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년을 살아가며
지지에 子水 殺도 살운이라고 문상을 자주 접하게 된다.
며칠전 도반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화장터에서 한줌에 재가 되는 것을 지켜 보았다.
주변 온통이 공원묘지에 시야가 머무는 곳은 온통 무덤뿐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산사람은 울다 지쳐 넋이 나간듯이 멍하다.
여기저기 울부짓고 통곡하는 소리에 찡한 마음 가다듬고
냉정을 찾으려 이산 저산 발치와 하늘을 보니 하늘은 평화롭기만 하다.
산사람이 사는 동네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 사는 동네에서 있다보니
산사람이 산사람인지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인지 모호하다.
죽은 사람 동네에서 산사람이 살았다고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자연과 한몸이 되어 호흡하는데 죽는자가 있고 죽는자를 지켜보고
죽는자를 지켜보는 자의 글을 보는 자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이 허망하다.
오행으로 산다는 것이 목화라면 죽음은 금수이다.
살고싶어 사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눈을 뜨니 사는 것이다.
음양적인 관점이긴 한데 목이 산다는 것이라면 화는 죽는 것이다.
금이 산다는 것이라면 수는 죽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하늘의 뜻을 거역하기는 힘든가 보다.
아프고 싶어 아픈자가 어디있고 죽고 싶어 죽는자가 어디있는가,
때가 되니 태어나고 때가 되니 죽는 것이다.
갑을병정 10간은 이순간에도 음양운동으로 오행적 특성을 만들고
오행은 10간을 운행하며 현실로 구체화시키며 시간을 알려준다.
오행의 목생화는 성장을 말하는 것으로 변화되어 가는 발전성이고,
목설화는 목입장에서는 소멸되어 가는 것이고
화입장에서는 소모해 가는 생장이다.
금생수는 수장하는 것으로 거두고 저장하는 것이다.
금생수는 금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수로 저장하는 긍정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금설수는 금이 수로 化하는 것으로 소멸적인 의미를 가진다.
생이 보태는 입장이라면 설은 빼는 입장이다.
생은 생기가 돌고 화색이 돌지만 설은 핏기가 없고 화색이 어둡다.
泄되는 것을 눈으로 익히지 말고 마음으로 보았으면 좋겠다.
生되는 것을 즉흥적인 기분으로 보지 말고 이성적으로 봤으면 좋겠다.
生과 泄 모두 주는자가 있으면 받는자가 있는 음양논리인 것이다.
한사람이 편하고자 하면 한사람은 고통으로 오혈하는 것이다.
목화는 금수로 소모되는 것이고
금수는 목화로 소모되는 것이다.
목화 금수는 결국 하나로 음양운동을 하는데
10간12지는 22개라서 음양으로 가름되기 힘든가 보다.
어여 하나로 보고 어여 음양으로 보았으면 좋겠다.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
육신으로 표현할때 제일 근접한 육신은 식신과 편인일 것이다.
사는 것이 식신이라면 죽는 것이 편인이다.
식신과 편인의 왕쇠에 따라 체감온도는 틀릴 것이다.
식왕인약하면 산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식약인왕하면 죽는것은 두렵지 않은데 몸이 아픈것은 것이다.
결국 똑같은 것인데 몸이 아픈 것인지 맴이 아픈것인지가 문제다.
마음이 아픈것은 알겠는데 몸이 아픈것은 알겠는데 둘다 과하면 문제다.
평하면 인간승리를 이끌것이다.
죽을 만큼 몸이 아프면 죽는 것이 났다 할 것이고,
죽을 만큼 맘이 아프면 이또한 죽는 것이 났다 할 것이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이다.
편인과 식신의 상호관계도 반쪽짜리 음양을 보는 것이다.
편인과 식신이 원인이라면 결과는 살이 일간을 극하는 것이다.
편관이 일간을 극하면 아플 것이다. 많이 아플 것이다.
편관과 일간의 관계에서도 왕쇠에 따라 체감온도는 다르다.
살왕일약하면 한순간에 숨이 멈추어 버릴 것이다.
살약일왕하면 바늘에 찔리는 아픔이 있을 것이다.
식신에게 편인이 와서 편관이 일간을 극하는 것도
단편적인 음양에 불과한 것이다.
고통을 가진자가 있으면 고통을 가한자가 있고
고통을 지켜보는 자가 있고 이런것이 고통이구나를 알게되는 자가 있는 것이다.
팔자와 대운, 세운, 월운과 일진이 만들어 가는 것은 이런 상호관계를 극명히 보여준다.
팔자는 나고 대운은 내가 사는 환경이고 세운은 내가 겪고 사는 것이고,
월은 때를 알게 하고 일은 행하게 한다.
죽은자가 있고 죽음으로 아픈 가족이 있고,
그 가족을 지켜보는 자가 있고, 이글을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차이를 무엇에서 찾을 것인가?
오행과 육신은 이런 음양관계에서 반쪽짜리 껍데기일 뿐이다.
음양오행은 찰라에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다.
육신은 살아가며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한다.
오행과 육신이 인간사에 살아가는 모습을 옆볼 수 있다면
격국과 용신은 역활중심의 기준점을 살필 수 있다.
사회속에 내가, 가정속에 내가, 눈을 뜨고 세상을 사는 내가,
선천적인 기질로서 사회라는 후천적인 기질을 찾아 헤메는 것이다.
이런 상호관계에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기쁘지 만은 않은 것이다.
운명을 안다는 것은 결국 희노애락에 자유롭지 못하다.
세월을 가면 알게 될 것을 미리 알고자 하니 대자연의 질서와
神의 범주를 오락가락하니 술도 물이 되고 물도 술이되는 것을 겪고 산다.
역리를 접하고 흥미를 두면서 조금씩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고
분수를 깨닳게 되지만 상대적으로 점점 꿈을 잃어버리게 된다.
일간은 개인적인 나이고 격은 사회적인 나가 되는데
일간은 약하고 격이 왕하다는 것은
개인적인 나는 무력한데 행하는 것은 전투적이고 도전적으로 살아야 하고,
사회적인 나는 강건한척 모든 것을 수용할 자세를 보이며 여리게 살아야 한다.
때론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에구 허접한 소리 이만해야 겠다.
산사람은 역시나 강건하게 살아서 굳굳하게 살아가야 한다.
죽는 다는 것은 神께 민폐를 끼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