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파동의 대가 율곡 이이의 선견지명의 기적과 기행들
율곡 이이는 10만 양병설로 유명하다. 성리학을 집대성시킨 유학의 거장이었지만 그 이면의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율곡 이이가 말한 이기일원론은 사물과 현상은 하나이며 그 근원은 같다는 깊은 학문적 성과이며 본인은 실제 상수학의 대가이다. 어렸을 때 입산수도를 하여 격물치지와 사물을 보면 능히 그 상과 미래를 보는 혜안을 보인 것이다. 흔히 이야기 하는 격물치지란 그런 수준의 고도의 학문적 세계이다.
사물의 핵심을 꾀 뚫으며 사물의 미래를 보는 혜안을 스스로 가지면서 나라를 위한 부국강병과 교육을 위해 힘쓴 현실 정치가이며 혁명가이기도 하다. 그 이면적 삶은 상수학의 대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수 많은 일 중에는 미리 사물의 변화를 알고 기행 이적을 행한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겠다.
율곡은 크게 생애 4기를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제1기인 입지기(立志期 :1세부터 28세까지)는 선생이 시류와 도학(道學)사이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다가 어머니 사임당과의 사별을 기점으로 마침내 홀로서기를 하고 금강산에서 하산한 후 삶의 큰 뜻을 세운 시기이며,
제2기인 출사기(出仕期 : 29세부터 40세까지)는 호조좌랑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탁월한 시사의 진단과 처방으로 선조임금의 총애를 받던 시기이며,
제3기인 은거(隱居)와 후진양성기(後進養成期 : 41세부터 45세까지)는 해주 석담에 은거하여 격몽요결, 경연일기 등의 집필활동과 사계 김장생 등 후진양성에 몰두하던 시기이며,
제4기인 재출사기(再出仕期 : 46세부터 49세까지)는 다시 정계로 돌아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코자 10만 양병을 주장하였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위 사람들에게 넌지시 가르쳐주는 등 그 동안의 경륜으로 민족과 나라를 위해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시기이다.
사임당의 뜻하지 않는 죽음과 함께 정신적으로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허무함을 안겨 주었으며 여묘살이를 마친 율곡은 19세 되던 해 3월 금강산으로 들어가 산사(山寺)에 수도 생활을 하게 된다.기수련의 대가였으며 상수학 공부를 집중적으로 한 시기였다.
양기설(養氣說)에 대해서는 율곡이 금강산으로 들어가며 친구들에게 남긴 글의 내용에 이러한 말이 있다."기(氣)란 사람이 다같이 타고나는 것이다.그것을 잘 기르면 마음에 부림이 되고, 그것을 잘못 기르면 마음이 도리어 기의 부림이 되는 것이다.실제 기수련의 대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임종 말 년에 다시 조선이 곧 망할 것을 알고 조정에 다시 진입을 하는데 상수학으로 보니까 반드시 10년 안에 일본이 침략을 한다는 것을 알고... 그 유명한 "10만 양병설"도 상수역학으로 미래를 보는 혜안에서 나왔다.조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다.율곡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력의 쇠약함이 심한지라 10년도 가서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가 있을 것이니 10만 병졸을 미리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그들의 조세를 덜어주고 무재(武才)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변란이 있으면 10만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여 위급할 때 방비를 삼으소서."
라고 하였다.이에 유성룡이 반대의견을 말하면서 아뢰기를 "무사할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사회적 혼란만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하였다.이리하혀 율곡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 하여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율곡은 물러나와 유성룡에게,
"속유(俗儒: 식견이나 행실이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야 진실로 이것의 시의 적절함을 알지 못한다해도 공이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라며, 이어 오랫동안 수심에 잠겨있었다.
이 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미래를 보는 상수학의 혜안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잇을 것을 예상하고 임금의 파난길을 돕고자 피난길에 화석정을 지었다. 유래는 다음과 같다.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에는 이이가 국사의 여가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매양 들러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화석정(花石亭)이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강가의 벼랑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이가 세상을 떠난 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화석정은 선조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 의주로 피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급히 서울을 빠져 나와 임진나루에 도착한 선조 일행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무지 뱃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이때 갑자기 화석정이 불에 타며 밝혀준 불빛을 뒤로하고 무사히 강을 건너 개경 평양 의주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파주에서는 율곡 이이가 임종하면서 유언을 했다고 한다. 화석정 곳곳에 기름칠을 잘 해두었다가 모년 모월 모일에 불을 지르라고. 그날이 바로 선조가 도강한 날로, 율곡은 선조의 몽진을 이미 8년 전에 예언했다는 이야기다.
더 기가 막히는 혜안을 보는 경지는 이순신과 대면 그리고 뒤 이야기다.이순신을 보고 그 미래를 알고 향후 대책과 할 일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역사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짐작한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율곡은 이 순신(李舜臣)이 서로 만났을 때,"그 글귀가 쓸 날이 있으리니 부디 잊지 말라."하였다.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라 함은 "달은 어두운데 기러기가 높이 난다" 함이요, "독룡잠처수편청(毒龍潛處水偏靑)"이라 함은 "독한 용이 잠긴 곳에 물이 편벽되이 푸르다" 함이니, 이 두 글귀는 그 후 충무공(忠武公)이 대진(對陣)하였다가 써서 승전(勝戰)한 구절이다.
후일 이 순신이 임진왜란 때 노량에서 왜병을 맞아 대전하는데, 물빛이 맑자 율곡의 말을 생각하여 왜병이 올 것을 짐작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밤새 칼로 뱃전을 두드리게 하였는데, 아침이 되어 보니 왜병들의 손가락이 배 안에 가득했고, 바닷물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이 순신이 크게 승리하였다.
또. 임진왜란에서 가장 크게 무찌른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한산대첩과 명량해전에서 나온 쌍학익진법을 보면 그 답을 미리 제시를 해 준다.너무나 유명한 한산섬 달 밝은 밤~~~~이이가 이순신에게 미리 위급한 상황이 되거든 기러기를 생각하라는 힌트를 준다. 그 유명한 쌍학익진전법을 써서 크게 무찌른 대목이 나온다. 미리 신신당부를 한 내용이 나온다.
또 율곡은 병조판서를 있을 때 어느 날 조회를 마치고 나오다가 멀리서 내금위의 하급 관리(종8품 정도)로 있는 이 순신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도승지 유성룡에게 천거하여 말하기를 "장차 삼한을 구할 인물이니, 후일 기회가 있으면 조정에 천거하여 등용하라"고 일러두기도 했다.
율곡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다가올 미래의 일을 담당할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일에 대한 역활까지 어떤 방법을 써야하는지 까지 간접적으로 자세히 알려주는 신인의 경지를 보여준다. 당사자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끔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미래의 일을 대비하고 그 헤결책까지 간접적으로 자세히 언급을 하였다. 가히 상수학의 현묘함이여... 지극한 신묘의 경지를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이면에는 엄청난 비밀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