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정치거물 이었던 윤치영(尹致暎) 이의 명조이다 .
庚 甲 甲 戊
午 辰 寅 戌
前車之覆後車之鑑(전차지복후차지감)의 物象(물상)이요, 旣知如此何必如此(기지여차하필여차)에서,줄어든 획수이요, 不入虎穴焉得虎子(불입호혈언득호자)리요 하는 물상으로 되어지는 모습이다 역시 眼看明月落人家(안간명월낙인가)에서 변화되어온 모습이기도하다 이렇게 銜字(함자)가 변수가 많은 銜字(함자)로서 좋은 物象(물상)을 가리키고 있다
사주 역상은 택산함괘 상효동작 咸其輔頰舌(함기보협설)= 정감애무하는상이 뺨을부비고 혀로서 애무하난 상태이다 상에 말하대 정감을 도우는 방법이 뺨을 서로간 부비고 혀를 빠는행태는 입을 갖고선 즐거움에 오르는 모습인지라 그 사랑 행위가 극도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이요 그 五爻(오효)의 짜릿한 맛을 느끼고 난 다음 미련이 남아선 後食(후식)으로 과일을 먹는 상태와 같다할 것이다 咸(함)은 兌金宮(태금궁)所以(소이) 口舌(구설)本宮(본궁)괘이고 그 印性(인성)進就(진취) 精神的(정신적)交感(교감)이 上達(상달)한 모습 文化(문화)繁榮(번영)의 꽃을 피우는 것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物象(물상)은 참으로 좋아선 柳暗花明別有天(유암화명별유천)이다 소이 꾀꼬리 봄 버들 가지에 올라선 시절을 노래한다는 것이라 五柳(오류)居士(거사) 陶淵明詩(도연명시)를 연상시킨다할 것이다
甲戊庚(갑무경)貴人(귀인) 兩甲(양갑)두마리 꾀꼬리가 寅辰(인진)木氣(목기)버들 寅午戌(인오술)로 활짝 핀데 올라선 그렇게 별천지를 이룬 모습이라는 것이리라
보물이 될 려면 산삼하고 황금덩어리는 처음 본 사람도 신기하게 여기고 귀하게 여긴다는데 이런 명조는 장님이 코끼리 만져보는 방식을 따른다하여도 그 좋은 것을 알 것이다 학문을 꺼구로 배워도 그런 방식으로 맞춰보아도 좋다는 것이리라 명리에 초학자도 대박 알아볼수있는 좋은 명조라는 것이리라
庚 甲 甲 戊
午 辰 寅 戌
天干(천간)에 甲戊庚(갑무경) 天上(천상) 三奇(삼기)가 들고 寅午戌(인오술) 火局(화국)을 理由(이유)맞게 지었으니 틀림없는 貴格(귀격)의 사주이다
젓가락 兩甲[양갑]이 卯字(묘자)를 拱挾(공협)하였는지라 東方(동방)精氣(정기)도 모두 완전하다 그야말로 木火(목화) 通明(통명) 傷官(상관) 傷(상)盡(진)된 모습이라 庚字(경자) 七(칠)殺(살)을 제거하고 조종하는 好(호)貴格(귀격)의 사주라 할 것이다 年干(년간) 달이 재물이 되었으니 비겁과 나누어 쓰는 재물도 록록 하였으리라 보는 바다
함자를 보면 성씨가 庚字(경자) 속에 들었는데 꼬리를 갈라선 안전을 도모하고 섰고 그 바윗집 엄자를 뒤집어 썻는데 義(의)闕(궐)[대궐 문이 메어지도록 金章(금장)과 紫綏(자수) 차림으로 드나 든다는 것이리라]이 그 갓끈을 늘어트린 모습이라 刀劍(도검)을 찬 형국이니 그 위권을 쥔 모습이라는 것이고 , 致暎(치영)이라- 兩(양)甲(갑)이 날 꽃뿌리 근원을 이루었다는 뜻인데 꽃뿌리는 영웅을 의미하는 것으로 寅午戌(인오술)화국 꽃이 피었다는 것이요 소위 暎字(영자)는 그日干(일간)이 英雄(영웅)의 근본이 된다는 그런 이치이다 영화를 상영한다는 그런 의미도 되는 그 비칠暎字(영자)이다
영사기 寅(인)가 甲甲(갑갑) 화면에 대고 화려한 꿈의 영화를 지금 상영중이라는 것이리라
致字(치자)는 다다를 至字(지자) 지탕할支字(지자)로 이뤄 졌는데 所謂(소위) 地支(지지)에 다다른 다는 의미임 地支(지지)에 다달으어선 暎字(영자= 날일 변에 꽃뿌리 영자이다) 꽃을 활짝 피웠다는 그런 의미이고[寅午戌(인오술) 火局(화국)으로 꽃을 피운 것을 말함] 그 임금을 잘 지탱 시키는 그런 형상의 글자이다
* 윤치영 약력, 호 동산(東山).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 ·조지 워싱턴대학을 거쳐 1934년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9개월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고, 광복이 되자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비서실장을 필두로 제헌의원과 제2 ·3 ·6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초대 내무장관 ·대한국민당 당수 ·민주공화당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과 1968년 2차례에 걸쳐 민주공화당 의장을 역임하면서 그는 격동기 한국정치의 한가운데에 서왔으며, 특히 1963년에는 박정희(朴正熙) 최고희의 의장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民政)에 참여토록 하였다. 이후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국토통일원 고문 ·안중근의사 숭모회 이사장 ·국회의원 동우회 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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