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도 어릴 때 어머니가 어디 가서 받아온 부적을 속옷에 매달고 입시를 치른 경험이 있다. 괜히 마음 든든한 면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우습기만 하다. 오늘은 바로 그 부적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부적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다닌다. 이는 우리 나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일본이나 대만, 동남아 각국에서도 일반적인 일이다. 대만 사람들은 일인당 평균 30-40 장 정도의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런데 이 부적이란 것이 과연 효험이 있는 것일까?
필자의 솔직한 생각은 ‘모른다’이다. 효험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증할 길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이가 부적을 지니고 수능시험을 보았더니 아주 좋은 점수가 나왔다고 할 때, 과연 그것이 부적의 효험인지 아닌지를 검증할 길은 없는 것이다.
검증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서 그 학생이 부적을 지니지 않고 시험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타임 머신이 없는 이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효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모두 그 사람이 지닌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필자의 신념은 효험이 없다는 쪽이다.
부적이란 것은 명리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오늘날 역술인들 중 대다수가 부적 장사를 하고 있다. 효험과는 관계없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사주를 봐서 조금만 안 좋다 싶으면 뭐를 풀어줘야 한다면서 대뜸 부적을 쓰라고 권하거나, 겁을 주어서 강매한다. 실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적이란 것은 도교 신앙의 일부분이며, 특히 도교 의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에 대해 좀 얘기하고자 한다.
도교란 알다시피 중국에서 발원한 민간 신앙의 체계이다. 도교는 불로장수를 달성하려는 일종의 방법론이기도 하고, 나아가서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종교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의 본질이기도 하지만, 불로장수와 신선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과는 또 다른 특징을 지닌다.
도교 의학의 발전은 사실상 중국 한의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데, 이는 세 가지 사상적 흐름이 종합된 것이다. 외단파(外丹派)와 단정파(丹鼎派), 그리고 부록파(符
派)가 바로 그것이다.
외단파는 희귀한 약초나 재료를 구해서 특수한 비법으로 영약을 만들어, 이를 복용함으로써 불로장생을 꾀하고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는 연금술이나 고대 화학의 발생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흔히 얘기되는 진시황의 불로초나, 무협지에 나오는 소림사의 대환단 같은 약이 바로 그것이다.
이 약은 사람의 심신을 맑게 하고 불로장생을 가능케 하며, 무술하는 사람들에게는 수 십년의 내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본초나 침구, 탕액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한의학은 바로 여기에 발전의 연원을 두고 있다.
다음으로 얘기할 것은 단정파이다. 단정파가 중시하는 것은 약물을 통한 방식이 아니라, 심신의 수행을 통하여 불로 장생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도인이나 조식, 내단과 벽곡 또는 방중술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현재의 기공 체조나 호흡 요법, 절식이나 생식 요법, 성(性)과학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도교 중에서는 가장 차원 높은 수양의 경지라 할 수 있는 단정파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단전의 기를 기르는 단 체조나 수련회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얘기할 것이 바로 부적과 직접 연관을 맺는 부록파이다. 부록파는 고대 샤머니즘이 중국 문화와 접촉하면서 생겨난 흐름이다. 알다시피 고대 문명의 초창기에 무당의 주요 임무 중에 하나가 병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이런 전통이 이어져서 부적이나 주문을 통해 악귀나 액을 물리치고 소원을 성취케 하는 방법으로 발전시킨 것이 부록파이다. 일종의 심리적 요법 내지는 신앙 요법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도교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부분이기도 하다.
잠깐 얘기가 곁으로 흐르지만, 무당과 관련하여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를 알려 드리고자 한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사람을 의사(醫師)라 하는데, 이 의사의 의(醫)자는 원 형태가 아니다. 변형되기 이전의 글자에는 밑 부분에 酉(유)자 가 아니라, 무당을 뜻하는 巫(무)자가 붙어 있었다. 이는 고대 전쟁에서의 군의관을 뜻한다.
글자를 분해하면, 활통을 뜻하는
(의)자와 창이나 몽둥이를 뜻하는 殳(수)로 되어 있으니, 전쟁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고 그 아래에 무당 巫가 붙어 있어 있었으니 醫의 원 뜻은 군의관으로서 당시 병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주술(呪術)적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 보다 합리적인 의술의 발달과 함께 巫자 대신에 별 뜻이 없는 酉(유)자를 가져다 붙인 것이다.
그럼 다시 본 얘기로 돌아가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림이나 글자에는 어떤 힘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이 있어 왔다. 원시 시대의 암각화나 샤머니즘적 전통이 그 좋은 예가 된다. 우리 나라의 경우, 통일 신라 시대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서 역신을 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런 것이 일종의 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도교적 차원에서 더욱 발달시킨 것이 오늘날의 부적인 것이다.
부적을 쓰는 법은 사실 대단히 엄격하고 까다롭다. 날을 택하여, 목욕재계한 후에 동쪽을 향하여 정수(淨水)를 올리고 분향한다. 그리고 치아를 3번 마주치고 주문을 외운 후에 부적을 쓰게 되는데, 오늘날 이런 식으로 부적을 쓰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정성이 깃들이지 않았으니 필자는 더더욱 부적의 효험을 믿지 않는다.
부적은 붉은 빛이 나는 경면주사(鏡面朱砂)나 영사(靈砂)를 곱게 갈아서 기름이나 설탕물에 개어서 쓰며, 종이는 원래 괴황지(槐黃紙)를 쓰는 것이 원칙이나 누런 빛이 도는 창호지를 쓰기도 한다. 종이에 쓴 것만이 부적은 아니다. 흔히들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인장이 영험한 힘을 갖는다는 얘기를 하는데 이 또한 일종의 부적이다. 벼락을 맞을 때, 벼락 신이 들어와서 잡귀의 침입을 막는다는 생각이다.
부적에 사용되는 그림이나 글자는 대단히 다양해서 용이나 호랑이, 독수리 등이 들어가는가 하면, 일월성신(日月星辰)이나 기타 추상적인 문양이 들어가기도 한다. 또 글자는 그냥 쓰기도 하지만, 한자의 파자(破字)를 써서 여러 가지로 결합하고 여기에 줄을 긋는 형태들이 많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부적 상단에 ‘칙령(勅令)’이라는 글자를 적어, 강력한 주술적 힘을 나타낸다.
부적은 인생사가 복잡다단한 만큼 그 종류도 실로 많지만, 크게 나누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력(呪力)을 빌려 소원성취를 가능케 하는 부적이고, 다른 하나는 사(邪)나 액(厄)을 물리치는 부적이다.
대충 종류를 보면, 소망성취부 초재부(招財符) 재수대길부 대초관직부 합격부 생자부(生子符) 가택편안부 만사대길부 삼재(三災)예방부 귀불침부(鬼不侵符) 벽사부 구마제사부(驅魔除邪符) 축사부(逐邪符) 등이 있으며 벌레와 짐승을 막는 비수불침부나 야수불침부도 있다.
그밖에도 각종 살을 막아주는 상문부(喪門符)나 도살부(度煞符) 등이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흔한 것이 병을 물리치는 병부(病符)이다. 이러한 병부는 아픈 곳에 붙이거나 불살라서 마시기도 하고 벽이나 문 위에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리고 부적을 쓸 때 사용하는 경면주사는 화학적 성분이 황화 제2수은인데, 불로 가열하면 유황과 수은으로 분리된다. 예로부터 유황은 양의 정(精)이라 생각되었고, 수은은 음의 정이라 믿어졌기에, 경면주사는 음양의 기운이 조화된 물질이라 여겨졌다. 색깔이 대단히 진한 붉은 색이라, 부정하고 잡스러운 것이 다가오면 모두 태워버린다고 믿어져 왔다. 주로 중국에서 나는데 좋은 것은 워낙 가격이 비싸서 대부분 저가품을 쓰고 있다.
이상으로 부적에 대해 알아보았다.
앞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필자는 부적의 효험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효험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증할 길이 없으니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심쩍긴 하지만, 그나마 부적 쓰는 이가 정성을 다했다면 심리적인 위안이라도 되겠지만, 그냥 시도 때도 없이 마구 그려대는 부적이라면 아예 신뢰가 가질 않는다.
필자가 여기서 부적이 근거가 희박한 것이라고 얘기한들, 부적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초월적인 힘에 매달리고 싶은 인간의 바람이 있는 한 앞으로도 부적은 계속해서 잘 팔려 나갈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부적 산업도 좀 더 근대화하고 합리화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근대화 내지는 합리화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인가 하면, 일본 같은 나라는 부적을 대단히 많이 소비하지만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고, 팬시 점에서 파는 예쁜 카드처럼 만들어서 어디서나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정말 일본적인 상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대만이나 동남아 역시 부적이 그리 비싸지 않다. 그래서 수 십장씩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지갑 속에, 안 주머니 속에, 바지 속에, 구두 밑창에, 아무튼 붙이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로 부적을 선호한다.
정말 우스워 죽을 노릇이지만, 차라리 그것이 더 밝고 건전한 부적 소비 패턴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괜히 어디 가서 물어봤더니, 나쁘다 하는 얘기를 듣고 ‘풀어야’ 한다는 협박 때문에 거금을 내고 부적을 써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성이 들어갔는지, 손이라도 잘 씻고 쓴 것인지도 모르는 알량한 부적을 편하지 못한 마음으로 받아오느니 일본이나 대만의 방식이 훨씬 건전하고 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부적보다는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정갈한 물 한 그릇 떠놓고 기도하던 그 마음이 몇 백배, 몇 천배 강한 위력을 지닌 부적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명리학과 부적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동아시아 세계가 다듬어낸 지혜의 체계인 음양 오행과 명리학이 왜 그런 종이 조각들과 같이 다녀야 하는지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