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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명문가' |
원제 임정환
2017-10-02 (월) 10:11
조회 :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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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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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조용헌의 '명문가'
- ‘노블레스 오블리주’ 한국의 명문가 9곳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
- 안동 고성 이씨 집안
99칸 ‘임청각’에서 벼슬보다 풍류 즐긴 선비 가문 가문 전체가 독립운동 투신… 독립 유공자만 9명
- 고택에는 집주인의 문화적 취향과 실용적인 목표가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고택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이 바로 고성 이씨의 종택인 임청각이다. 임청각의 11대 종손인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1726~1773)으로 대표되는 고성 이씨 일가는 세속의 욕망을 벗고 인간의 자존을 지키며 풍류를 즐긴 선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400년 전에는 3대가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를 해 삼세유허비를 세웠고 400년 후에는 다시 3대(이상룡·이준형·이병화)가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더 정확하게는 이상동, 이봉희, 이승화,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등을 포함해 아홉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낙동강 상류에 자리 잡은 99칸의 대저택 ‘임청각’ 대문 앞에는 낙동강을 오르내릴 수 있는 유람선의 접안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런 집안이 일제 강점기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만주로 향했다. 집안의 자손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그 후손들은 고아원에서 자라야만 했다. 초대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이 바로 임청각의 종손이다.
정읍 평사리 강진 김씨 집안
명당 중 명당… 학행·덕망 높아 두루 존경 김택술 전 의원·김민균 서울대 교수 등
명당 중 명당에 자리 잡은 강진 김씨 집안의 규당 고택으로 ‘공동체의 평안’이 명당과 명문가를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명당은 하늘이 만들지만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강진 김씨 규당(圭堂) 김영채(金永采·1883~1971)의 집안은 벼슬이 높지 않았음에도 학행과 덕망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강진 김씨들은 전북의 칠보와 태인 일대에서 500년 가깝게 향반으로 알려진 집안이다. 외부적으로 화려한 인물을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실속이 있는 집안이었다. 실속이란 지방민의 존경과 인심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후손으로 김택술 전 국회의원, 김학균 미국 심장병 전문의, 김희균 미국 마취과 전문의, 김민균 서울대 교수, 김병욱 강남 고려병원장 등이 있다.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집안
세종의 5남… 500년 역사 필경재가 종택 '서울시장'만 20명에 이범진·이위종…
-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전주 이씨다. 때문에 전주 이씨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로열 패밀리’로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전주 이씨는 현재 남한에 280만명, 북한에는 140만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조선왕조 역대 왕자의 수는 총 125명이었다. 후손이 끊어진 왕자는 21명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파는 104개다. 이 104개의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많은 파는 ‘효령대군파’다. 약 35만명이다. 그런데 역대 관리를 많이 배출한 파는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파다.
서울에서 500년 내력을 지닌 유일한 고택인 필경재(必敬齋)는 이 집안의 종택이다. ‘필경재’는 ‘반드시 공경해야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한정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필경재는 인조반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 300년 동안 조선의 주류 집안 위치를 지켜왔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한산성 축조를 주도했던 집안이기도 하다.
집 뒤에 남아 있는 43만㎡(13만평) 묘지에는 700여기의 조선시대 묘지가 예법에 맞게 보존돼 있어 가히 묘지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대표적 후손으로는 광평대군의 10대손 녹천(鹿川) 이유(李濡)가 있다. 녹천을 포함해 ‘서울시장(한성판윤)’을 20명이나 배출한 이 집안의 가풍은 ‘수도 방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 대한제국 러시아 초대공사였던 이범진과 이위종 등이 있다.
간송 전형필 집안
일제 때 3大 부자… 문화재 보존으로 독립운동 종로 배오개의 간송집은 한국 미술사의 요람
-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 집안은 ‘문화재 보존’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구한말 10만석 재산을 가진 갑부 중 갑부였던 간송 집안은 일제 강점기에 뿔뿔이 흩어진 문화재를 구입하는 데 재산을 썼다.
간송 집안은 화신백화점을 가지고 있었던 박흥식, 광산을 해서 큰돈을 벌었던 백부잣집과 함께 일제강점기 때 서울의 3대 부자로 알려졌다. 간송 집안은 문화재 소장이라는 한 우물만 팠기에 전란을 거치면서도 책잡히지 않았고, 문화재 역시 오늘날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
간송과 이 집안의 내력을 소상하게 정리해놓은 문건이 최완수의 ‘간송 전형필’이다. 여기에 보면 정선 전씨 채미헌공파인 간송 집안의 중시조는 고려말의 인물인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으로 나온다. 또 간송 집안이 본격적으로 부자가 된 시기는 전성순의 장남 전흥주(1786~1838)대부터라고 한다.
한편 서울 종로 배오개의 간송 집은 한국미술사의 요람이기도 하다. 고고미술동인회가 이 집에서 결성됐다. 1960년 8월 창간된 ‘고고미술’ 제1권 제1호가 바로 이 배오개 집에서 발행됐다. ‘고고미술동인회’가 발전해 오늘날의 ‘한국미술사학회’가 된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간송의 장남 전성우와 차남 전영우가 살고 있다. 장남 전성우 화백은 보성중고등학교의 이사장이고 차남 전영우씨는 간송미술관을 주로 맡아왔다.
/ 서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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