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양력: 1851년 2월 23일 김옥균
음력: 1851년 1월 23일 남자
시 일 월 년
庚 庚 庚 辛
辰 戌 寅 亥
76 66 56 46 36 26 16 6
壬 癸 甲 乙 丙 丁 戊 己
午 未 申 酉 戌 亥 子 丑
사망일시: 1894년(44세, 병술대운 갑오년) 3월 28일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피살당함.
갑목당령,
출생시는 필자가 경진시로 추정함.
생부 김병태는 호군을 지냈다. 유력한 세도가 출신,
6세(1856년, 병진년) 때 5촌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갔다.
11세(1861년, 기축대운 신유년)가 되던 해에 양아버지 김병기가 강릉 부사로 부임하여, 양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그곳의 송담 서원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6세(1866년, 기축대운 병인년) 때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온 후 더욱 면학에 정진하였다.
1870년경 김옥균은 과거에 응시하기 직전에 이미 한성부 북쪽에 있는 양반 거주 지역인 북촌(北村)에 드나들던 중인 출신 한의원 유대치(劉大致)를 통해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872년(22세, 무자대운 임신년, 고종 10년) 문과 알성시(謁聖試)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해 바로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
1873년(23세, 무자대운 계유년, 고종 10년) 최익현 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민비와 고종의 견제로 흥선대원군은 실각.
1874년(24세, 무자대운 갑술년) 김옥균은 24세의 나이로 홍문관 교리를 거쳐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려 옥당 승지(玉堂 承旨)·정언(正言)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1876년(26세, 무자대운 병자년) 2월 김옥균은 동지들을 통해 단체 조직을 설명하고 사회 각 계층의 동지들을 모아 '충의계(忠義契)'라는 비밀 지하 조직을 만들었다.
1881년(31세, 정해대운 신사년) 초 신사유람단에 동행하여 선진 문물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로 한 이동인이 갑자기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12월에 김옥균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본을 시찰하기로 결심했다. 나가사키를 거쳐 1882년 3월 도쿄에 도착했다.
1882년(32세, 정해대운 임오년) 6월 임오군란 후 사후(事後) 대책과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에 의한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자 그 역시 함께 건너가게 해줄 것을 건의하였다. 수신사에는 철종의 부마(駙馬)인 박영효, 김만식(金晩植), 홍영식, 서광범 등 여러명이 임명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영익과 함께 수신사의 고문이 되어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1883년(33세, 정해대운 계미년) 5월 인천항을 통해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개화독립당을 조직하였다. 6월에 고종의 위임장을 받아든 김옥균은 새 희망을 갖고 서재필, 서재창 등 50명에 이르는 유학생들을 인솔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자신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이 수구파와 뭴렌도르프 일파가 음모를 꾸미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1884년(34세, 정해대운 갑신년) 2월 수구파와 묄렌도르프의 계략과 일본의 입장변화를 생각하지 못한 김옥균은 일본 정부가 1년 전에 약속했던 차관 제공에 당연히 협조해 줄 것으로 믿었지만 실패하자, 낭패와 분노를 삭이면서 스스로 여비를 모아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귀국하게 된다. 9월에 추가 병력 모집과 물자 조달 등의 거사준비를 하였다. 10월 12일에 일본측의 동의를 얻어낸 김옥균은 대궐 안으로 들어가 고종과 단독으로 대면하여 밀지를 받아냄.
1884년(34세, 정해대운 갑신년, 고종 22년) 10월 17일 오후 6시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서 거사함. 10월 21일 아침이 되자 다케조에는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일본군은 형편상 오랫동안 조선의 궐 안에 머무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날 안으로 철수하겠다고 통보하고 철병을 강행한다. 10월 21일 오전 청나라 군대가 궁궐을 공격함으로서 거사가 실패함. 10월 24일 인천에 정박 중인 지도세마루 호로 피신, 10월 27일 일본으로 배가 출항함으로서 망명길에 오름.
1886년(36세, 정해대운 병술년) 7월부터 그는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에 유배됨,
1888년(38세, 병술대운 무자년) 8월~1890년 4월까지 홋카이도에 연금을 당함. 그는 이 무렵 두 명의 일본인 게이샤와 연인관계였는데, 이들 게이샤들은 김옥균이 자주 출입하던 술집에서 만나게 되어 그의 금전적, 정신적 후견인이자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1890년(40세, 병술대운 경인년) 도쿄로 돌아와 이후 방탕한 생활을 함.
1894년(44세, 병술대운 갑오년) 2월 말 경 이홍장을 대면하기 위하여 중국 상하이에 도착. 이해 3월에 술집에서 만난 게이샤인 마츠노 나카(松野なか)에게서 딸을 득녀함. 딸 이름은 사다(さだ).
1894년(44세, 병술대운 갑오년) 3월 28일 오후 4시경 청나라 상하이 호텔에서 조선 조정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권총으로 암살당함.
김옥균(金玉均, 1851년 음력 1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후기의 문신, 정치인, 작가이며 구한말의 정치가·혁명가로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우(古遇), 별호는 고균(古筠)이며, 시호는 충달(忠達), 본관은 (신)안동이다. 인조 때 우의정으로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10대 손이다.
1870년(고종 8년) 초부터 유대치,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동인 등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1872년(고종 10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이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일본 유학생 파견과 군사 견습생 파견운동을 주도하였다.
급진개화파로서 1884년(고종 22년)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1]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지냈으나, 여러 차례 테러위협에 시달리다가 청나라로 망명했다. 1894년 청나라 상하이 호텔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후 시신은 부관참시되어 8도에 효수되었으나 1895년(고종 32년) 개화파 내각이 들어서면서 복권되고 순종 때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유대치, 박규수의 문인이다. 충청남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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