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 태어난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도 이의가 없겠지만, 그렇다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대목에 가면 사람마다 생각들이 실로 다양해진다. 오늘은 이 점에 대한 명리학적인 지혜는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명리학(命理學)이란 것과 연을 맺은 이래, 30 년간 끊임없이 연구해 온 주제도 바로 이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잘 산다는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의미한다. 부귀스럽고 영예를 누리는 사람들의 사주를 보면 분명 사주에 부와 귀를 누릴 상이라는 것이 확인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가령 엄청난 부를 축적했거나 권력을 누린 사람 중에, 그 인생 궤적이 사회 도덕적인 견지에서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도 많이 경험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과연 이런 인생을 잘 살다가는 인생이라고 긍정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윤리와 도덕의 문제, 그 사람의 사주에 반영된 그 사람의 가치관과 심성의 문제도 대두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시시비비(是是非非)란 것이 다분히 자의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선입견이나 시류의 분위기에 휩쓸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세적인 부귀가 그 사람의 도덕성과 반드시 부합하지도 않으며, 엇갈릴 경우도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한 때, 필자는 도덕이나 정의란 것이 근본적으로 관념이고 배부를 때 하는 얘기가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치우친 적도 있었고, 반대로 명리학 에서도 도의와 명분을 지선의 가치로 인정하고 그런 삶만이 성공적인 삶이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명분론에도 빠진 적도 있었다. 한편으로 명리학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별 볼일 없는 잡술(雜術)이 아닌가 하는 명리학 자체에 대한 회의도 가진 적이 있다.
사실 명리학에서 다루는 많은 사상과 가치들은 송명(宋明)유학, 즉 성리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또 역(易)에도 상수(象數)역과 의리(義理)역이란 양대 흐름이 있다. 간단히 소개하면, 상수역이란 육효나 사주를 통해 어떤 일이나 사람의 미래를 예측하려는 기술이며, 의리역이란 문자 그대로 사물의 옳고 그름을 더 중시하여 심신의 수양과 인간성의 고양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공자가 만년에 주역을 즐겨 읽다가 책 끈이 세 번이나 끊어져서 다시 매었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 역시 역에 심취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자의 공부 방향은 당연히 사물의 시비에 관한 측면, 즉 의리역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공자가 과연 의리역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그 해답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율곡 이이의 글이나 퇴계 이황 등 우리의 대학들이 남긴 글을 보면 두 가지 측면 모두에 관심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필자의 명리학과의 인연은 그러나 참으로 질기고 길어서 오랜 사상적 방황을 거듭해 왔지만, 몇 년 전부터 서서히 가닥을 잡은 것을 이제부터 얘기하고자 한다.
명리학에서 사람의 운명을 예측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 기운의 관계를 기초로 한다. 이를 간단히 열거해보자.
1) 비겁(比劫), 그 사람의 주관과 심지, 내지는 그 사람 자체
2) 식상(食傷), 그 사람의 행동력과 용기, 추진력, 자기주장, 재주
3) 재(財), 그 사람의 물질적 욕구와 지배욕
4) 관(官), 자기를 다스리는 자제력과 위험관리 능력
5) 인수(印綬), 사물로부터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기운
사주는 기본적으로 1백4 만 가지인데, 그 차이란 결국 이 다섯 가지 기운(세분하면 열 가지)의 차이를 말한다. 그리고 그 다섯 가지 기운들이 서로 밀어주고 견제하고, 돕고, 시샘하고 누르고 하는 것, 이를 생극제화(生剋制化)의 관계라 하며, 이로서 그 사람의 심성과 능력, 재운, 명예, 건강 등등 인생 전반의 일을 예측한다.
비겁이 강한 사람은 스케일이 크고, 비겁이 많은 사람은 친구가 많다. 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우두머리 기질이 있다. 식상이 강한 사람은 재주가 있으며, 많은 사람은 다재다능하고 유능하다. 재가 강한 사람은 금전이나 물질에 대한 욕망이 크고, 많은 사람은 현실적인 감각이 좋고 자기 일에 성실하다.
관이 강한 사람은 자기절제가 뛰어나서 직장이나 관료로서 출세하며, 많은 사람은 지나치게 모든 일을 살피는 사람이다. 인수가 강한 사람은 배우는 일에 인연이 많아서 학자형이며, 많으면 대개의 경우 집안이 유복하고 좀 보수적인 사람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나머지 기운과의 관계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천차만별, 아니 1백4 만 가지의 인간상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섯 기운 중에서 성공적인 삶, 잘 사는 삶을 영위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비겁과 식상, 그리고 인수, 이 세 가지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그간의 연구를 통해 얻게 되었다. 풀어서 얘기하면, 자신의 주체성과 자신의 주체성을 표출하는 기운, 그리고 사물과 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수용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좀 더 쉽게 풀면, 남의 얘기를 들을 줄도 알고(受容),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줄도 알며(主體性),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남에게 전달할 줄도 아는 능력(表現)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도가(道家)에서는 정기신(精氣神)이라 해서 세 가지 보배(三寶)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보배, 精氣神을 달리 설명하면 정은 수용하는 것이니 사람의 귀가 되고, 기는 주체성이니 사람의 눈이 되며, 신은 표현하는 것이니 입이 된다. 즉, 귀로 듣고 자신의 눈으로 보며, 입으로 말할 줄 알면 누구나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받은 기운이 실로 다양하기에-이를 일러 개성(個性)이라 한다-듣는 능력도 다르고 보는 능력도 다르며 말하는 것도 천차만별이다.
또 듣고 판단하기에 앞서 말이 앞서는 사람을 실(實)이 없다하며, 들을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사람은 그저 자신의 닫힌 생각만 있으니 그 또한 외곬이 된다. 그런가 하면, 들을 줄만 알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답답하고 베풀지 못하니 인색하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정기신의 삼보가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삼보가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기신 삼보에 비해 재(財)와 관(官), 재물에 대한 욕구와 지배력, 그리고 자기 절제력은 또 다른 성질의 것이다. 정기신이 인간의 자아와 정신세계를 말하는 주아주의(主我主義)적인 측면이 있다면 재관(財官)은 현실 세계이고 물질적인 측면을 말한다. 물질에 대한 욕구는 현실적인 것이며, 또 그 현실은 언제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자제가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莊子)가 주장하는 무위자연 속에서 우리의 삶을 고양하고 누리라고 말한 것이 정기신의 세계라면, 재관은 그 반대되는 측면이다
부귀를 누린 자는 사주를 보면 반드시 재나 관의 기운이 뛰어나다. 현실적인 감각이 있고, 위험을 피해 가는 처신의 능력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주를 볼 때에는 재관을 중시한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정작 중요한 것은 정기신의 삼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재관이 그대로의 현실을 말하는 세계(sein)라면 정기신은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을 말하는 당위의 세계(sollen)로서 우리 삶의 주체적인 측면이자 자아를 실현하는 경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주를 통해 한 사람의 운명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바를 말하는 소연(所然)과 그렇게 되어야 할 바인 응연(應然)이 어떤 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것들이 조화로운지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지를 파악하게 된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무슨 철학적인 논문을 쓰기 위함이 아니며, 응연과 소연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어려운 말을 쓰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먹고살아야 하는 생물체이기에 현실적인 감각도 중요하며, 또 공동체의 삶을 살고 있기에 가치관의 관념도 중요한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정기신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반드시 높은 정신세계만을 지향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현실의 삶이 척박하다 할지라도 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지, 환경이 왜 어려운 가를 이해하는 판단,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환경에 만족할 줄 하는 수용력이 바로 정기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가에서는 이를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소중한 세 가지 보물, 삼보(三寶)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제 마칠 때가 되었으니 좀 더 편한 말로 얘기하고자 한다.
환경이 어렵다면 그것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꺽지 말 것이며, 왜 어려운 가를 살피는 명석함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무턱대고 환경을 개선하려고 자신만의 고집을 부리기보다는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같이 조화하고 순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공자는 세상에 가장 구제 불능인 사람을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자포자기 하지만 않으면 누구나 때가 되면 좋은 봄날을 맞이하여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지닌 꽃을 피워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사주와 타로
원문보기▶ 글쓴이 : 김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