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 안목으로 분석
경북 영양군 일월면의 주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처럼 지조와 학문을 갖춘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배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재인문(財人文)의 삼불차를 4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방이 있었다면 그 비방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 방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그것이다. 이판이란 눈에 안 보이는 데이터(invisible data)를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이고, 사판이란 눈에 보이는 데이터(visible data)를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전자가 다분히 신비적인 파악이라면, 후자는 요즘 말로 합리적인 파악이다. 사판이 드러난 현상에 대한 분석이라면, 이판은 배후에 잠재하는 부분에 대한 분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판과 사판 양쪽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것이 불가(佛家) 고승(高僧)들의 입장이다. 한쪽만 보아서는 미급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을 모두 통과해야 실수가 적다. 그래서 이판사판이란 말이 나왔다. 이걸로 보나 저걸로 보나 답은 하나로 나왔으니 행동에 옮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판사판이다.
불교의 화엄철학에서는 이 경지를 이사무애(理事無碍)라고 표현한다. 이(理)와 사(事)에 모두 걸림이 없는 경지다.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사(國師)나 왕사(王師) 제도가 있었는데, 이런 정도의 경륜은 이사무애의 경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요즘 공식적인 국사 제도는 사라졌지만 가톨릭의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어느 정도 국사 노릇을 한 듯하다. 최근 20년간 대통령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김추기경 하고 상의하는 경우가 많아서 하는 말이다.
아무튼 사판적(事判的) 분석(分析)이야 세상사에 밝은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제쳐두고, 주로 이판적 입장에서 주실마을의 인물배출 배경을 뜯어보자.
이판의 입장이란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사(人事), 삼재(三才)의 안목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천문이란 시간, 즉 타이밍을 가리킨다. 지리란 넒은 의미로는 환경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명당이다. 인사는 넒은 의미로는 천문과 지리를 매개하는 존재인 사람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인간의 몸에 대한 식견을 지칭한다. 이 3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일이 성취된다.
대만 총통의 국사를 역임한 남회근(南懷瑾, 1918∼) 선생은 그의 역저 ‘역경계전별강(易經繫傳別講, 국내에서는 ‘주역강의’로 번역돼 있음)에서 이를 명리(命理), 지리(地理), 의리(醫理)로 요약한다.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에 따르면 식자라면 반드시 이 삼리(三理)를 공부해야 한다.
자기 운명의 이치인 명리(命理)를 알아야 천시(天時)가 언제 오고 가는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따른 진퇴를 결정할 수 있다. 지리(地理)를 알아야 살아 있을 때의 양택(陽宅)과 죽은 후의 음택(陰宅)을 제대로 잡을 수 있고, 의리(醫理)를 알아야 병의 원인을 파악해서 몸을 건강히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삼리 중에서 의리는 70년대 초반 한의학이라는 제도권 학문에 들어가 학문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리와 명리는 여전히 제도권 밖에서 ‘학문적 시민권’도 없이 서성대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이긴 하지만 지리도 학문적 영역으로 조금씩 진입하는 분위기다. 서울대 최창조 교수가 한국사회의 식자층에 지리를 소개하면서 인식이 약간 개선된 것 같다. 미신 잡술이라는 종래의 인식에서 약간 벗어나 풍수라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제일 천대받는 것이 명리다. 명리는 아직도 미아리 골목에서 잠자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새버렸지만 다시 주실마을로 돌아가자. 내가 보기에 주실마을은 삼리 가운데서도 지리적 안목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문화현상은 한국의 토양에서 우러난 문법으로 해석해야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나는 그 문법이 바로 지리라고 생각한다.
매를 날려 잡은 집터
주실마을의 가장 중심맥에 자리잡은 호은종택(壺隱宗宅) 터는 이름 그대로 호은공이 잡은 자리다. 한양 조씨인 호은공 선대는 한양에서 거주하다가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를 만나 멸문 위기에 처하자 전국 각지로 흩어져 피신했는데, 그 후손중의 하나인 호은공이 인조7년(1629)에 주실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호은종택이 자리잡은 지맥은 영양 지방의 명산인 일월산(日月山)에서 흘러 내려온 맥이다. 주실에서 일월산까지 능선을 타면 12km 정도다. 주실에 도달한 지맥은 야트막한 3개의 봉우리로 응결된다. 그 가운데 봉우리 밑 부분에 호은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호은종택에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 집터를 잡을 때의 일화가 흥미롭다. 호은공이 매방산(梅坊山)에 올라가 매(鷹)를 날려 매가 날아가다가 앉은 자리에 집터를 잡았다는 일화다. 매방산은 100여m 정도의 야트막한 산으로, 주실에 맺힌 3개의 봉우리중 맨 오른쪽에 해당하는 3번째 봉우리다. 이때의 매는 아마도 야생 매가 아닌 집에서 꿩 사냥용으로 기르던 보라매로 생각되는데, 이 매가 앉은 지점은 흥미롭게도 물기가 질컥질컥 배어 있는 늪이었다고 한다.
호은종택 터는 원래 늪지대였던 것이다. 늪을 메워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다소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매를 날려서 집터를 잡았다는 점, 그리고 늪지대를 메워 집을 지었다는 점에서 호은종택의 터잡기는 일상적인 택지법(擇地法)과다르기 때문이다.
불가에서 고승들이 오리를 날려 그 오리가 착지(着地)하는 지점에 절터를 정한 경우는 발견된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松廣寺)가 그런 경우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암자 터를 정할 때 오리를 날렸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사례는 조선중기 호남지역에서 많은 신통(神通)을 나투었다고 회자되는 진묵대사 역시 나무로 만든 오리를 날려 절터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불가에서는 오리를 해수관음(海水觀音)의 화현으로 보기도 한다. 항해를 업으로 하는 뱃사람들에게 해수관음은 바다의 풍랑을 다스리는 신으로 여겨지는데, 비록 오리는 바다가 아닌 육지의 저수지에서 살지만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물결 위에 떠 있을 수도 있어서 해수관음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물론 이때의 오리는 집오리가 아닌 청둥오리로 여겨진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오리를 신령한 능력을 지닌 동물로 여겼다. 솟대 위에 나무오리를 만들어 올려놓는 한국의 민속도 이러한 신령함의 표현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여하간 불교에서 절터를 잡을 때 오리를 날렸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매를 날려 집터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호은종택에서 처음 접한다.
왜 매를 날렸을까? 아마도 날짐승은 하늘에서 날다가 땅에 내려앉을 때 본능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잡는 능력이 있지 않나 싶다. 동물은 사람보다 감각이 발달돼 있다. 매를 날린다는 것은 동물의 감각 내지는 본능을 이용하는 방법 같다. 물론 처음부터 무턱대고 매를 날리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어느 정도 범위를 잡아놓은 다음에, 정확한 지점을 찍을 때 매를 날리지 않았을까. 혹은 2∼3군데 후보지를 잡아놓고, 그 가운데 어느 쪽을 최종적으로 선택할 것인지 고심하다가 마지막 결정에 동물의 촉각을 이용했을 개연성도 있다. 일종의 동물점(動物占)이라고 볼 수도 있다.
늪지에 집터를 잡은 도인
그다음 주목할 사항은 평지나 언덕이 아닌 늪지를 집터로 선택한 부분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양택을 늪지에 잡은 경우를 나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절터를 늪지에 잡은 경우는 있다. 백제 때 무왕(武王)이 잡은 익산의 미륵사 터가 원래 늪지였고,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잡은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이 늪지였다. 이외에도 치악산 구룡사, 도선국사가 말년에 주석한 광양 옥룡사, 고창 선운사 대웅전 자리가 애초에는 늪지였다는 기록이 있다. 풍수의 좌청룡 우백호를 따지지 않고 늪지를 메워서 사찰을 세우는 것은 고대 불교에서 행해지던 유풍이다.
늪지에 건물을 세우면 습기가 차서 목재가 쉽게 부식되기 때문에, 늪지를 메울 때는 반드시 숯을 집어 넣는다. 숯은 습기를 빨아들이는 작용이 탁월하다. 미륵사나 금산사 미륵전 자리에서 실제 숯이 출토되었는데, 호은종택 자리가 원래 늪지였음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밑에도 숯이 깔려 있을 공산이 높다.
아무튼 불교사찰이 아닌 유교 선비가 양택을 늪지에 잡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이색적일 뿐 아니라 흥미로운 일이다. 매를 날려 터를 잡은 호은공도 정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있었던 분이었다고 짐작된다. 호(壺)는 호리병을 지칭한다. 따라서 호은(壺隱)이란 호리병을 가지고 숨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이 내포되어 있다. 호리병은 방랑과 은둔을 좋아하는 도사들의 휴대품이다.
이렇게 볼 때 호은종택을 잡은 호은공은 주자 성리학을 연마한 유가의 선비이긴 하지만, 내면세계 한 부분에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호은공은 방외(方外)의 학문에도 일가견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붓처럼 생긴 문필봉
호은종택의 대문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아주 인상적인 봉우리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눈이 부실 정도의 봉우리다. 정신이 번쩍 나게 한다. 바로 문필봉(文筆峰)이라서 그렇다. 집터나 묘터의 정면에 위치한 산을 안산(案山)이라 하는데, 홍림산이라고 불리는 문필봉이 호은종택의 안산에 해당된다. 이 문필봉이 왜 눈부신가 하면, 그 모습이 너무 문필(文筆)처럼 뚜렷하고 대문의 정면 일직선상에 교과서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문필봉은 글씨 쓰는 붓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쉽게 말하면 정삼각형 산이다.
삼각형 모양의 산은 오행으로 따지면 목형(木形)의 산이다. 풍수가에서는 문필봉이 정면에 있으면 공부 잘하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본다. 문필봉이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서 장기간 거주하면 그 기운을 받아 사람도 역시 문필가나 학자가 된다고 신앙하는 것이 풍수이다. ‘천지여아동일체 아여천지동심정(天地與我同一體 我與天地同心正, 천지와 내가 한 몸이요, 나와 천지가 같이 바른 마음)’이라는 한자 문화권의 세계관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신앙은 납득이 간다.
문필봉이 있으면 대개 그 동네에는 특출한 학자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문필봉이 보이면 나는 다짜고짜 그 동네에 들어가보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이 동네에 어떤 학자가 살았느냐고 동네 사람에게 물어본다. 십중팔구는 누구 누구가 있었다고 대답한다. 신기할 정도다. 문필봉이 있어서 학자가 나왔는가, 아니면 학자들이 문필봉을 보고 일부러 찾아 들어가서 학자가 나왔는가. 어찌됐든 둘 중 하나는 틀림없다.
한국의 산천에서 주목할 현상은 삼각형 모양의 문필봉과 그 지역의 학자배출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산천과 인물이 같은 쳇바퀴로 돌아간다.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중간 공식은 범부인 나로서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드러난 결과를 놓고 볼 때는 분명 상관관계가 있는데 어쩔 건가! 문제는 중간과정의 공식을 현대인이 모른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문필봉이 보이는 터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땅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돈만 있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서민들은 천신도 못했다. 특히 주실마을 앞에 보이는 문필봉 같으면 내가 살펴본 문필봉 가운데서도 최상급의 문필봉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양이 뚜렷하고 방정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쓰다듬어도 보고 보듬어도 보고 싶다.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 같다. ‘문필망식(文筆忘食)’이라고나 할까.
폐일언하면 주실마을 산세의 모든 정기는 이 문필봉 하나에 집중되어 있다. 주실에서 학자가 많이 배출된 것도, 박사가 14명이나 나온 것도, 인문학의 조씨 3인방도 이 문필봉의 정기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주실 마을 박사들은 고향에 오면 그냥 가지 말고 이 문필봉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실 사람들도 이 문필봉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올해 4월에 제작된 ‘주실마을’이라는 14페이지짜리 팸플릿 첫 페이지는 문필봉 사진으로 시작된다. 첫페이지에 실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을의 명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마을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나이드신 어른들로부터 이 문필봉의 영험성에 대하여 귀가 아프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실 마을의 집들은 거의 이 문필봉을 향하여 방향을 잡고 있다. 문필봉을 안대(案帶)로 삼고 있는 것이다.
3개의 봉우리를 타고난 인재들
한편 일월산(日月山)에서 12km나 달려온 용맥(龍脈)은 주실에 와서 3봉우리로 맺혔다. 그리고 그 3개의 봉우리에서 제각기 인물들이 나왔다. 주실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제일 왼쪽에 있는 제1봉에는 노계(魯溪) 조후용(趙容, 1833∼1906년) 고택과 만곡정사(晩谷精舍)가 자리잡고 있다. 노계 고택에서는 주실마을 개화와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두석(斗錫), 붕석(朋錫,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용해(龍海) 등이 태어났고, 현대에는 운해(雲海, 의학박사, 한솔그룹)와 서울대 국문학과 조동일 교수의 생가이기도 하다.
이 집은 ㅁ자집의 전형적 건축양식이라고 팸플릿에 소개되어 있다. 만곡정사는 조선후기 명문장으로 이름 높은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1729∼1803년)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문하생들이 뜻을 모아 창건한 정자다. 만곡은 옥천공의 손자로 이대산(李大山)을 사사했고 많은 문도를 길러냈다. 만곡정사는 원래 영양 원당리에 건립했는데 순조 초에 주실로 옮겼다.
만곡정사의 액자는 정조 때 영의정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1799년)이 직접 썼다. 채제공은 남인(南人)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채제공은 죽기 2년 전인 1797년에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주실을 방문해, 그 기념으로 현판 글씨와 자기 친필 사인을 남겨 놓았다. 같은 남인으로서 정치적 동지이자, 학문으로 이름 높았던 만곡을 만나기 위해 적어도 열흘은 걸렸을 여로를 마다하지 않고 산넘고 물건너 이 심심 산골까지 찾아온 그 동지애와 의리 그리고 풍류가 느껴진다.
200년 뒤의 어느 비오는 날, 글을 쓰기 위해 찾아와 처마 밑에서 그 현판에 어린 사연을 쳐다보고 서 있는 나그네의 소회(所懷)도 무량하기만 하다. 사실 채제공 뿐 아니라 당시 남인 계통 실학자인 이가환(李家煥)과 정약용(丁若鏞)도 주실 조씨들과 깊이 교유했다.
만곡정사는 제1봉이 내려온 제일 끝머리에 위치하고 있다. 만곡정사 뒤의 입수맥(入首脈)은 바위여서 기운이 다른 곳보다 강하다. 흙에 비해서 바위가 깔려 있으면 기운이 강한 것으로 본다. 강한 곳은 일반 가정집으로는 부적당하고, 젊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학교를 세우면 좋다.
정사 앞으로는 냇물이 활처럼 돌아 흐르고, 앞에는 문필봉이 도합 4개나 포진해 있다. 하나도 아니고 4개씩이나 푸짐하게 도열해 있는 것이다. 주실마을 전체에서 볼 때 이 위치가 문필봉이 가장 여러 개 보이는 장소다. 학문하는 정사로는 제대로 잡은 터 같다.
호은종택과 옥천종택
제2봉은 주실의 내룡(來龍) 중에서 가장 중심 자리다. 풍수에서는 항상 중심맥을 높이 친다. 호은종택과 주실에 있는 또 하나의 종택인 옥천종택(玉川宗宅)이 제2봉의 줄기에 자리 잡았다.
호은종택은 제2봉의 맥이 내려온 끄트머리에 자리잡았다. 호박을 보면 가지의 끝에서 열매를 맺듯이, 땅의 기운도 위 보다는 아래에 그리고 끄트머리에 맺힌다. 이 터가 주실의 센터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집이 없어져서 빈터로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호은종택 바로 뒤에도 집이 있었다. 이 집에서 국민대 조동걸 교수가 태어났다. 그런가 하면 호은종택 바로 우측에도 집이 한 채 있는데, 이 집에서 성균관대 조동원 교수가 태어났다. 조지훈, 조동걸, 조동원 교수가 앞 뒤 옆집에서 태어났다. 재미있는 일이다.
옥천종택은 주실 입향시조 호은공의 증손자이며 장사랑 조군(趙)의 둘째 아들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 1658∼1737년)의 종택이다. 옥천공은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正字),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홍문관 교리(校理),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다.
옥천공은 당시 시폐를 비판한 ‘십조소(十條疏)’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십조소’ 중 열째 대목이 노론을 자극해 제주도로 유배당하던 도중 강진에서 서거하였다. 희당(喜堂, 草堂) 운도(運道, 月下) 진도(進道, 磨岩) 술도(述道, 晩谷) 거신(居信, 梅塢) 만기(萬基, 독립운동 유공자 건국훈장) 대봉(大鳳, 교육학박사, 영남대) 등의 명사가 이 종택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옥천공의 아들 희당이 아버지를 기려 별당을 세우고 당호를 초당이라 하였는데 그에 따라 아호도 초당이라 했다. 이걸 보아 만곡정사의 주인공인 조술도는 옥천공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주실마을 양택 중에서 옥천종택의 좌향(坐向)만 특이하다는 점이다. 호은종택을 비롯해서 다른 집들은 거의 간인좌(艮寅坐, 南西向)를 놓았는데, 옥천종택만은 거의 남향(南向)에 가까운 임좌(壬坐)다. 내룡도 2봉에서 맥 하나가 내려오다가 중간쯤에서 남쪽으로 70도 각도로 틀었는데, 그 꺾은 지점에 자리잡았다. 그러므로 옥천종택의 안대(案帶)는 문필봉이 아니다.
대신 토금체(土金體, 산의 끝이 약간 평평한 모습)의 안대가 놓여 있다. 이러한 안대는 보는 사람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중후하고 의지가 굳은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안대 높이도 호은종택에 비해서 그렇게 높지 않고 적당하다. 호은종택은 안산인 흥림산이 높아서 약간 답답한 감이 있는데 비해서 옥천종택은 전망이 훨씬 시원하다. 툭 트였다. 주실에서 가장 전망좋은 집인 것 같다.
마을에 하나뿐인 우물
옥천종택에서 주목할 우물이 하나 있다. 마당 오른쪽 담장 곁에 있는 자그마한 우물이다. 특별히 깊은 우물은 아니지만, 이 우물은 주실에서 하나뿐인 우물이라는 특징이 있다. 옛날부터 주실마을에는 이 우물 하나뿐이었다. 60여 가구 사는 동네에 우물이 하나뿐이니 물 길어다 먹기가 상당히 불편했을 텐데도 우물을 여러 개 파지 않고, 오로지 이 우물 하나만 사용하였다.
현재에도 주실에는 우물이 없다. 대신 50리 떨어진 곳에서 수도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로 사용한다. 다른 동네 같았으면 젊은 사람들이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진작에 마당 한가운데 지하수 관정이라도 박았을 텐데 주실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유는 무엇인가? 풍수적인 원리 때문이다. 주실은 배 모양의 형국이므로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를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다고 믿어 왔다. 구멍이 뚫리면 배는 침몰하게 마련이다. 고로 우물을 파면 인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현재까지 굳게 가지고 있다.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이 과학시대에도, 이처럼 신화적인 사고를 지키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조상의 유업을 지키려는 정신이 살아 있다는 징표다. 1년이 멀다 하고 세태가 바뀌는 요즘 400년의 전통을 지키는 유서깊은 마을이라 무언가 다르긴 다른 마을임을 이런 데서도 실감한다. 무언(無言)의 법도와 기강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저녁해가 서산에 기울어갈 무렵 인적 없는 옥천종택을 이리 저리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시골 아주머니가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긴장한 표정의 아주머니는 나를 한참 살펴보더니 한마디 꺼낸다.
“아이고 나는 물건 훔치러 온 도둑인 줄 알았네요.”
“저 도둑놈 아니고 답사 나온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얼마 전에 도둑놈이 와서 현판을 뜯어간 적이 있어요.”
이야기 끝에 아주머니는 잠깐 어디로 가더니 음료를 한 병 사와 먹으라고 준다. 옥천공 후손으로 옥천종택을 관리하고 있는 조석걸씨(63) 부인이다. 털털하고 마음씨 좋은, 시골의 전형적인 어머니 모습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 안 벌어”
유서깊은 동네에 오면 하룻밤 자고 가야 한다. 낮에 잠깐 들어 휑하니 사진만 찍고 떠나기보다는 하룻밤 자보아야 그 동네의 정기를 느낄 것 아닌가. 그러나 주실에는 여관이 없어서 숙소가 마땅치 않던 차에, 염치 불고하고 아주머니께 잠 좀 재워줄 수 있느냐고 부탁드렸다. 그리하여 그날 밤은 조석걸씨 사랑방에서 자게 되었다.
주인양반 조석걸씨 역시 공무원 하다가 정년퇴직하고 고향에서 농사도 짓고, 주실마을의 여러 문화재와 옥천종택도 관리하는 분이다. 사랑방에서 조석걸씨와 옥천공에 관해 이야기하던 끝에 주실 조씨들의 기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도 새끼들이 셋인데 공무원 박봉으로 어렵게 애들 대학을 마쳤죠. 용돈 한번 넉넉하게 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새끼들한테 항상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 집안은 절대 부정한 방법으로 돈 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막내 아들놈이 중학교 교사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애가 학부형들이 성의 표시로 갖다주는 봉투를 전혀 안 받았던 모양입니다. 하도 거절을 하니까 지나치다고 생각했던지, 나중에는 교장선생이 따로 부르더랍니다. ‘어이 조선생, 너무 그래도 못쓰네’하고 타이르더라는 이야기를 저한테 합디다.”
혹자에 따라서는 좀 지나치다고 평가할 수도 있는 대목이지만, 삼불차로 상징되는 370년 지조가 30대 초반의 조석걸씨 막내아들에게까지 유전(遺傳)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신교육의 전당 월록서당
마지막으로 제3봉은 매방산이라 일컬어진다. 이 봉우리에는 월록서당(月麓書堂)이 자리잡고 있다. ‘주실마을’이라는 팸플릿에서 조동걸 교수는 월록서당을 이렇게 설명한다.
“1765년에 한양 조씨, 양성 정씨, 함양 오씨가 협력하여 일월산 기슭을 업고 흥림산을 안대하여 낙동강 원류인 장군천을 끌어안은 곳인 주실 동구에 세운 서당이다. 조선후기 실학의 학풍과 더불어 교육의 대중화를 위한 서당 건립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주실에는 월록서당이 건립되어 이 고을 교육의 중심을 이루었다.…
건물은 겹집이며 팔작집으로 지었다. 내부 중앙은 강당이고 양편에 넓은 방이 꾸며져 있는데 좌편방에는 존성재(存省齋), 우편에는 극복재(克復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구한말 이후에는 신교육의 전당으로 변신하였다. 식민지 시기에는 조석기(趙碩基)가 설립한 배영학당이 있었는데, 배영학당은 1927년에 조선농민사로부터 모범야학으로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도 야학은 계속되었던 한편 은화청년회와 주실 소년회의 연극과 음악회가 열리던 문화의 전당으로 구실하였다.”
주실의 세 봉우리를 다시 정리하면 1봉에는 만곡정사와 조동일 교수의 생가가 있고, 2봉에는 호은종택과 옥천종택, 그리고 조동걸과 조동원 교수 생가가 있으며, 3봉에는 개화기 이후로 신교육의 전당인 월록서당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지령(地靈)이 헛되지 않아 봉우리마다 열매가 맺혔다…. 주실마을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가슴이 뿌듯하다. 지조를 생각해본다.
조용헌 - 한국의 명가 명택 (경북 영양의 시인 조지훈 종택 역사.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