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乙數(1)
중국민족의 기원은 고고학적으로 규명해 볼 때 B.C. 170만년전의 원모인(元毛人)이 시초라하며 이후 남전인(藍田人) 북경인(北京人) 정촌인(丁村人) 상동인(上洞人) 등으로 이어지면서 B.C. 4~3만년전까지 내려온다.
신석기 시대로 바뀌면서 지역에 따라 다른 문화적 계통을 형성하는데 B.C. 7천~6천년경 하남성(河南省) 자산(磁山)의 배리강(裴李崗)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고대문화의 흔적이 나타나고 반파(半坡)지역의 유적은 B.C. 5~3천년전 무렵 황하강(黃河江) 상류를 중심으로 채도(彩陶)문화를 형성했던 앙소문화(仰韶文化)와 B.C. 4500~2300년경으로 추정되는 대문구(大汶口)문화나 황하강 중류의 흑도문화(黑陶文化)가 있었고 또 하(夏)왕조와 연계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용산문화(龍山文化)가 있으며 이어 안양(安養)의 소둔촌(小屯村)에서 발굴된 은허(殷虛)의 갑골문(甲骨文)을 통해 은나라 왕조의 세대(世代)와 이름까지 소상히 밝혀졌다.
문헌적 고찰에 따르면 중국의 상고사(上古史)는 삼황((三皇-복희씨(伏羲氏),여와씨(女媧氏),신농씨(神農氏)), 오제((五帝)-황제(黃帝),전욱(顓頊),제곡(帝嚳), 요(堯), 순(舜))라는 신화적 역사로 채워지는데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오제(五帝)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서 이를 실존의 역사인물로 포함시켰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서 오제(五帝)에 대한 존재여부가 확인된 것은 아니고 실증적으로 확인된 것은 은나라 왕조부터라고 본다.
치수(治水)의 치적(治積)을 통해 민생을 구제(救濟) 구휼(救恤)했고 또 구주(九州)라는 중국의 드넓은 권역(圈域)을 개척했던 우(禹)임금의 하(夏)나라 왕조는 전설로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것을 바탕으로 추정적 발굴단계에 있으나 현재로서 확실한 중국의 상고사는 은나라 왕조부터 실증된다고 본다.
이는 서양철학적 실증논리에 입각한 역사관이고 역사가들의 심증으로 하왕조를 부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사실 중국사에서 고증철학이 발호되기 시작한 시기는 청나라때부터인데 청나라때의 역사가들 중에 은나라 30대 제왕 탕리(湯履)-태을(太乙)에서부터 30번째의 끝임금 주신(紂辛)에 이르기까지 제왕(帝王) 세대(世代)의 년차나 이름 등을 사마천이 사기에 임의로 조작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는데 은허(殷虛)의 반경(盤庚)등지에서 발굴된 갑골(甲骨)과 각종석기(石器) 종정(鍾鼎)이나 기물(器物)등에 새겨진 갑골문(甲骨文)이나 도형(陶形)등에서 은대의 제왕년표(帝王年表)가 사기(史記)의 기록과 글자하나 심지어 숫자하나까지도 틀림이 없는 점에 학자들은 크게 놀랬다. 그야말로 갑골문(甲骨文)이란 타임캡슐은 5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역사적 사실을 우리 눈앞에 진열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甲骨文)의 많은 기록들은 사실은 제사(祭祠)나 점복(占卜)의 결과를 상형문자로 기록한 것들인데 그 당시에 이미 단순한 수의 개념을 뛰어넘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와 12지(十二支)등을 사용함으로서 대수(代數)의 공식(公式)을 터득(攄得)하고 있었다는 점은 가히 경탄(驚嘆)할 일이다.
원래 이러한 기록들을 복사(卜辭)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주역(周易)의 원형(原形)이라고 본다.
상고시대에는 삼역(三易)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역이란 연산역(連山易) 귀장역(歸藏易) 주역(周易) 등을 말한다.
연산역(連山易) 은 하나라때 사용하던 역(易)이고 귀장역(歸藏易)은 은나라때 사용하던 역(易)이며 주역(周易)은 주나라때 사용하던 역(易)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하는데 어찌됐던 역리(易理)의 골간(骨幹)이 달랐던 것이 아니라 이론의 발전상 역리의 구조가 바뀌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를 증빙할 수 있는 것은 한(漢)나라때의 마왕퇴(馬王堆) 고분(古墳)에서 발굴된 주역의 차서도(次序圖)를 보면 주자(朱子)가 제정했다는 현대 우리가 쓰고 있는 주역의 순차(順次)보다는 훨씬 이론에 합리성이 있다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 마왕퇴에서 태을반(太乙盤)이나 육임반(六壬盤)등이 발굴된 것을 보았을 때 이미 한나라때 기문(奇門) 태을(太乙) 육임(六壬)이 일부계층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었음을 징빙해 주고 있다.
주역이 형성된 후 주역은 선진역(先秦易) 한역(漢易) 당역(唐易) 송역(宋易) 및 청역(淸易)이라는 역사적 발전을 거쳐와 완성된 것이 오늘날의 주역체계(周易体係)라고 본다.
이를 볼 때 주역은 그 시대의 문화나 문물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그 수요에 의해서 발전되었고 발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역의 주석(注釋)된 논리 속에는 한 시대 모든 학자들의 사상이 내집(內集)되어 있고 또 자연의 이치를 창명(彰明)한 자연사상(自然思想)이 체계적으로 해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이 주역이 역사적 연구에 의해서 그 논리가 발전되었다고는 하나, 실상은 선진(先秦) 이전에 이미 완벽할 정도로 상(象)과 수(數)에 대한 이치가 천명(闡明)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한(漢)나라 주역, 즉 한역(漢易)을 손꼽는 것은 그 시대의 경방(京房)이 주역의 괘효(卦爻)를 부가시켜 납갑(納甲)의 원리를 발명함으로서 역도(易道)를 대비(大備)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그 이후로는 각 국가마다 철학적 이념과 강령의 모양세에 따라서 주역발전상의 많은 제약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주역의 발전을 수정(受精) 배태(胚胎) 형성(形成)의 과정으로 비해 보았을 때 원시역(原始易)이 생성된 이후 선진(先秦)때에 비로소 큰 발전과 주역으로서의 완전한 체계가 성립됐고 그 후의 발전이란 그 시대의 문물이나 정치체제를 반영한 것뿐이라고 본다.
주역의 발전을 4단계로 볼 수 있는데 4단계란 상(象), 수((數)-(卜)), 의((義)-사(辭)), 리(理)로 사단계(四段階)으로 보는데 후대 즉 한나라를 거쳐 당역, 송역으로 와서는 의리역(義理易)이 발전한 대신에 주역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수리(數理)의 영역이 퇴색되어 갔고, 특히 태을수(太乙數) 같은 경우는 국가의 정책으로 특수요인에게 전수되었던 것이므로 그들과 인맥이 닿던 인연 있는 사람에게만 밀전(密傳) 전승(傳承) 되었다고 본다.
이는 손자병법에서 태을수(太乙數)와 기문수(奇門數)의 중요성을 예시만 해 놓았을 뿐 결(訣)은 비밀로 부쳤으니 그것은 손무자(孫武子)의 계열로 면면히 국가상의 기밀로 밀전 되어 내려왔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은 북송(北宋)의 제왕 중 41년간이란 가장 긴 재위에 있었던 인종(仁宗)이 경우(景祐)년간에 어명(御命)으로 발행한 경우둔갑부응경(景祐遁甲附應經)과 태을금경식(太乙金鏡式) 및 경우육임대전(景祐六壬大全) 등이 서책으로서는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났으나 개인적인 저작은 없다가 명나라에 와서 병법서(兵法書)인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 120권 중에 기을임 삼식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고 명대의 명장 왕명악(王鳴岳) 장군이 저술한 등단필구(登壇必究)에도 기을임 삼식이 기술되어 있으나 유학의 대가로서 기, 을, 임(奇, 乙, 壬) 삼수(三數)를 밝힌 이는 청초(淸初)의 황종희(黃宗羲)가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에서 처음이다.
이는 이미 춘추전국시대 손무(孫武)가 저술한 손자병법(孫子兵法)에 태을(太乙)과 기문둔갑(奇門遁甲)에 대한 이론이 명시되어 있는 것을 부연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孫子兵法에 관한 책으로는 청나라때 출판된 孫子十家書가 손자병법 주석서로서는 백미(白眉)라고 보는데 이중 조조를 비롯한 여러 병법가들의 주석이 있으나 당나라때 사람인 이전(李筌)의 주석이 가장 뛰어나다고 본다)
孫子, 計篇 曰 夫未戰而廟算勝者得多算也 未戰而廟算不勝者得算少也 多算勝少算不勝 而况乎無算乎 吾而此觀之 勝負見矣.
(손자 계편에서 이르기를 무릇 전쟁전 내각 대신들이 군국대사(軍國大事)에 대해 헤아려볼 때 승리할 수 있음은 수(數-算)를 많이 얻었을 때이고 전쟁 전에 이미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수를 적게 얻었을 때이다. 수를 많이 얻으면 이기고 수를 적게 얻으면 이기지 못하는데 항차 수가 없음에야! 나는 이로서 승부를 전쟁 전에 미리 알아볼 수가 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전율(戰慄)을 느끼며 깜짝 놀라지 않는 자는 병법가의 자질이 없는 자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역대 유명한 전략, 전술가치고 이 대목을 읽고 전율을 느끼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수(數) 즉 산(算)의 많고 적음(다소(多少))이란 주산(主算)과 객산(客算)중 어느 쪽이 많고 적으냐란 뜻인데 다음의 주객산 장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전쟁을 도발(挑發)한 쪽이 객(客)이고 방어하는 쪽이 주(主)가 된다. 그러므로 주산이 많은 해에는 전쟁을 방어하는 쪽이 유리하고 객산이 많은 해에는 전쟁을 도발하는 쪽이 유리하다. 정치상의 정당으로 보았을 때는 여당이 주가 되고 야당이 객이 되며 스포츠 경기에서는 홈그라운드팀이 주가 되고, 타지에서 온 경기팀이 객이 된다. 쉽게 말해서 공격하는 팀이 객이고 방어하는 팀이 주가 된다는 뜻이다.
孫子, 形篇 曰 善守者 藏于九地之下 善攻者 動于九天之上 故能自保而全勝也
(손자 형편에서 이르기를 공격에 잘 대비함은 구지(九地)에 해당되는 지역에다 숨기는 것이요 (매복의 원리) 공격을 잘한다는 것은 구천(九天)에 해당되는 지방에서 병사를 일으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능히 스스로를 보호 관찰해서 완승을 거둘 수 있다)
또 전국책(戰國策)이나 오월절서(吳越絶書) 등에서 자서(子壻), 소백(少伯)이 육임(六壬)에 능통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2천5백여년전 전국시대때 이미 기문, 태을, 육임 등을 군국대사에 관여할 수 있는 귀족층에서는 크게 활용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사실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갖고 있었다는 용천검(龍天劍)이 출토(出土)되어 현재 중국 북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2500년 동안이나 지하에 묻혀 있었으면서도 한군데도 녹슬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칼을 현대 제련 기술로는 만들기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점이다. 이러한 모든 사항을 미루어 볼 때 그 당시 문명의 발달이 얼마나 높았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기문(奇門) 태을(太乙) 육임(六壬)을 약칭해서 기을임(奇乙壬) 삼수(三數) 또는 삼식(三式)이라고도 부르는데 태을(太乙)은 군국대사(軍國大事)에 관한 방법론이고 기문둔갑(奇門遁甲)은 용병제적(用兵制賊)하는 방법론이며 육임(六壬)은 일용백사(日用百事)에 관한 점술(占術)의 방법론이다.
그래서 예부터 삼식(三式)을 연구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래도 육임을 연구하는 사람은 몇몇 있었고, 기문은 그런대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으나 태을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주 희소(稀少)했다.
둔갑식(遁甲式)은 구궁팔괘(九宮八卦)를 바탕으로 해서 포국(布局)되는 것이고 육임식(六壬式)은 12지(支)를 바탕으로 해서 포국하는 것인데 태을식(太乙式)은 구궁팔괘(九宮八卦)를 기저(基底)로 하되 실용은 12지(支)에다 건(乾) 곤(坤) 간(艮) 손(巽) 사유(四維)를 사방에 부가(付加)해서 16궁을 설정한 후 복잡다단한 포국을 하게 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일자열전(日者列傳)의 칠가(七家) 중 태을가(太乙家)가 나오고 남제서(南齊書)에서도 태을구궁(太乙九宮)에 대해서 논급하고 있으며 현 중국의 고고학보(考古學報) 1985년 판 제4기에 중국의 저명학자 엄돈걸(嚴敦杰) 선생의 식반종술(式盤綜述)에서 기(奇), 을(乙), 임(壬) 삼수(三數)에 대한 논술을 자세히 했으며 북경대 장기성(張其成) 교수가 주편(主篇)한 역경응용대백과(易経應用大百科) 내에 중국의 저명 역학자 곽비연(郭斐然) 선생이 삼식론(三式論) 전반과 황제음부경(黃帝陰符経)에 대해서도 상술(詳述)하고 있으며 현금 중국 본토나 대만, 홍콩 등의 몇몇 학자들이 삼식(三式)에 대한 논문이나 저서를 간간이 발표하고 있는데 한국만이 가장 낙후되어 이러한 훌륭한 고전(古典)이 있는 줄도 모르는 술객들이 많으니 안타까운 실정이다.
황제내경, 영추, 구궁팔풍편 제77장에 태을식을 의학방면에 응용한 기재가 있고 역위, 건착도에서 태을수를 인용한 대목이 나오는데 한말(漢末) 정현(鄭玄)은 주석하기를 태을이란 천상북신(天上北辰)의 신명(神名)으로 자미궁의 내외를 넘나드는 존성이므로 태을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했다.
성경(星經)에서는 천을, 태을은 천지의 기운을 주관하는 천신으로 천자가 구주(九州)를 순방(巡訪)하는 것과 같이 사방을 순력한 후 중앙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한나라 말기면 2천년 전이고 전국시대면 2천4백년 전이므로 이미 그 때에 기, 을, 임 삼수가 완성되어 특수층이나 정치집단에서 크게 활용하고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에 대해 확증된 것이 1978년 중국 안휘성 부양현 음후묘에서 출토된 부장품 중에 태을반식과 둔갑반식이 나와 문헌에 대한 입증자료가 됐다.
이 비밀의 수는 몇몇 고위층 부류에 의해 밀전되어 오다가 당나라때 왕희명(王希明)에 의해 태을금경식(太乙金鏡式)이란 서책명으로 태을에 관한 책으로는 세상에 처음으로 출판되어 나왔고, 그 후 청나라 초기에 이자명에 의해 내용이 제법 알차다고 할 수 있는 태을통종대전(太乙統宗大全)이 출판되었고 이후 모원의(毛元儀)가 지은 무비지(武備志) 120권 중에 기을임 삼수에 대해서 상론되어 있으며 그 후 명나라 말기때 명장 왕명악(王鳴岳)이 지은 등단필구(登壇必究)에도 삼식이 모두 들어있다.
그 후 청나라 말경 진몽뢰(陳夢雷)가 수집한 사고전서(四庫全書)에 버금가게 방대한 도서집성본(圖書集成本) 중에 태을신수(太乙神數)라는 책이 있는데 이는 태을금경식을 부연한 책이지만 가히 참고할 수 있는 책이라고 본다.
그러나 세상에 나타난 모든 태을수에 관한 서책으로는 태을에 대한 진체(眞諦)를 깨닫기는 힘들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태을수를 통효하면 세계 모든 나라의 정세는 물론 각지방의 길흉휴구(吉凶休咎)를 소상이 관찰할 수 있는 그야말로 천기누설의 비밀수(秘密數)이므로 공개할 수 없는 극비의 학술이기 때문이다.
필자만 해도 기문과 육임은 몇몇 고전에 의해 조금 자득해서 두찬이지만 저서도 있는데 태을수만은 자력으로 터득할 수가 없어 반환하던 중, 은사 허정 송현조 선생님의 소개로 전라도 장성에 은둔해 계시던 구암(龜巖) 김상한(金相漢) 선생님에게 태을은 물론 천문학 전 분야에 대한 깊은 공부를 수업받기로 됐었는데 유고로 한달 만에 급서 하시니(1974년) 선생의 춘추 95세 때였다.
그러므로 선생의 유일무이한 제자 약연 정연승씨가 전라도 화순에 살고 계셨는데 그분이 구암 선생이 저술한 태을수 본을 갖고 있다기에 십년 적공을 해서 얻어봄으로서 태을수에 대해 겨우 혜치(慧齒)가 조금 나왔을 뿐 권형(權衡)의 묘를 얻으려면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인류의 수 만년 역사상 모든 국가든 부족이든 또는 각 개인에 있어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앞날에 대한 기우(杞憂)를 떨쳐 버리기 어렵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문명체계가 성립된 후에는 여러 갈래의 종교 단체가 성립되었고 그 교주는 하나같이 예언자였다고 본다.
어느 나라던 대중이 가장 알고 싶어 열망하는 점은 앞날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며 야망이 큰 사람일수록 앞날을 예견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았고, 정세가 불안하면 할수록 앞날에 대한 대중의 우려는 비례가 높아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이나 잠언 등은 모두 앞날의 예언에 관한 기록이라하며 4백여년전 의학자였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시결로 된 예언은 오늘날의 세계정세까지도 정확히 적중된다고 해서 일본만 해도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때는 도선비기(道詵秘記)가 있었고 이조 때에는 정감록(鄭鑑錄) 비결이 있었으나 체계적이지 못하다고 보는데 중국에서는 구체적 이론 정립이 되어 있는 추배도(推背圖)나 소병가(燒餠歌)가 전해 내려와 이에 대한 주석서가 출판되고 있는 실정이나 모두다 그 이론이 막연해서 미신이라 매도해도 반박할 길이 없는 민간신앙서적이라고 본다.
원래 동양에서는 종교나 도를 평생 닦아 혜지가 열림으로서 앞날을 정확히 예언하는 자의 류를 시사규례(施事規例)라하고 천문학에 의거한 정확한 수리를 통효해서 앞날을 예견하는 것을 육사이화(六司異化)라 한다.
종교적 부단한 수행이나 돈오(頓悟)에 의해서 앞날을 훤히 내다보는 것을 시사규례라 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돈오나 견성(見性) 성단(成丹) 등 쉽게 말해서 도를 통해서 천지의 이치를 꿰뚫어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사규례의 경지에 가서 천지의 이치를 꿰뚫어 보아도 육사이화에 대한 공부는 따로 해서 추수(推數)의 능통해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사규례와 육사이화는 서로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시사규례인 돈오나 견성이 되었다하더라도 육사이화에 대해서는 또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한쪽을 통한 자는 다른 한쪽을 통하기는 아주 용이하다는 점은 있다. 왜냐하면 깨침의 경지는 다 같은 정봉(頂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동서를 막론하고 높은 대덕들의 예언한 기록들을 보았을 때 가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사안이거나 짧은 기간의 국소적인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지 육사이화에서 논하는 것, 즉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상전벽해(桑田碧海), 물환사경(物換事更)과 인류사회에서 일어나는 부단한 변화인 개조환대(改朝換代) 국가흥쇠 전쟁의 기근 병역(病疫)은 물론 개인적인 명리영욕 길흉화복 등의 모든 이치는 육사이화에 해당되는 상수의 범주를 벗어나는 법은 없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안을 크게는 수십만년 작게는 수 천년에 대한 규율을 동양수 외에는 밝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육사이화야말로 수학과 천문학과 역경이라는 큰 학문의 3자 트리오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루어 놓을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본다.
실례를 들어 육사이화의 길을 열어 논 송나라 초의 진단(陳摶 희이선생(希夷先生)) 같은 선생도 중국 8대 신선의 반열에 들어가는 대선사지만 일생을 주역과 모든 술수를 열반하기 직전까지 수불석권(手不釋卷)했고 당일행(唐一行)이나 소강절(邵康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등 모든 역학의 대가들이 하나같이 서세(逝世)하는 날까지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이 모든 고전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육사이화나 시사규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육사이화에 대한 수론으로는 다음과 같이 여러 종류가 있다.
1. 승시산(乘試算)
2. 영산선기수(靈山仙機數)
3. 태을신수(太乙神數)
4. 기문둔갑(奇門遁甲)
5. 대육임(大六壬)
6. 황극경세(皇極經世)
7. 심오산수(深奧算數)
8. 원복점(原卜占)
9. 주역정서법(周易正筮法)
10. 육전대서(六錢大筮)
11. 영기점(靈棋占)
12. 역림점(易林占)
13. 태현점(太玄占)
14. 원포점(元包占)
15. 잠허점(潛虛占)
16. 주공복법(周公卜法)
17. 철판신수(鐵板神數)
18. 역수일촬금(易數一撮金)
19. 금전괘서법(金錢卦筮法)
20. 제갈마전과(諸葛馬前課)
21. 궤혁괘영(軌革卦影)
22. 지주망점(蜘蛛網占)
23. 현무발서(玄武發書)
이상과 같이 20여종이 되는데 이외에 각 민족마다 전통의 특이한 점법이 많다고 하나 필자가 과문(寡聞)하여 그러한 점법들은 모르고 이 20여종의 점법중 심오산수에 대해서는 말만 들었지 어떤 이치인지 전혀 짐작을 못하고 현무발서 영산선기수 지주망점에 관해서는 책을 보기는 보았으나 연구해 본적이 없어 개론이라도 논할 수가 없으며 원복점(原卜占)에 대해서는 주역정서법과 같이 춘추전국시대까지는 겸용했었는데 원래 복(卜)이란 첫째 거북을 잘 골라야 하고 점복용으로 깍고 다듬어 가운데 골을 만들어야(千里路)하며 다음 거북을 태운 다음 갈라지는 모양새의 상하 좌우와 음양의문로(陰陽之汶路) 등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것인데 영구판(靈龜板)의 크기가 천자(天子)는 1척 2촌 제후(諸侯)는 1척, 대부(大夫-장차관급)는 8촌, 선비나 일반인은 6촌으로 규정했으므로 모든 것이 대단히 번거로워 한(漢)나라 이후로는 드물게 사용하다가 당나라 이후로는 단절된 상태라 없어진 것이나 같아 문헌상의 기록만 보았지 실제 경험이 없어 그에 대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나머지 17여가지 점서에 대해서는 개론 정도 논할 수가 있으나 본원고의 사안과는 관계가 없고 또 지면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겠다.
한가지 부연한다면 지주망(蜘蛛網)점이란 거미줄이란 뜻이니 영어로 말한다면 internet 이란 뜻이므로 재미있는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이상의 六司異化論에서 필자의 생각으로는 승시산(乘試算)과 태을수가 단연 백미(白眉)라고 보는데 필자의 나태(懶怠-lazy)함으로 인해 김구암(金龜巖) 선생님 당대로 비전(秘傳)이 끝난 것을 천추(千秋)한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태현점(太玄占)은 서한(西漢) 때의 대학자 양웅(揚雄)의 창작이고 잠허점(潛虛占)은 북송때 대정치가요 자치통감(自治通鑑)의 저자 사마광(司馬光)의 창작으로 가고(可考)할 논리이긴 하나 대국적(大局的) 시야 시세의 적확(的確)면에서는 태을수와 비교가 되지 못한다고 본다.
태을수(太乙數)가 다른 수론(數論)과 다른 점은 천문학과 주역의 구궁(九宮) 팔괘(八卦) 12지(十二支)라는 정율(定律)에 바탕을 두고 태을을 위시해서 주객2목(主客二目) 사보(四輔) 팔장(八將) 주산(主算) 객산(客算) 대유(大遊) 소유(小遊) 5복(五福) 3기(三基) 엄(掩) 박(迫) 관 (關) 수(囚) 격(擊) 격(格) 대(對) 제협(提挾) 사곽고(四郭固) 사곽두(四郭杜) 등의 이합취산(離合聚散)하는 정황을 살펴 길흉을 판단하는 고도의 수학이론이므로 초학자는 세사(世事)의 운기(運氣)를 추고(推考)하기가 매우 난해할 것이나 원래 세상은 복잡다단한 것이므로 세상만사를 살펴 알아보는 수론(數論)이니 만치 복잡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 수가 판에 박은 듯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역이나 천문학 외에 많은 경륜을 쌓은 자만이 판단에 정확성을 기할 수 있는 그야말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차원 높은 학설도 세칭(世稱) 술수지왕(術數之王)이라 불리는 것은 그만큼 불가사의한 신비한 신수(神數)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수천년 전에 어떻게 이러한 신수(神數)를 창안했는가가 더욱 불가사의하다고 본다.
태을식(太乙式)은 천지의 시발점으로 추소(追溯)해 올라가 (천지지시로 추소한다하나 현대천문학을 모르던 옛날 사람들의 개념이고 1천만여년전부터 수를 시작하는 것은 지구가 오늘날과 같은 정제된 기점을 표준 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一로부터 시작하므로 일명 太一이라고도 부르는데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의 저자 황종희(黃宗羲)는 太一이라 쓰고 있다) 이러한 수가 중적(重積)되는 동안 각종의 천지이치에 관한 절율(節律) 一式中에 회집(滙集)되고 분산되는 가운데 각종의 길흉휴구(吉凶休咎)가 생겨나는데 그것은 천체의 운행이란 각성(各星)이 궤적(軌跡)에 의해 순행(循行)되는데 그 중에서도 일(日), 월(月), 성신(星辰)의 주기적 운전(運轉)과 지구의 자전(自轉) 및 공전(公錢)에 의해 年, 月, 日, 時 라는 시간이 존재된다.
이 시공성(時空性)이 바로 우주운동과 변화의 섭리고 따라서 변화되는 인류사회의 발전과 퇴보 역사적인 사건 천재(天災) 인화(人禍) 길흉화복 등 모든 것이 하나같이 천체의 운동과 관계되어지지 않는 것이 없어 인간의 사상(思想) 행위결책(行爲決策)까지도 모두 천도지사연(天道之使然)이지 인간 자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數)를 깊게 연구한 사람이라면 자연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古人들이 하나같이 모든 만사를 하늘의 섭리라고 말한 것은 무궁한 의미의 발로인 것이다.
기문(奇門)에서는 년가(年家) 월가(月家) 일가(日家) 시가(時家) 등 四家가 있듯이 太乙에서도 년계(年計) 월계(月計) 일계(日計) 시계(時計) 등 사계가 있다.
태을 사계도 기문과 같이 음양이둔(陰陽二遁)이 있는데 年計, 月計, 日計는 양둔(陽遁)만 사용하지만 時計는 음양이둔(陰陽二遁)을 다 사용한다.
또 太乙式에서는 추수(推數)와 계수(計數) 두 가지 방면으로 추산하는데 이는 주역이 극수지래(極數知來)의 핵심 논리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출처 :잠 & 깨어남
원문보기▶ 글쓴이 : 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