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가 명택] 경주 최부잣집
경주 최부잣집9대 진사 12대 만석꾼
배출한 재력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잣집에 내려오는 200년 전통의 가훈이다.
부불삼대(富不三代,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란 말이 있다. 최근 들어 우르르 무너지는 재벌들을 보면서 이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100년은 유지될 줄 알았던 한국의 재벌들이 허망하게 넘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부자가 3대를 넘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세간사(世間事)의 이치를 절절히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의 부는 이루는 것도 빠르지만 망하는 것도 신속하다. ‘졸부(猝富)는 졸망(猝亡)’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싶다.
과연 3000리를 내려가는 백두대간의 유장한 산줄기처럼 3대를 훌쩍 뛰어넘어 오래가는 부자가 한국에는 없단 말인가! 수십, 수백억원을 삽시간에 벌어 당당한 사업가 행세를 하던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경주 최(崔)부잣집을 생각하게 된다.
최부잣집은 유장한 부자, 즉 졸부가 아닌 명부(名富)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집안이다.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연이어 만석을 한 집으로 조선팔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집이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좀처럼 깨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기록일 성싶다.
3대 부자도 어려운데 어떻게 12대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그렇게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면 반드시 집안 나름의 경륜과 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문을 품고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늦은 오후, 경주 교동(校洞) 69번지에 주소를 둔 최부잣집에 도착했다.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도 교동 69번지는 특별한 장소다. 원래 이 터는 신라의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 오른쪽 옆으로는 신라 신문왕 2년부터 자리잡은 계림향교(鷄林鄕校)가 있고, 뒤편으로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어려 있는 계림(鷄林)이 자리잡고 있다. 또 왼쪽 뒤편으로는 내물왕 무덤을 비롯한 5개의 커다란 봉분이 작은 동산처럼 누워 있고, 거기서 좀더 왼쪽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살던 재매정(財買井)이 있다.
이렇게 최부잣집은 주위가 온통 신라 신화와 역사의 자취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집터 자체가 박물관 분위기를 풍기는 듯하다.
최부잣집의 가훈
최부잣집에서는 대대로 가훈처럼 지켜내려온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다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를 차근차근 곱씹어보면 최부잣집의 향기가 배어 있다.
‘첫째, 진사(進士)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은 한마디로 정쟁(政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다. 조선시대 진사라는 신분은 초시(初試) 합격자를 가리키는데, 벼슬이라기보다는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요건에 해당한다. 쉽게 말하면 ‘양반 신분증’이고나 할까.
최씨 집안은 진사는 유지해도 그 이상을 넘어서는 벼슬은 꺼렸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감옥이 가까워진다는 영국 속담처럼, 조선시대는 벼슬이 높아질수록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쟁에 휩쓸리기 쉬웠다. 한번 당쟁에 걸려들어 역적으로 지목되면 남자는 사약을 받거나 아니면 유배형을 당했고, 그 집안 여자들은 졸지에 남의 집 종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것이다. 아마도 최씨 집안에서는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한다는 것은 멸문지화에 접근하는 모험으로 여겼던 것 같다.
최부잣집의 둘째 원칙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다. 만석은 쌀 1만 가마니에 해당하는 재산이다. 돈이라는 것은 한번 모이면 가속도가 붙는 ‘이상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최부잣집은 만석 이상의 재산 불가 원칙에 따라 나머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였다. 환원 방식은 소작료를 낮추는 방법이었다. 당시의 소작료는 대체로 수확량의 7∼8할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최부잣집은 남들같이 소작인들로부터 7∼8할을 받으면 재산이 만석을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그 소작료를 낮추어야만 했다.
예를 들면 5할이나 그 이하로도 받았다. 이 정도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주변 소작인들은 앞을 다투어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기들은 혜택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저 집이 죽어야 내 집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집이 살아야 내 집도 좋아진다는 상생(相生)의 현장이 구현된 것이다. 사촌이 논 사면 내 배 아프다는 속담과는 전혀 다른, 진정으로 아름답고 통쾌한 풍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둘째와 같은 맥락의 가훈이 넷째 ‘흉년에 논 사지 말라’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어 아사 직전의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우선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논값을 제대로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흰 죽 한끼 얻어먹고 논을 내놓았다고 해서 ‘흰죽 논’이란 말도 있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쌀을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들로서는 이때야말로 논을 헐값으로 사들여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상극(相剋)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이것을 금했다. 이는 양반이 할 처신이 아니요,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자가 흉년에 논 사면 나중에 원한을 사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다. 헐값에 논을 넘겨야만 했던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두 수 앞만 내다보면 그 원한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것은 불문가지다. 최씨 가문은 도덕성과 아울러 고준한 지혜를 가졌던 듯하다.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삼강오륜과 예를 강조하다 보니 사회분위기가 자칫 경직될 수 있었다. 그 경직성을 부분적이나마 해소해주는, 융통성 있는 사회 시스템이 바로 과객을 대접하는 풍습이 아니었나 싶다. 요즘같이 여관이나 호텔이 많지 않았던 사회에서는 여행을 하는 나그네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양반집이나 부잣집의 사랑채에서 며칠씩 또는 몇 달씩 머물다 가는 일이 흔했다.
이들 과객들의 성분은 다양하였다. 몰락한 잔반(殘班)으로 이 고을 저 고을의 사랑채를 전전하며 무위도식하는 고급 룸펜이 있는가 하면, 학덕이 높은 선비나 시를 잘 짓는 풍류객이 있고, 무술에 뛰어난 협객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풍수와 역학에 밝은 술객들도 있어서 주인집 사람들의 사주와 관상을 보아주기도 하고, ‘정감록’이란 참서로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주인양반은 온갖 종류의 과객을 접촉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여행이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이들 과객집단은 다른 지역의 정보를 전해주는 메신저 노릇을 하였으며 여론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최부잣집에서는 이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자. 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천석 정도. 이 가운데 1천석은 집안에서 쓰고, 1천석은 과객을 접대하는 데 사용하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썼다고 한다. 1년에 1천석을 과객접대용으로 썼다고 하니 당시의 경제규모로 환산해 보면 엄청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최부잣집에서는 과객을 접대하는 데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과객 중에 상객(上客)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매끼 ‘과매기’ 1마리를 제공하고, 중객(中客)에게는 반마리, 하객(下客)에게는 4분의 1마리를 제공하였다. 과매기는 전라도나 충청도에는 없는 경상도 특유의 음식으로 포항, 울산 지역에서 나는 마른 청어를 가리킨다. 현재는 마른 청어 대신에 마른 꽁치를 과매기라고 부르는데, 주로 날씨가 추운 겨울에 제 맛이 난다.
최부잣집에 과객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00명까지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에서 수용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설 때는 최부잣집 주변에 있는 초가집(노비들이 사는 집)으로 과객들을 분산 수용하였다고 한다. 부득이 노비집으로 과객을 분산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그 과객에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과매기 1마리와 쌀을 주어서 보냈다.
과객이 최부잣집에서 쌀과 과매기를 가지고 주변의 노비집으로 가면, 그 노비집에서는 무조건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도록 룰이 정해져 있었다. 과객들을 접대하는 대가로 노비들은 소작료를 면제받았다. 최부잣집에서 50∼60리 멀리 떨어져 사는 노비들은 소작료를 제대로 내야 했지만, 인근의 노비들은 과객 대접한다는 공로로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100리 안에 굶는 이 없게 하라
밤을 지내고 떠나는 나그네는 빈 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과매기 한 손(2마리)과 하루분 양식, 그리고 노자를 몇 푼 쥐어 보냈다. 어떤 과객에게는 옷까지 새로 입혀서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최부잣집이 과객대접에 후하다는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입 소문을 타고 조선팔도로 퍼졌다. 강원도 전라도는 물론 이북 지역에까지 최부잣집의 명성이 퍼졌다고 한다.
이는 결국 최부잣집의 덕망으로 연결되었다. 중국에 3천식객을 거느렸다고 하는 맹상군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1년에 1천석의 쌀을 과객에게 대접하는 최부자가 있었던 셈이다.
최부잣집의 덕망은 여섯째 원칙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데서도 나타난다. 경주 교동에서 사방 100리라고 하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고, 남쪽으로는 울산까지, 북으로는 포항까지의 영역이다.
주변이 굶어 죽고 있는 상황인데 나 혼자 만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부자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작수입 가운데 1천석을 주변 빈민구제에 사용한 것도 이런 차원이다. 불교의 ‘유마경’에 유마거사가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중생이 모두 아픈데 내가 어찌 안 아플 수 있겠느냐!”
다섯째 원칙은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 옷을 입어라’다.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었다. 재산 관리의 상당 권한을 여자가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 정신이 중요하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숟가락도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백동 숟가락의 태극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 과객 대접에는 후했지만 집안 살림에는 후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씨 집안의 어느 며느리는 삼베 치마를 하도 오래 입어 이곳저곳이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는데, 서 말의 물이 들어가는 ‘서말치솥’에 빨래를 하기 위해 이 치마 하나만 집어넣으면 솥이 꽉 찰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너무 많이 기워 입는 바람에 물에 옷을 집어넣으면 옷이 불어나서 솥단지가 꽉 찼다는 말이다. 최부잣집 여자들의 절약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화다.
이상 여섯 가지 원칙이 최부잣집의 제가(齊家)하는 철학이라면, 육연(六然)이라고 하는 수신(修身)의 가훈도 있었다. 육연은 다음과 같다.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여기서 ‘연’의 사전적 의미는 ‘그러하다’ ‘그렇다고 여기다’인만큼 전체적으로 관용, 긍정, 초연의 뜻이 담겨 있다.
최부잣집의 장손인 최염씨(崔炎, 68)는 어렸을 때부터 매일 아침 조부 방에 문안을 가면 조부님이 보는 데서 붓글씨로 육연을 반드시 써야만 했다고 술회한다. 어려서부터 군자다운 행동을 하도록 철저히 교육받았던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최부잣집의 가훈을 음미하면서 나는 로마 천년의 철학이 생각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가 천년을 지탱하도록 받쳐준 철학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는 것이다. 이를 번역하면 ‘혜택받은 자들의 책임’ 또는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들이 솔선수범하여 최전선에 나가 피를 흘리는가 하면 공중을 위해 금쪽 같은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곤 하였다. 귀족은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여기서 로마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나왔다.
시오노가 ‘로마인 이야기’ 전체를 통하여 몇 번이고 강조한 대목은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이것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삶의 질을 더 높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게 시오노의 주장이다.
여기서 도덕적 의무를 통해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였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최부잣집의 원칙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도덕적 실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보람을 증가시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삶의 질은 의미와 보람에 달려 있는 것 아니던가.
한국사람들은 이를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에 반드시 경사가 있다)’이라 하였다. 이는 요즘의 민법이나 형법보다 훨씬 강력한 윤리적 기제였으며 동시에 사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이끄는 철학이었다. 최부잣집의 원칙들은 바로 한국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최부잣집의 고향인 경주와 로마는 유사하다. 사실 세계 역사에서 1000년 수명을 유지한 나라는 신라와 로마제국을 빼면 없다. 물론 그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신라와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로마가 월등하지만, 그 유지된 시간만 놓고 볼 때는 신라와 로마는 천년제국이라는 점에서 대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철학과 경륜은 그 세계의 체험 내지 경험의 두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륜은 책상 위에서 습득한 건조한 지식에서 나오기보다는 치열한 실전 체험에서 나온다. 체험이 빈약하면 철학도 빈약하다. 그래서 두터운 역사와 전통은 큰 나무의 깊은 뿌리가 된다.
그래서 천년 고도 경주에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낸 명가(名家)가 지켜온 가훈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고, 천년 제국 로마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나온 것도 필연인 것 같다.
육연(六然)만 해도 그렇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 돌아온 홍세화씨가 자주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톨레랑스(tolerance)’다. ‘관용’ 또는 ‘용인’으로 번역되는 톨레랑스는 프랑스 정신이라고 할 만큼 프랑스인들에게 체질화되어 있다고 한다. 톨레랑스는 남의 생각과 행동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다.
19세기까지 프랑스 파리가 세계의 수도 노릇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온갖 다양성을 넉넉하게 수용할 줄 아는 톨레랑스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가 언뜻 볼 때는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난잡으로 흐르지 않고 세련된 문화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톨레랑스라는 것이다.
나는 톨레랑스를 홍세화씨의 책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배웠는데, 최부잣집의 액자에 걸려 있는 육연을 보면서 조선 선비의 톨레랑스를 느꼈다.
이를 종합하면 최부잣집의 수신(修身)은 프랑스의 톨레랑스요, 제가(齊家)는 로마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재물과 벼슬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인간일진대, 보통 인간이 이 욕망을 제어하고 절제하면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삶에 대한 통찰력에서 지혜가 나오고 이 지혜를 후손에게 전승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종교의 계율로 나타나는데, 그 계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최부잣집 정신인 것이다.
해동성자 설총을 낳은 터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최부잣집의 집터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집터는 요석공주가 살던 곳이었다. 최부잣집이 이곳에 자리잡은 시기는 대략 200년 전. 그러니까 현재 장손인 최염씨의 7대조가 되는 최언경(崔彦璥, 1743~ 1804)대의 일이다.
그 전에는 경주시 내남면의 ‘게무덤’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곳은 형산강 상류 쪽인데 양쪽에서 물이 흘러와서 합수(合水)되는 지점이라고 한다. 풍수가에서 볼 때 양쪽에서 물이 흘러와 만나는 곳은 돈이 많이 모이는 터다. 짐작건대 ‘게무덤’도 그러한 터였을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최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이자 13대조인 최진립(崔震立, 1568~ 1636)이 살았고, 아들 손자대로 내려가면서 점차 재산이 쌓였다. 재산이 늘어감에 따라 방문하는 손님도 늘어나자 좁은 집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최언경대에 이르러 여기 저기 터를 물색하던 중 현재의 요석궁터를 택지(擇地)했던 것이다.
요석궁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로맨스가 어린 곳으로 유명하다. 그 로맨스로 인해 요석궁에서 신라의 대문장가 설총이 태어났다.
그러니까 최부잣집은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의 임신지(姙娠地)이자 출생지(出生地)라고 보아야 한다. 설총이 누구인가. 신라의 대학자로서 이두문자의 창시자 아니던가. 이 집터에서 일차로 설총이 배출되었음을 기억하자.
臨水는 있으되 背山이 없다
집터의 입지 조건을 보통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그런데 최부잣집을 보면 임수(臨水)는 되어 있는데, 배산(背山)이 잘돼 있지 않다.
집 앞에 흐르는 모내(汶川)는 1300년 전 원효대사가 다리에서 미끄러져 옷을 적셨다는 유서 깊은 냇물로 임수에 해당한다. 동쪽인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낭산과 남산 사이로 흘러오다가 반월성 부근에서 각도를 꺾어, 반월성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서 한번 모였다가 다시 최부잣집 앞을 거쳐 서쪽으로 돌아 흘러간다. 최부잣집에서 보면 동출서류(東出西流)의 수국을 이루는데, 집 앞에 물이 흘러야 돈이 생긴다.
그런데 집 뒤의 배산이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이상하다. 대개 명택들은 뒤에서 내려오는 배산(背山, 풍수 용어로 來龍)이 튼튼한 편인데 이 집은 내룡이 확실치 않다. 야트막한 둔덕으로 내려와서 언뜻 보면 평지에 가깝다.
‘왜 그럴까’ 하고 지맥을 조사하기 위하여 집 뒤에 있는 밭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다. 거기에는 아름드리 괴목(회화나무)이 몇십 그루 들어서 있었다. 웬 나무들인가? 아마도 이 괴목들은 집 뒤가 허하니까 그 허함을 비보(秘報)하기 위하여 심어 놓은 나무가 아닌가 추측됐다. 나중에 장손인 최염씨를 만나 집의 내룡이 약해서 집 뒤가 허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의 답변이 필자의 추측과 같았다.
최염씨의 말에 따르면 형산강 상류의 원래 집터인 ‘게무덤’ 자리도 뒤의 내룡이 거의 없었고, 요석궁터인 이 집도 내룡이 야트막한 둔덕이라서 뒤가 허하다는 것이다.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요석궁터를 집터로 일단 잡아 놓고, 집을 짓기 수년 전에 미리 집 뒤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나무 중에서도 수명이 오래 가는 수종인 괴목을 선택해서 심었다. 그러니 지금 아름드리 괴목의 고목들은 약 200년 전에 최언경이 집터에 대한 비보책으로 일부러 심어놓은 것들이다. 광복 전에는 괴목 숲이 빽빽하였으나 일제 말엽 일본인들이 괴목을 공출해 가기 위해 많이 베어버렸고, 광복 이후에도 많이 훼손돼 지금은 듬성듬성한 상태다. 빽빽하게 밀집된 괴목 숲이었다면 뒤에서 불어오는 북풍을 어느 정도 차단할 성싶다.
다른 집에서는 집 뒤에 대나무를 심어 놓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내룡이 험한 바위산으로 되어 있을 때 바위산에서 풍기는 살기를 차단하기 위한 방살용(防殺用)이다. 괴목에 비해 대나무는 관리가 거의 필요없고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괴목은 성장하는 데 오래 걸리므로 장기적인 투자와 관리가 필요하다. 그 대신 성장하기만 하면 대나무보다 훨씬 품격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대나무보다 키가 크고 두껍게 자라 방풍 효과는 크다. 계림 숲도 모두 괴목이다.
한편 최부잣집의 터를 자세히 보면 바로 옆에 위치한 향교보다 약간 낮게 자리잡고 있다. 200년 전 공터였던 이곳에 집을 지으려고 할 때, 향교의 반대가 심해 향교보다 터를 낮게 깎아내고 지었다. 현재 주춧돌을 살펴보면 향교보다 2계단 정도 낮다. 안채 뒤를 보니 실제로 땅을 깎아낸 흔적이 보인다. 3m 정도는 원래의 자리에서 흙을 깎아내고 집을 지었음이 발견된다. 이는 향교보다 낮게 짓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내룡이 편평하게 내려와서 뒤에 떠받쳐주는 맥이 약하므로 터를 전체적으로 깎아서 바닥을 낮추어 자연히 집 뒤의 둔덕을 높이는 풍수적 효과를 얻기 위한 장치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내룡이 약하다고 이 집이 맥(脈)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집 앞의 문천을 건너 앞산에 올라가 이 집터의 국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동쪽의 반월성 쪽에서부터 용맥이 구불텅구불텅 한참을 내려와 계림을 지나 최부잣집 근처에서 멈추었음이 확연히 나타난다. 내룡이 야트막한 둔덕으로 내려와 약하기는 하지만 맥이 이어져서 최부잣집에 뭉쳐 있음은 확실하다.
재물이 쌓이는 도당산
형산강 상류의 게무덤 자리에서 경주 교동으로 이사온 최언경부터 현재의 자손인 최염까지 계산하면 7대다. 12대 만석 중에 앞의 5대는 게무덤에서 하였고, 나머지 7대를 요석궁터였던 현재의 교동집에서 한 것이다.
교동집을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최대 강점은 집 앞의 안대가 아주 좋다는 점이다. 이 집의 좌향은 임좌(壬坐)로 남향집에 속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경주에서 남향집은 남산을 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최부잣집 역시 남산이 안대다. 이 집 대문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도당산’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이 바로 앞에 보이고 그 너머로 남산의 세 봉우리 끝부분이 멀거니 서 있다. 물론 도당산과 남산은 실제 상당 거리 떨어져 있지만, 이 집에서 쳐다볼 때는 거의 이중으로 겹쳐진 것처럼 보인다.
나는 최부잣집의 이중 안대를 보고서야 비로소 ‘안도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이 집이 만석꾼이 살던 집이라면 명당이 틀림없을 것이고, 명당이 틀림없다면 과연 어떤 점이 명당인가를 해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는데, 안대를 보는 순간 그 부담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200년 전에 터를 잡은 최언경도 앞산의 이중 안대에 매혹되었을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도당산 생김새는 재물과 관련이 있다. 도당산은 말발굽처럼 디귿(ㄷ)자 형태로 생긴 야산이다. 마치 곡식을 쌓아놓은 모양이라 하여 창고사(倉庫砂)로 보는데, 말발굽형 창고사는 그중 최고로 친다. 그리고 디귿(ㄷ)자의 터진 쪽이 최씨집 앞과 일치돼 있어서, 최씨 집에서 보면 재물이 새나가지 않고 쌓이는 형국이다.
그런가 하면 도당산 너머로 남산의 세 봉우리가 넘어다 보인다. 세 봉우리는 둥그스름한 금체(金體)에 가깝다. 금체에서는 귀인이 나온다고 간주한다. 아쉬운 점은 금체 봉우리의 모양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다. 금체봉이 똑바로 서 있었으면 귀(貴)가 좀더 높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창고사 위에 금체가 겹쳐 서 있는 형국의 안대는 대단히 희귀한 안대임에 틀림없다. 재물과 귀(貴)가 겹쳐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안대가 바로 최부잣집 안대인 것이다. 행여나 교과서적인 이중안대(二重案帶)를 보고 싶거든 최부잣집 대문 앞에 서서 무한정 구경하시라! 관람료도 받지 않으니 몇 시간씩 보아도 공짜다.
최부잣집의 내룡과 안대를 보면서 양자의 상관관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양택일 경우에는 안대가 더 중요하고, 음택일 경우에는 내룡이 더 중요하다. 최부잣집을 보아도 이 등식은 입증된다. 내룡은 땅속으로 전달되는 기이므로 음기(陰氣)이고, 안대는 땅 위의 공기를 통해 공중으로 전달되므로 양기(陽氣)로 간주한다. 죽어서 누워있는 사람은 뼈만 남아 있으므로 음기를 주로 받지만, 활동하는 산 사람은 양기를 주로 받는다고 본다. 물론 음양기(陰陽氣) 모두 받을 수 있으면 더욱 좋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양택을 볼 때는 일단 안대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최부잣집 마당을 구경해보자. 사랑채에 놓인 화강암 주춧돌들을 바라보니 격조와 품격이 느껴진다. 사랑채에 올라가는 계단과 둥그스름한 기둥의 받침대가 모두 붉은색이 약간 감도는 경주 화강암이다. 민가에 이렇게 원형의 화강암 주춧돌을 사용한 사례는 처음 본다. 마치 큰 절터나 궁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흔아홉칸의 민간 궁궐
원래 이 집은 아흔아홉 칸이나 되었고, 부지 2000여 평에 1만여 평의 후원도 있었다. 그 집에 살던 노비만도 1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최염씨의 부인인 강희숙여사(姜熙淑, 63)가 1961년에 시집왔을 당시에는 방앗간 외양간 등이 헐려 마흔일곱 칸으로 줄어 있었고, 노비들도 거의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살림을 난 상태였다고 한다. 지금은 더 줄어들었다. 사랑채도 화재로 (1970) 주춧돌만 남아 있고 안채와 문간채 창고만 남아 있는 상태다.
하지만 사랑채 터에 남아 있는 화강암 주춧돌은 최부잣집 전성기가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알고 보면 이 화강암 주춧돌들은 200년 전에 반월성에 있던 것을 집을 지으면서 옮겨 놓은 것이다. 원래 왕궁 기둥을 받치던 돌들인 것이다.
여하튼 이 사랑채에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그 면면을 한번 보자. 구한말에는 경북 영덕 출신의 유명한 의병장 신돌석(申乭錫) 장군이 이 집에 피신하여 집 주인인 최준(崔浚, 1884∼1970)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그때 요석궁(최부잣집의 바로 옆집으로 종조부집이었다. 현재는 한정식집 이름)의 대들보를 혼자 힘으로 들어올려 설치했다는 일화가 있다.
구한말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도 의병을 일으킬 때 수백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이 집을 방문하여 며칠을 묵었다고 한다. 그때 최부자로부터 상당한 거사자금을 받아서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면암은 충청도 기호학파라서 노론이었고, 최부잣집은 남인이라 서로 당색이 달랐지만, 국난을 당하자 당색에 관계없이 도움을 청하러 왔던 것이다.
강점기 때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이 왕세자 시절에 경주 서봉총(瑞鳳塚)의 금관을 발굴하기 위해 경주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최부잣집 사랑채에 머물렀다. 서봉총이라는 명칭도 스웨덴의 왕세자가 발굴에 참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외에 국내 저명인사로는 의친왕 이강, 손병희, 최남선, 정인보, 안희제, 여운형,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조병옥 등이 다녀갔다.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은 사랑채에 엿새 동안 묵으면서, 이 집 주인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적어주었다.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두 사람은 이 집에서 1년 이상 머무르며 ‘동경지(東京誌)’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천도교의 손병희는 집주인인 최준이 존경하던 터여서 자주 와서 묵었다. 손병희와 최준은 보성학원 이사로,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같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최린도 왔었다. 최린은 보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천도교도 100명과 보성학생 100명을 인솔하고 수운선생 묘소를 참배온 적이 있었는데, 이들의 숙식을 모두 최부잣집에서 해결하였다. 최수운과 최부잣집이 같은 집안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없이 대인원을 데리고 와 묵어갔던 것 같다.
인촌 김성수도 1년에 꼭 한 번은 들를 정도로 자주 왔다. 인촌 집안과 최부자 집안은 교류가 빈번했다고 한다. 인촌 집안은 호남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당시 10만석을 하던 집이었고, 최부잣집은 영남의 제일가는 부자로 만석을 하던 집안이라 영호남 부자끼리 통하는 부분이 있었을 성싶다. 그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최준은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인촌의 영향을 받아 교육사업에 전재산을 기부하였던 것이다. 인촌은 고려대를 세웠고, 최준은 대구대와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대구대와 계림학숙은 영남대의 전신이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
문파(汶坡) 최준은 현재의 장손 최염의 조부이며, 마지막 최부자로서 나라가 망한 일제시대를 넘긴 인물이다. 마치 중국의 식민지가 된 티베트의 망명지도자 달라이 라마처럼, 문파는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최부잣집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동시에 재산도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살았던 사람이다.
동학 후 활빈당이 부자들을 습격할 때도 최부잣집은 그 덕망으로 인해 어려움이 없었지만 일제 식민지는 그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조선의 명부(名富)로서 일본 명사들의 방문을 받긴 하였지만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자존심을 죽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항일 대동청년당을 조직힌 독립투사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와 의기투합하여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한다. 물론 그 운영자금은 대주주인 최준이 거의 책임졌다. 백산상회는 말이 상회지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에게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제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회사였다.
상해에 계속 군자금을 보내니 백산상회는 손해가 나 결국 부도가 날 수밖에 없었고, 그 빚을 사장인 문파가 지게 되었다. 액수는 당시 돈으로 벼 3만석에 해당하는 거금 130만원이었다. 이로 인해 식산은행(殖産銀行)과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이 문파 최준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였다. 최준은 만석꾼에서 졸지에 빚쟁이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뜻밖에도 식산은행의 두취(頭取, 총재)인 아리가(有賀光豊)라는 일본인이 최준이 섰던 거액의 빚보증을 해제해주었다. 거액의 빚을 탕감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재산의 반절 정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의문은 왜 채권자인 식산은행 총재가 빚을 탕감해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부분은 최부자의 친일 행위를 가름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탕감 이유에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 때문이다. 아리가는 당시 사이토 총독의 오른팔로서 일본의 호족 출신이었다. 아리가는 조선에 와서 조선팔도 곳곳을 여행하였다고 한다. 아리가의 취미는 고건축 답사와 여행이었고 겸사해 조선의 민심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리가가 방문하는 곳마다 사람들이 경주 최부잣집의 인심이 후하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가는 최부잣집을 주목하게 되었는데, 만약 식산은행이 최부잣집의 재산을 몰수하여 거지로 만들면 일제의 식민정책을 많은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즉 내선일체 정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일본사람이 들어와서 경주 최부잣집이 망했다는 소문이 조선팔도에 돌면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악화될 것이 아닌가.
여기에다가 아리가의 최부잣집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아리가는 일본의 명문가 출신으로 조선의 명문가로 소문난 최부잣집에 호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아리가는 최부잣집에 자주 놀러오곤 했으며, 사랑채에 머무르면서 이 집의 가주(家酒)인 법주(法酒)와 김치를 곧잘 먹었다고 전해진다. 이러는 과정에 개인적인 우정이 싹텄을 가능성이 있다.
식산은행 탕감 건으로 해서 나중에 사이토 총독은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경고장을 받았다. ‘당신은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 그 돈이 상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갔는데 왜 결손처분을 해주느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해군 출신인 사이토 총독과 역대 총독을 배출한 육군 출신 간의 알력도 작용하였지만, 이 사건이 내부적으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뒤주
문파 최준은 말년에 손자인 최염에게 나중에라도 일본에 가거들랑 아리가의 무덤을 꼭 한 번 찾아가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아리가의 셋째 아들(有賀敏彦·80)은 현재 한일문화교류협회 일본측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대의 인연을 아는 그가 최염에게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동의대 최해진 교수는 나머지 두 이유를 논문(‘경주 최부자의 경영사상 형성배경과 내용’)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백산무역에 은행이 대출해줄 때마다 문파에게 일부러 보증을 서게 하여 빚을 지게 한 다음 이를 미끼로 총독부에 협조하도록 회유하려 했다는 설이 두번째다. 세번째는 부채탕감을 해주는 대신에 최부자의 고가를 환수하여 신라 박물관을 만들려고 하였다. 문파는 당대에는 불가하며 사후에 제공하겠다는 약속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광복이 되어 그나마 남은 재산이 일본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상해임정에 자금을 송금한다는 사실을 탐지한 일경은 문파를 평양경찰서에 수감하고 손톱을 빼는 고문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발설을 하지 않았다. 문파가 상해임시 정부에 비밀리에 자금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은 김구 선생이 증언한 바 있다.
광복 후 1946년 2월에 문파는 김구 선생을 서울 경교장에서 대면하게 된다. 이때 최준은 62세였고 김구는 70세였다. 백범은 문파를 향해 “최선생 그 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우리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주신 최선생의 공로야말로 3000만 동포가 모두 우러러 보게 될 것입니다”라면서, ‘자금조달 인명기록장’을 보여주며 위로하였다.
사랑채말고 최부잣집에서 볼 만한 것은 마당 한켠에 위치한 창고다. 정확하게는 가을 추수가 끝난 후 각지에서 날라온 쌀을 저장하던 뒤주다.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우리나라에서 개인집 뒤주로는 가장 큰 규모인데, 쌀이 700∼800석은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이런 뒤주가 몇 개 더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은 이것 한 개뿐이다.
그 다음 볼 만한 것은 사랑채 앞에 놓인 석조(石槽)다. 석조 형태가 연꽃 모양이어서 특이하다. 현재 경주시 전체에 석조는 도합 20여 개가 있는데, 연꽃 모양의 석조는 유일하다고 한다.
이 석조는 신라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는데, 원래 반월성 안의 정자에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자를 조선조때 최부자의 선조가 구입하면서 덤으로 가져온 것이다. 인촌이 사랑채에 들를 때마다 이 석조를 보고는 고려대에 갖다 놓자고 여러 번 제의하였다는 사연이 있다.
이 집 구조에서 눈여겨 볼 만한 것은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안채 대문에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어서, 곧장 못 들어가고 옆으로 돌아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는 여자들의 살림공간인 안채 내부를 바깥에서 정면으로 볼 수 없게끔 고려한 장치다. 일종의 발을 쳐놓은 것과 같다.
최부잣집의 현 장손은 어떻게 사나?
현재 최부잣집은 관리인이 살고 있을 뿐 집주인은 이곳에 없다. 사랑채의 팻말에는 이 집이 최식(崔植)의 집으로 새겨져 있지만 이미 1974년에 사망했고, 현재 주인은 최식의 장남인 최염으로 서울 방배동에 살고 있다.
나는 최염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 집에 들렀다. 그는 현재 60여 평의 빌라 2층에 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에게 60여 평 빌라면 괜찮은 집이겠지만, 100여 명의 하인을 두고 살던 12대 만석꾼의 장손집 치고는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68세인 최염씨는 처음 보는 순간 부드럽고 정돈된 성품임을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 톤도 높지 않고 자근자근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다. 가훈인 육연(六然)이 걸려 있는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일 궁금한 것이 현재에도 만석의 재산이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유산은 못 받았습니다. 만석은 조부님(崔浚)대에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재산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영남대학 재단에 모두 희사되었습니다. 조부님은 인촌과 친했습니다. 인촌의 영향을 받아 교육사업에 뜻을 두었고, 광복 이후 좌·우익의 대립과 토지개혁을 겪으면서 많은 토지를 유지하는 것이 시대 조류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학설립에 전재산을 희사한 것입니다. 광복 직후 대구대학을 설립하면서 수백 정보의 부동산과 집에 있던 장서 8000권을 모두 희사했죠. 6·25 후에는 경주집을 포함한 나머지 재산을 털어 경주에 계림학숙(鷄林學塾)을 설립했습니다. 대구대학은 여유재산이 들어갔고, 계림학숙은 남은 재산이 전부 들어간 셈입니다. 계림학숙 초대 학장을 김범부 선생이 지냈죠. 서울의 유명한 교수들이 피란을 내려왔기 때문에 계림학숙에는 유명 교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수복 후에 모두 서울로 올라가버려서 부득이 대구대와 계림학숙을 합쳤습니다.”
“영남대학은 박대통령이 설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여곡절이 좀 있습니다. 조부께서 대구대학(현재의 대구대학이 아님)을 운영하고 있다가, 5·16 후에 운영이 어려워졌고, 마침 이병철씨가 학교를 운영해보겠다는 의사를 표시해 교동집 사랑채에서 조부님과 대면하게 되었죠. 조부님은 이병철씨에게 학교를 넘길 때 대가는 일절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최부자인 조부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비사건(사카린 밀수사건) 이후 박대통령에게 다시 넘어가 현재의 영남대학이 생긴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12대를 내려온 만석꾼의 재산은 대학설립으로 그 대미를 장식하였던 것이다. 호남의 부자인 인촌이 고려대를 키웠다면, 영남의 부자 최준은 영남대학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운 것이다.
“만약 대학설립에 재산을 희사하지 않았다면 그 재산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못 했을 겁니다. 옛날에는 장자가 전 재산을 고스란히 상속받을 수 있어서 본인만 노력하면 재산을 지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차남이나 삼남 그리고 딸들도 균등하게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재산이 분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경주 교동 집은 현재 영남대학 재단 소유이며, 최염씨는 다만 그 집에서 거주는 할 수 있다고 한다. 60년대 초반부터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살았으며 한달에 한번 정도 경주에 내려가 집을 둘러본다. 현재는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이 그의 직함이다. 그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제가 서울에서 사업할 때 최부잣집 장손이라고 밝히면 처음 보는 사람들도 저를 무조건 신뢰해 주었습니다. 조상들이 누대에 쌓아놓은 음덕의 혜택을 본 것이죠”라면서 미소짓는다.
나는 조용히 다과상을 나르던 최염씨의 부인 강희숙여사, 그러니까 최부잣집의 맏며느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치마 양반’이란 별명
“최부잣집의 종부인 셈인데 친정은 어딥니까?”
“저희 집도 경북 봉화(춘양)에서는 내로라하는 부잣집이었습니다. 당시 봉화의 강부자라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시집을 와서 보니 집이 어찌나 큰지 처음에는 길을 못 찾을 정도였어요.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나 외국 관광객들도 찾아와 집구경을 하고 가곤 했으니까요.”
강여사의 친정도 명문부택이었던 것이다. 최부잣집이 비록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그 혼반(婚班)은 영남의 일급 명문가들이었다. 최염씨의 6대 조모가 의성 김씨이고, 5대와 4대 조모는 모두 진성 이씨였고, 증조모는 서애 선생 후손인 하회 유씨이고, 조모는 안동의 풍산 김씨이고, 어머니는 청주 정씨(한강 정구 선생의 후예)였다. 그런가하면 누님은 동계 정온 선생 집의 종부로 시집갔고, 둘째누님도 서애 선생 종부다. 최씨집에 시집온 여자 쪽의 친정이 모두 기라성 같은 벼슬을 지낸 집안이라서, 최씨집에 대해서 우스갯소리로 붙인 별명이 ‘치마 양반’이었다고 한다.
“경주법주가 원래 이 집에서 손님을 접대하던 가주를 상품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법주는 어떻게 만듭니까?”
“우리 집안에는 ‘교촌법주’라는 특유의 술이 있어요. 이 술은 맏며느리만이 전수받아 빚을 수 있죠. 저도 시어머니에게서 배웠습니다만, 그 술 빚는 방법은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저도 제 큰며느리에게만 전수하였습니다.”
법주는 가을 추수 후 햅쌀로 만들어서 초봄까지만 먹는 술로 온도가 올라가는 여름에는 상하기 때문에 담글 수 없다고 한다.
가훈을 ‘어긴’(?) 장손
나는 강희숙 여사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녀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부부는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인 최성길씨(崔成吉·40)는 사법고시에 합격해 현재 예비판사라고 한다. 2001년 2월에 서울지방법원에 정식으로 발령을 받을 예정이다. 따지고 보면 최성길씨가 최부잣집의 장손이다.
“이 집 가훈은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아드님이 판사를 하면 이 가훈에 위배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때문에 갈등이 많았습니다.”
강희숙 여사가 필자에게 털어놓은 이 집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하면 이렇다. 최성길씨는 사법고시에 도전한 뒤 11번째에 합격했다고 한다. 그 동안 무려 10번을 낙방한 셈이다. 그 과정에 마음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의태연(失意泰然)이라는 육연을 명심하면서 버텨왔으나 10번째 떨어지자 부모된 심정으로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는 것이다.
불교신자인 강여사는 차모라는 법사를 찾아가서 아들 문제를 상담하였다고 한다. 상담결과 차법사는 돌아가신 최씨집의 증조부께서 손자가 판사되는 것을 막고 있다는 답변을 하였다고 한다. 차법사는, 조상이 후손 잘되게 도와주어야지, 이렇게 출세 길을 막는 경우는 자기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최성길씨의 증조부는 문파 최준이다. 최씨집이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는 것이 가훈으로 내려왔는데, 증손자가 그 원칙을 어기려 하니까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판사는 옛날로 치면 진사 이상의 벼슬이다.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문파의 영혼은 남아서 집안의 가훈을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여사는 시조부인 문파선생 영혼을 설득하는 모종의 조치를 취했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 후 11번째 시험에서 최성길씨가 합격했다고 한다. 영혼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에 가타부타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 일화를 통해 최부잣집이 가훈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이것 저것 귀찮은 질문을 던졌는데도 종부인 강여사는 전혀 귀찮은 내색을 보이지 않고 차분하게 답변해주었다. 명문가 종부의 품위가 오랜 세월을 통해 몸에 배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절제된 담담함 같은 것을 강여사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만석의 재산은 사라졌지만, 그 절제된 담담함은 계속될 것이다.
조용헌 - 한국의 명가 명택 (경주 최부잣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