이도 비식이 주도하는 가운데 식상생재해야 넘치는 정열을 사랑하는 그대에 주는 원비와 쌍화탕과 같은 남자이지 식상생재도 어디 그리 쉬운 애기는 아닙니다.
이미 쟁재하는데 식상생재라는 것은 동물의 왕국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한 암컷에게 종속번식을 하기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숫컷의 용맹한 힘자랑인지, 말자랑인지, 선물공세인지, 물질공세인지, 이 시대속에는 무엇으로 여자의 마음에 간택되어야 하는지는 각자 연구해야 합니다.
또한 재생관하는데 식상생재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특별함과 신선함으로 늘 처녀처럼 공주처럼 왕비처럼 대하겠다는 공약남발과 같은데 거참 남자가, 사내가, 가장으로서 여자를 위하고 떠받들고 산다는 것이 그져 좋다는 이유만으로 수고스러움도 자처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역활론을 모르는 이는 한심스럽다 할 것이고, 아는 분이 본다면 납득이 간다 친구가 되려 할 것이고, 이해하는 분이라면 설명하기 난외하여 남의 편을 들기도, 여편네 편을 들기도 할 것인데 결국 남녀이전에 인간의 존엄성과 역활에 비중을 두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이 다쳐 병이 들면 시간이 약이라하나 찌져지고 닫여져 편협되고 편굴되어진 마음이 행여 한 순간 욱하는 성질에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픈 마음 달래가며 시간속에 하늘과 땅을 빙좌하여 모질게 말문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 또한 역활인가 봅니다.
출처 : 육신은 역활론이다?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