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김모씨(44)는 얼마전 우연히 인터넷 작명소에 들러 아들과 딸 이름을 감정(鑑定)하고는 하늘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름에 써서는 안 되는 한자가 들어 있어 불행해진다. 단명할 수도 있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김씨는 불길한 생각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어 개명하는 길을 찾고 있다. 최근 법원에 개명(改名) 신청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해 11월 “범죄은폐 등 불순한 의도가 없다면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해 원칙적으로 개명을 허가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결정이 나온 뒤의 일이다. 때맞춰 개명 허가를 받아내기 위한 ‘비법’을 소개하는 인터넷모임이 활기를 띠고 있다. 개명 대행업소나 작명업소도 바빠졌다.
도대체 인간에게 이름이란 뭘까. 이름만 좋으면 만사형통할 수 있을까. 좋은 이름이란 어떤 이름일까. 30년간 작명연구를 해온 정보국씨(51·정보국작명연구원 원장 www.nameok.co.kr)를 만나봤다. 그는 독창적인 작명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한 ‘작명보감’ ‘작명대전’ 같은 책도 펴냈다. 정원장은 특히 이름과 관련한 일반인의 잘못된 지식이나 선입견을 바로잡는 데 앞장서고 있다. ‘엉터리’ 작명가의 장난, 이에 따른 국민의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다.
-이름이란 무엇입니까.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까.
“이름이란 개인을 표시하는 브랜드요, 상징입니다. 이름이 운명을 전적으로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운명에는 생년월일시와 출생장소, 부모의 환경, 타고난 신체적 특성, 이름, 마음가짐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게다가 이들 요인 중 이름의 영향력은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중에는 장삿속으로 개명·작명을 유도해 돈을 벌어보려는 작명가가 많습니다. 이름을 감정하면 무조건 나쁘다며 겁부터 줍니다.”
‘사이비’ 작명가의 장삿속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화가 하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이름이 어떤가 하고 유명하다는 작명가를 찾아갔다가 딸도, 아들도 모두 나쁘다고 해서 많은 돈을 주고 모두 개명했다. 몇 년이 지나 궁금한 게 있어 다시 찾아가 가족의 이름을 내놓으니 “누가 이런 이름을 지었어. 다 바꿔” 하더란다.
-이름은 어떻게 짓습니까. 작명원리가 있습니까.
“작명법에는 수리학, 음성소리학 등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수리학이란 1부터 80까지 숫자마다 길흉이 정해져 있다는 전제 아래, 이름의 한자 획수를 거기에 맞춰 지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불길(不吉)문자’ ‘불용(不用)문자’라 해서 특정 한자를 이름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거나, 이름 한자의 뜻이 좋아야 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사주팔자에 부족한 오행(五行)을 넣어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로울지는 모르지만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오랜 경험에 비춰볼 때 이들 전통적 이론은 현실과 맞지 않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음성소리학을 중시합니다. 소리오행을 바탕으로 작명하는 겁니다. 우리가 쓰는 한글도 소리글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아직 수리학이 ‘득세’하고 있는 데다 고객의 요구도 있어 참고는 합니다.”
그렇다면 소리오행 같은 작명원리에만 맞으면 좋은 이름일까. 정원장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그는 먼저 부르기도, 듣기도 좋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째, 남녀 성별 구분이 분명하되, 현대감각에 맞게 세련돼야 한다. 셋째, 한자는 쓰기 쉬워야 한다. 넷째, 너무 흔하지 않으면서 매일 불러도 싫증이 나지 않는 이름이라야 한다. 이상한 형상이나 뜻을 연상시켜 놀림감이 되는 이름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컨대 고민아, 김말세, 김새라, 남주나, 안경원, 여성기, 유석두, 유종로, 유조선, 이건성, 이병원, 장의사, 정지선, 조지나, 지남철, 지정석 등이다. 대개 돌림자를 고집한 결과다. 정원장은 돌림자도 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엉터리 작명소를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은 뭔가요.
“일반인이 믿을 만한 작명소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면, 인터넷 작명소의 경우 먼저 게시판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담하고 있는지, 상담내용이 건전한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사이트 운영자가 직접 작명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작명가가 없는 작명소도 있습니다. 작명 관련 저서 등이 있는지도 참고해야 합니다. 특히 이름에 쓰면 좋지 않은 한자가 있다면서 겁주는 곳은 피해야 합니다. 고객 중에는 이런 말을 듣고 상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근거없는 주장인 만큼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정원장은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나 저술 내용을 표절한 인터넷 작명소와 작명가 10여명을 상대로 고소 등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정원장의 이론 중 핵심적인 부분을 마치 자신의 이론인 양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작명업이 돈벌이가 된다고 하니 실력도 없으면서 마구 뛰어들고 있다는 증거다. 이들 중에는 ‘유명인사’로 알려진 작명가도 있다.
-개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먼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호적에 올린 이름은 아예 감정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봅니다. 저는 또 작명원리나 좋은 이름 기준으로 볼 때 ‘크게’ 나쁘지 않으면 그냥 사용하라고 권합니다. 이름이란 인간의 운명에 극히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호적상 개명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객의 뜻이 강하면 ‘예명’을 만들어 일상생활에 사용하길 권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아기 작명을 요청할 때 무엇을 주문하나요.
“주문하는 것이 많습니다. ‘부르고 기억하기 좋으면서 흔하지 않게’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게’ ‘행복하게 살게’ ‘적성을 살려 전문가로 성장하게’ ‘자신의 일을 즐기면서 사회에 공헌하게’ 등입니다. 부모로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같은 요구에 맞는 이름을 짓기란 쉽지 않습니다. 고객이 제시하는 여러 조건에 맞춰 작명하면서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저는 고객이 이런저런 요구로 나를 괴롭힐 때 스트레스와 함께 쾌감도 느낍니다. 신세대 감각이나 시대 추이도 감지합니다.”
정원장은 아기 이름 때문에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갈등하는 사례도 많이 봐왔다. 세대간 생각 차이가 큰 탓이다. 싸움 끝에 일단 며느리가 굴복하더라도, 시아버지가 세상을 뜨면 바로 이름을 바꾸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정원장은 경북 상주에서 나서 자라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인테리어 사업을 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역학과 성명학을 접하고 점점 빠져들었다. 이름난 선생을 두루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결국 31살 때인 1986년 사업을 접고 아예 작명가로 나섰다. 그러나 한때는 생활이 어려워 ‘로뗑’(길거리에서 운명감정을 하는 것)도 해야 했다. 지금은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재택근무한다. 작명 신청은 인터넷과 우편으로만 받는다. 흔한 광고 한번 하지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고 작명을 의뢰하는 고객은 많다. 연간 작명건수는 800~1,000건에 이른다.
“공부에 대한 욕심은 많아도 돈 욕심은 없습니다. 현재 생활에 만족합니다. 아기 작명전문가로서 아이가 평생 가지고 살아갈 좋은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인터뷰/노응근 편집국 부국장 han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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